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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ngchic Aug 19. 2024

머딜 컴파니, 석 달 연대기

이 글은 픽션입니다. 혹시 자신의 이야기 같다고 느껴져도 착각입니다.

첫 날

“미친 듯이 성장하고 있는 우리 머딜 컴퍼니에 입사하신 것을 행운으로 여기세요!” 순간 정아는 귀를 의심했다. 보통 뒤에 ‘환영합니다.’가 붙지 않나? 몇 번 이직을 해봤지만, 이런 첫인사는 처음이었다. 물론 몇 달간 백수 생활을 했던 정아도 채용 합격 소식에 기뻤지만, 이렇게 노골적으로 부채감을 끼얹는 첫인사라니. 인사 팀장은 말을 이어 나갔다.


“머딜이 뭐의 약자냐! 머니 딜리버리 아니겠어요? 즉 우리는 여행객에게 공항으로 돈을 배달해 주는 서비스를 합니다. 코로나가 풀리니까 사람들이 뭐를 한다?” 그는 정아의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답을 요구했다. 정아는 애써 그의 눈빛을 외면하다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여…행?”

“그렇죠! 여행을 갑니다. 그러니까 뭐가 필요하겠어요?” 그는 또 다른 입사자와 눈을 맞추며 입 모양으로 ‘외화, 외화, 외화’라고 속삭인다. 그의 속삭임을 외면하지 못한 또 다른 희생양은 조그마하게 대답한다.

“외화..?”

“네 맞습니다! 그래서 우리 머딜 컴퍼니는 제이 커브를 그리면서 100% 200% 300% 성장하고 있어요! 이런 성장하는 회사에 여러분은 재수가 좋게도 입사를 하신 겁니다. 이건 다 유능하신 우리 조명오 대표님의 인사이트 덕분입니다. 그러니까 감사하게 생각하시면서 내 일 네 일할 거 없이 일하시면 됩니다. 그럼 식사하시고요! 끝!” 8인실 회의실에서 진행된 신규 입사자 오리엔테이션은 인사 팀장의 우렁찬 ‘끝!’이라는 외침과 함께 종료됐다. 정아는 길어지지 않아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서도 쎄한 기분을 떨쳐낼 수 없었다.


그의 말대로 머딜 컴퍼니는 요즘 떠오르고 있는 스타트업이었다. 머딜 컴퍼니의 주요 사업은 사용자가 앱을 통해 환전을 신청하면 정해진 시간에 맞춰 공항에 외화를 배달해 주는 서비스로  코로나 후, 여행 특수를 맞이해 회사의 지표는 우상향을 그리고 있었다. 정아도 성장하는 회사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 채용 공고에 지원했고 면접을 보았지만, 채용이 된 것을 대단히 감사해야한 다는 말을 입사자 오리엔테이션에서 들을 줄은 몰랐다.


오리엔테이션이 끝나자, 담당 인사팀 직원은 정아를 자리로 안내해 주었다. 자그마하고 똥똥한 40대 초반 정도 돼 보이는 남자가 스프링처럼 일어나 정아를 맞이했다.

“오! 드디어 오셨군요. 제가 지난달부터 정아님을 엄청나게 기다렸어요. 그런데 입사일을 당겨주지 않아서 좀 서운하긴 했지만, 뭐 이렇게 오셨으니까. 일단 업무용 메신저부터 설치하시고요. 제가 버디라서 첫날 점심은 우리 둘이 밥을 먹으라는데..2만 원까지 지원된다니까.. 가만있어봐.”

“혹시… 성함이.. 아니 누구세요?” 냅다 기다렸다 서운했다는 말을 퍼붓는 그를 가로막고 정아는 이름과 정체를 물었다.

“아 내 정신 좀 봐. 제가 제품운영팀 팀장이고 제 이름은 김조형이고요. 오늘은 돈가스를 먹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아 싫다고 하시면 진짜 서운할 거 같은데.. 그래도 오늘 정아님 입사 첫날이니까 서운해도 할 수 없죠. 드시고 싶은 거 있으실까요?”

“아.. 아뇨. 돈가스 좋습니다.”  정아의 확답을 들은 조형은 다시 또 혼자 주절거렸다.

