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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명진 Dec 31. 2017

코트 위의 눈물

윔블던 테니스 결승전 관람기

#_레전드의 완성

지난여름, 전시 준비가 한 창일 때에 런던에 다녀왔다. 익숙한 도시였지만 이번엔 좀 달랐다. 일반적인 화보나 여행사진이 아닌 스포츠 촬영. 그것도 윔블던 테니스의 결승전을 찍는 일이었다. 비록 테니스를 잘 모르고 학생 때 몇 번 쳐 본 게 다이지만 - 스코어 이름에 러브가 들어있어 참 낭만적이라 생각했다- 윔블던의 위상이나 인기는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윔블던은 1877년 처음 개최된 세계 최고(最古)의 역사를 지닌 테니스대회로 프랑스오픈, 호주오픈, US오픈과 함께 테니스 4대 그랜드 슬램 중 하나이다. 긴 세월 전통을 이어오다 보니 두 번의 세계대전 동안 대회를 중단하기도 했고, 유일하게 잔디코트에서 경기를 치른다거나 반드시 흰색 경기복만을 입어야 하는 등의 규정이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큰 인기를 얻지 못하지만 서구사회에서는 굉장히 인기가 많다. 한국의 경우 2013년 윔블던 주니어 대회 준우승을 하면서 차세대 유망주로 부상한 정현 선수가 있다. 아쉽게도 발목 재활을 위해 불참을 선언했지만 훗날 그의 활약을 기대해본다. 워낙 쟁쟁한 선수들이 등장하다 보니 그만큼 관심도 높은데 BBC에서는 경기 당 650만~740만의 시청률을 기록했고, 구글에서 올 한 해 가장 많은 검색을 한 스포츠 이벤트 중 수퍼볼이나 챔피언스리그를 제치고 1위에 올랐다.

현지에서의 관심은 더욱 뜨겁다. 특히나 결승전이 열리는 센터코트의 로열박스에는 정말 영국 왕실 가족들이 참관을 한다. 윌리엄 왕세손과 케이트 미들턴 부부나 베컴 부부 등이 자리하는 등 관심이 아주 높다.

티켓을 구하기 위해 온라인에선 클릭 전쟁을 치르고 현장에서는 일주일 넘게 텐트를 쳐 놓고 줄을 서는 등 갖은 노력을 다한다. 이미 내년 티켓은 진작에 다 팔렸고 비아고고에 올라온 가장 저렴한 티켓이 £3,450(한화 약 495만 원)에 달한다.

의류 브랜드 해지스에서 윔블던과 협약을 맺고 다양한 디자인의 옷을 출시하면서 고객을 대상으로 이벤트를 열었다. 그들의 테니스 여행을 담는 역할로 런던에 가게 된 것. 덕분에 일이 아니면 결코 해보지 못할 귀한 경험을 했다.  

윔블던 테니스는 단지 경기만을 보는 것이 아니라 마치 놀이공원에 온 것처럼 다양한 즐거움을 누릴 수 있다. 오랜 역사를 보관하고 기록한 테니스 박물관부터 기념품 매장을 돌고 잔디밭에 비스듬히 누워 피크닉을 즐기며 경기를 본다. 꼭 경기장의 관람석이 아니어도 대형 전광판을 통해 편안하게 경기를 볼 수가 있다. 오히려 런던 시민들은 이 곳을 더욱 즐기는 분위기였다.

5번의 우승을 거머쥐었던 여제 비너스 윌리엄스를 꺾고 스페인의 가르비녜 무루구사가 우승을 차지한 여성 단식에 이어 남성 단식 결승전은 윔블던 테니스 대회의 대미를 장식하게 된다.

세계적인 테니스 스타 나달, 머레이, 페더러, 조코비치 등이 우승을 향해 달려왔지만 마지막 경기는 백전노장 로저 페더러와 크로아티아의 젊은 피 마린 칠리치 간 대결이 되었다. 상대전적은 6대 1로 페더러의 우세였으나 지난 2014년 US Open 준결승에서 칠리치에 패한 바 있는 데다, 테니스 선수로는 매우 늦은 나이인 35세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칠리치의 우승도 조심스레 점치고 있었다.


8강과 결승을 보면서 느낀 것인데 신사의 스포츠라는 타이틀 때문인지 경기를 시작할 때의 적막감은 숨이 막힌다. 제법 넓은 관람석에선 그 어떤 소리도 나지 않는다. 특히나 결승은 공이 라켓에 맞는 소리와 선수의 기합소리뿐, 아무 소리도 들려서는 안 되는 것처럼 보였다. 페더러는 마지막 윔블던 경기가 될 거라 했고 칠리치는 첫 번째 결승 진출이었다. 확실히 선수들은 긴장해 있었고 멀지 않은 곳에 앉은 객석까지 그들의 투지가 전해져 왔다. 테니스의 황제답게 페더러는 이번 윔블던에서 단 한 세트도 내주지 않고 결승까지 올라왔다. 그 기세를 몰아 첫 세트 역시 페더러의 승리. 객석에서는 환호가 터져 나왔고 연신 '고 로져!'를 외쳐댔다. 2세트마저 몰아붙여 승리를 따 내더니 마지막 3세트에서는 고비를 만나는 듯하다 결국 승리를 가져갔다.

