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나는 무대를 갖추기 위한 조건

Episode 10. 여백이 많은 하루의 풍요로움

by 송은정

매일이 요즘과 같다면 세상은 정말 살 만한 곳임에 틀림없다.부활절 주간을 맞아 빌리저들과 휴가를 온 뒤로 나는 먹고 자고 쉬는 본능에 충실한 일상을 누리는 중이었다.


게으른 나날이 가능했던 건 우리의 휴가지가 다름 아닌 몬그랜지 안의 오로라하우스이기 때문이다. 지난 크리스마스 홀리데이처럼 빌리저들이 다칠까, 사라질까 전전긍긍할 필요 없이 보통의 일상에서 노동만 제하면 될 뿐이었다. 집에서 불과 100미터 떨어진 장소에서 보내는 휴가라니. 누구의 간섭 없이 우리만의 느슨한 룰에 맞춰 생활할 수 있는 곳이라면 거기가 바로 세상에서 가장 안락한 여행지다.


4명의 코워커와 6명의 빌리저가 지내는 이 공간에서 우리는 평소보다 1시간쯤 늦게 일어나고 느지막이 식사를 했다. 세끼 중 한끼는 꼭 외식을 했는데 가끔은 킬킬의 중국 식당에서 배달을 시켜 먹었다. 볶음밥과 볶음면, 새콤한 탕수육. 세계 어디를 가든 중국음식은 게으른 자들의 편인가 보다.


뉴스에서는 때아닌 폭설로 인한 도로 통제 상황이 보도됐다. 몬그랜지 주변으로는 눈이 쌓이질 않아 상황의 심각성이 그다지 실감나지 않았다. 나른한 공기를 마시며 집 안에서 뒹구는 게 지루해질 무렵 다 함께 드라이브를 나서기로 했다. 뉴캐슬에서 바다를 보고 맛있는 아이스크림도 먹을 계획이었다. 쨍하게 맑은 하늘을 보니 더이상 눈이 올 것 같지 않았다.





첫 목적지가 어디인지도 모른 채 운전대를 잡은 마이클을 따라나서길 5분쯤 지났을까. 새하얀 설산이 눈앞에 나타났다. 마을 어디에서나 고개를 들면 보이는 몬 산맥이었다. 사시사철 푸르기만한 줄 알았는데 겨울의 끝에서야 새하얗게 변한 얼굴을 보여주었다.


스팔가 댐 근처에 이르자 차량들이 가다 서다를 반복하기 시작했다. 좁은 1차선 도로 양쪽에는 눈더미가 허리까지 수북이쌓여 있었다. 아차 싶었지만 돌아가기엔 이미 늦었다. 서행하는 차안에서 우리는 창밖 풍경을 감상했다. 압도적인 광경에 보는 내내 탄성이 터져나왔다. 눈 덮인 평원 한가운데 저수지가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보드라운 내리막을 따라 눈썰매를 타는 아이들이 개울가의 돌멩이처럼 굴러다녔다. 앞으로 나아가길 포기한 마이클은 결국 도로 한쪽에 차를 세웠다.


차량 행렬에서 빠져나온 건 오히려 잘한 일이었다. 안에서 바라만 보던 풍경 속으로 우리는 텀벙 뛰어들었다. 백설기처럼 뭉친 눈덩이를 크리스틴의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부벼주자 그녀가 놀란 척 귀엽게 뒷걸음질쳤다. 무덤덤한 빌리저들과 달리 확실히 신이 난 쪽은 코워커들이었다. 나와 해영, 마그다는 설산을 배경으로 한껏 몸을 띄우며 점프샷을 시도했다. 연사로 찍은 10컷 남짓의 순간들 중에 세 사람이 동시에 하늘을 나는 장면은 어쩜 단 한 번도 없었다. 결국엔 각자의 타이밍대로 사는 것이다.


뉴캐슬의 바다는 설산의 투명한 풍경과는 또 다른 분위기였다. 영롱한 물빛은 살얼음처럼 차가워 보였지만 동시에 마음을 편안하게 가라 앉혔다. 겨울이라 그런지 해변은 여느 때보다 조용했다. 지난 봄처럼 모래성을 쌓는 아이들과 벤치에 나란히 앉아 대화를 나누던 노인들의 정다운 모습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계절에 맞춰 옷을 갈아입듯 바다도 그에 어울리는 풍경을 걸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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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눈앞에 놓인 오늘의 풍경을 오래도록 마음에 담아두고 싶었다. 190센티미터는 족히 넘을 마이클 옆에 찰싹 붙어 팔짱을 낀 안나의 뒷모습을, 비행운이 남은 하늘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오래도록 바라보던 마틴의 얼굴을. 몬그랜지에서의 일상은 약속된 시간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었다. 그 밖을 나서는 순간 지금껏 나와 함께한 사람들이 순식간에 사라질 것만 같았다. 야속하게도 약속된 시간이 이제 얼마 남지 않았다.


여백이 많은 하루였지만 부족함은 조금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늘의 성취라고 해봐야 무사히 눈길을 뚫고 뉴캐슬에 도착해 아이스크림을 먹은 일 정도였다. 풍족한 삶을 완성하는 데 필요한 조건이란 대체 무엇일까.


아무래도 안정된 직장과 무난한 취미 생활 하나쯤은 있어야겠지. 주기적으로 안부를 챙기는 친구들도 있어야 할 테고, 1년에 한두번쯤은 해외 여행도 다녀와야 하지. 결혼을 하더라도 아이는 아직이지만, 만약을 위해 좀 더 체계적으로 재정 관리를 해야겠지. 그렇게 평생을 걸쳐 하나씩 갖춰나가면 내 삶은 완성된 무대처럼 반짝반짝 빛나게 될까.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나는 하루 동안 찍은 사진들을 하나씩 넘겨보았다. 단순해서 아름다운 풍경과 단순해서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담겨 있었다. 해변을 걷는 동안 우리는 둘이었다가 혼자였다가 때로는 다 함께 손을 잡은 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