“이 앞에 한우동 돈가스는 만 천 원이니까 두개 먹으면 이천 원만 각자 내면 되겠다. 현금 천 원 있으신가요? 없으시면 나중에 카카오페이로 보내주세요. 점심시간 50분 남았으니까 빨리 나가요. 정아님.” 이미 조형은 새로 입사한 정아보다 정아과 함께 먹을 수 있는 천 원짜리 돈가스에 꽂혀있었다. 정아는 이 시끄럽고 서운한게 많은 사람과 돈가스를 먹어야 하고, 더 나아가 매일 같이 일을 해야 한다는 사실에 정신이 아득해졌다. ‘내가 아직 저분을 잘 몰라서 그럴 거야. 좋은 부분이 있겠지. 아니 저 사람이 아니어도 좋은 사람들이 있겠지.’ 그렇게 스스로를 달래며 조형의 뒷모습을 따라서 발걸음을 재촉했다.


한 달 차

정아의 캘린더에는 조형이 보낸 ‘1 on 1 미팅’ 일정이 박혀 있었다. ‘그래 팀장이니까. 1 on 1은 해야지.’라고 생각하며 정아는 힘겹게 [수락] 버튼을 눌렀다. 사실 한 달 동안 정아는 조형에게 완전히 질려 있었다. 첫날 말끝마다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반복했던 그는 예상대로 엄청나게 감정적인 사람이었고 틈만 나면 티타임 명분으로 정아를 불러냈다.


“아니 정아님 조명오 지가 운이 좋아서 대표가 된 거지 진짜 멍청한 거 알아요? 제가 우리 회사의 OKR이 뭐냐! KPI가 뭐냐! 플라이 휠을 그려봐라! 라고 회의에서 얘기하니까 *플라이휠이 뭔지도 모르고 막 웃으면서 내 자동차 휠에 기스났는데 그러는 거예요.”

(*플라이휠: 짐콜린스의 플라이휠을 돌려라라는 책의 경영 이론으로 기업 비즈니스 모델의 선순환 바퀴를 의미한다. 온라인 도서 판매 서비스 기업이었던 아마존이 플라이휠 경영으로 세계적인 커머스 기업으로 성장했다고 한다. )

“아 그러셨어요?”

“그래서 회사가 더 성장하겠냐고요. 생각해서 얘기해줬더니 진짜 사람 서운하게.”

“서운하셨겠네요.”

“그리고 우리 팀 디자이너 전석재. 걔한테 제가 프레젠테이션 좀 디자인 해보라고 시켰거든요? 그런데 자기는 제품 디자이너라면서 안 하겠다고 딱 잘라서 말하더라고요. 아니 내 일 네 일 할게 어딨어. 내가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나도 회사 생각해서 하는 건데. 진짜 서운하네 생각할수록.”

“어떤 프레젠테이션이에요?”

“플라이휠을 그리라고 했죠. 제가 심지어 초안도 이렇게 다 종이에 그려서 줬는데.” 조형은 메모 패드에서 찢어온 꾸겨진 종잇장을 정아에게 건넸다. 여러 개의 동그라미가 종이에 그려져 있었고, 한글인지 영어인지 알 수 없는 그의 글씨가 여기저기 난잡하게 붙어 있었다. 두 방의 서운함을 쌓아 올린 조형은 종이를 보고 있는 정아에게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정아님. 제가 플라이휠도 그려야하고, 엉망인 회사도 정리해야 하니까 이번에 어드민 개편하는 작업은 못 할 거 같아요. 정아님이 좀 맡아서 해주면 좋을 거 같은데 괜찮으시죠? 온보딩에도 도움이 될 것 같고.. 회사에 12년 차 시니어가 입사하니까 참 좋네요!”


늘 이런 식이었다. 조형은 언제나 본인의 이야기를 죽 늘어놓고 앓는 소리를 하다가 온보딩에 도움이 될 것 같다며 정아에게 일을 미뤘고, 시니어니까 이 정도는 커버할 수 있지 않냐며 은연중에 압박을 가했다. 정아는 이런 식으로 한 달 만에 세 개의 프로젝트의 매니저가 되었고, 퇴근 시간은 늘 오후 10시를 넘겼다.


‘그래도 이건 공식 1 on 1 미팅이니까’ 조형을 만나러 회의실로 향하는 정아는 마음을 다시 한 번 추슬렀다. 개선할 프로세스에 대해 한번 상의를 해봐야겠다고도 생각했다. 외화를 접수받고 배달하기까지 고객에게 보이는 상태 값들을 다시 한번 정돈할 필요가 있어 보였다. 정아는 이전 직장에서 상사와 했던 1 on 1 미팅을 상상하면서 조형과 논의할 목록을 머릿속으로 체크했다. 공식적인 미팅에서 잘 정돈된 업무 관련 이야기로 물꼬를 잘 트면 그의 감정 쓰레기통이 된 듯한 현재의 관계도 정상으로 돌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싶은 게 정아의 바람이었다. 회의실 문을 열자 조형의 얼굴이 보였다. 정아는 테이블에 노트북을 놓고 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조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정아님 내가 일대일 미팅이니까 얘기하는데 지난번에 정아님한테 진짜 서운했잖아요…”

그렇다. 조형에게 1 on 1 미팅은 특별히 특정 인물에게 자신이 서운했던 점을 토로하는 시간이었다. 정아는 하려는 모든 말들을 목구멍으로 꾹꾹 눌러 삼켰다. 그에게 어떤 말도 하고 싶지 않았고, 어떤 이야기도 듣고 싶지 않았다. 정아는 속으로 그저 뉴진스의 슈퍼샤이 후렴구를 반복할 뿐이었다.