개인 통산 19번째 그랜드 슬램, 2003년 첫 우승 뒤 윔블던 통산 최다 8번째 우승. 대단한 기록의 탄생이었다. 관객들은 환호했고 모두가 기뻐했다. 특히나 대회 사상 최고령(만 35세 11개월)으로 5년 만에 다시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다는 점이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다들 페더러의 약진은 끝났고 은퇴까지 생각해야 하지 않나 하는 평을 했음에도 그는 전성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그것도 결승까지 단 한 세트도 놓치지 않은 무실세트 우승, 퍼펙트게임이었다.

 

#_지독한 고독에 관하여

페더러는 시상식 후 아이들을 안아주면서 결국 눈물을 보였다. 얼마나 감격적이겠는가. 비록 아버지의 우승이 어떤 의미인지 까지는 아직 모를 나이지만 그 현장에 있던 아이들에게 자신의 건재를 증명하는 모습 또한 감동적이었다. 철저히 혼자이게 하는 테니스라는 스포츠. 그 코트 위의 고독을 온전히 홀로 감당해 내고 승리를 쟁취한 자의 눈물이었다.   

그 맞은편에는 눈물을 보인 또 다른 남자. 마린 칠리치가 있었다. 비록 세계랭킹 6위라고 하나 그에게는 처음 올라온 윔블던 결승이었고 놓치고 싶지 않은 경기였을 것이다. 그러나 관중석은 압도적으로 페더러를 응원하고 있었다. 첫 세트부터 칠리치의 주 무기인 강력한 서브가 통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발가락의 물집이 발목을 잡았다. 결국 2세트 경기 도중 메디컬 타임아웃을 불렀고 치료 중간 울음을 터뜨리고말았다. 운동선수가 경기 중간 눈물을 보이는 일이 흔치 않은데 그 모습을 보며 너무 많은 생각이 들었다.

코트 위의 절대고독. 중요한 경기에 몸이 따라주지 않아도 그 누구와도 이야기할 수 없는 외로움. 그를 응원하는 사람도 몇 없다. 결국 우리가 알 듯 한세트도 얻지 못하고 패배했다. 페더러가 흘린 승리의 눈물보다 칠리치의 눈물이 내게는 더욱 와 닿았다.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답답할까. 다 큰 성인이 전 세계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한참을 훌쩍였다.

#_무기력의 되풀이

테니스뿐만 아니라 세계 최정상급의 운동선수라면 아쉬울 것 없는 삶을 살거라 생각한다. 유명세와 높은 수입. 스폰서와 화려한 행사들, 응원하는 사람들 덕에 제법 행복한 삶을 살겠지.

그럼에도 경기가 뜻대로 되지 않으면 얼마나 속상하겠는가. 그 적막한 코트 안에 혼자만 있다는 압박감이 그의 영혼을 무너뜨렸을 것이다. 단지 우승을 하지 못해서나 발이 아파서는 아닐 것이다.


올 한 해 제법 많은 일을 했다. 펀딩과 전시, 다양한 촬영들. 어려운 시간도 있었고, 환희의 순간도 맛보았다. 그러다 지난 11월, 오랜 시간 공들여 온 일이 마음과는 반대의 결과를 낳았다. 속이 많이 상했다. 참 열심히 했는데 결국 벽을 만나니 무너지고 말았다. 일생일대의 일이 실패를 한 것도 아닌데 그 후 극심한 무기력에 빠지고 말았다. 이게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나라를 잃은 것도 아니면서 세상 모든 일에 관심을 끊고 싶을 정도로 맥이 빠졌다. 의지를 갖고 열심히 사는 이유에 누군가는 가족이, 누군가는 돈벌이가, 누군가는 명예가 우선 되겠지만 내게는 스스로의 내적 동력이 가장 컸다. 그런데 엉뚱한 이유로 동력을 잃고 나니 아무것도 의미가 없어 보였다.

일도 여행도 관심 없고 그저 현실을 외면하고 싶었다. 집에 틀어박혀 닥치는 대로 영화를 보거나 잠도 자지 않고 아무 책이나 들고서 술을 마셨다. 잠에서 깨면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짧은 영상들에 시선을 맡기다 끌려가듯 미팅을 가고 방송을 하고 촬영을 했다. 속내를 드러낼 곳도 없어 괴로웠다.


사람의 마음이 참 그렇다. 이길수도 질 수도 있는 경기라는 걸 알고 코트에 오르면서도 그게 내 마음과 같지 않을 때 우리는 참담함과 무력감을 느낀다. 그것이 극복할 수 없다는 걸 깨닫고 나면 무기력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그것도 올해 까지만 하려 한다. 우리네 인생에 파도는 있어도 추락은 없어야지. 비록 오르내림이 힘겨울지 몰라도 절망하지는 않으려 한다.

결승전에서 나는 고요한 코트의 적막을 깨고 소리쳤다. "고! 마린!" 몇몇이 함께 외쳐 주었다.

비록 우리 삶이 뜻대로 흘러가지 않더라도, 눈물이 나더라도, 다시금 라켓을 꽉 쥐어봐야 되지 않겠는가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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