두 달 차

같은 팀 수민이 정아를 은밀히 불렀다.

“정아님 저 어떻게 하면 될까요? 조형님이 매일 메시지를 이렇게 보내시는데…” 수민이 건네준 스마트폰을 본 정아는 놀라움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정말. 이렇게 메시지를 매일 보낸다고요?”

“네..  저 그냥 퇴사해야 할까 봐요.” 수민과 조형의 일대일 메시지 창에는 매일 20줄이 넘는 조형의 메시지가 전송돼 있었다. 수민의 말투가 자신에게 너무 공격적이고 늘 얘기할 때마다 말대꾸해서 일하기가 너무 불편하다. 자신을 싫어하는 게 느껴지는데 이유를 알고 싶고, 자신이 싫다고 해도 시킨 일은 해야 하지 않겠냐는 것이 매일 같은 시각 반복해서 전송되는 메시지의 내용이었다. 그리고 끝에는 꼭 오늘 오후 한 시까지 본인이 물어본 질문에 대해 답변해달라, 답변이 늦어진다면 왜 늦어지는 지, 그래서 언제 대답을 할 건지를 알려달라는 추가 요청 사항이 있었다.


“수민님. 혹시 조형님에게 욕을 한 건 아니죠?”

“네 절대 아니에요! 한 일주일 전에 제가 복귀하고 나서 조형님이 그동안 팔로업 하던 업무를 저한테 주시길래 진행 사항이 어떻게 되는지 누구와 이야기하면 되는지 미팅을 한 번 잡아줄 수 있는지 정도를 물어봤는데, 갑자기 버럭 화를 내시고는 다음 날부터 이런 메시지를 보내시기 시작했어요.” 수민은 지난달 받은 건강 검진에서 신장에 이상 소견이 있어 급하게 수술을 받았고 지난주부터 막 업무에 복귀한 차였다.

정아는 조형이 옆자리에서 ‘아 수민님 언제 오지? 오면 이거 줘야 하는데. 꼭 와야 하는데.’라며 혼자 읊조리는 소리를 들었던 게 떠올랐다. 당시에 조형의 혼잣말을 들으며 ‘내가 입사하기 전에도 저렇겠지. 저렇게 일을 떠맡기고 싶은데 내가 빨리 입사를 안 해서 얼마나 애가 탔을까.’라고 정아는 생각했었다. 기다리고 고대하던 수민님이 복귀한 날 그는 그녀의 건강과 안위를 묻지도 않고 수민을 냅다 회의실로 끌고 갔다. 그리고 저렇게 업무를 던진 거다. 하기 싫은 업무를 그냥 털어버리고 싶었는데, 수민이 이것저것 물어보니 괜히 승질이 나서는 사람을 저렇게 들들 볶고 있다는 것을 정아는 간파했다.


“수민님 이건… 인사 팀장님한테 얘기해야할 것 같아요. 직장내 괴롭힘으로 보이는데 죄 없는 수민님이 왜 관둬요. 나갈 거면 조형님이 나가야지.” 정아의 말에 수민은 울음이 터트렸다.

“제가 잘못 한거 아니죠? 저는 제가 뭐 잘못했나… 싶어…서”

수민은 이후 인사 팀장과 면담을 마치고 조명오 대표와도 이야기를 나눴다. 후에 수민이 전해준 후일담에 따르면 조명오 대표는 수민의 이야기를 꽤나 심각하게 듣더니 ‘김조형 님 안 되겠네’ 라고 말했다고 한다. 인사 팀장은 정아에게 수민의 이야기가 진짜인지 김조형이 정말 그렇게 별로인지를 돌려서 물어봤고, 정아는 조형이 수민에게 보낸 메시지를 보았고, 그건 괴롭힘이라고 생각한다며 담백하게 자신의 의견을 전했다. 조형은 인사 팀장에게 또 조명오 대표에게 불려 나갔고 이런 면담들이 힘에 겨웠는지 시간이 갈수록 탱탱볼같이 땡땡했던 그의 얼굴은 조금 홀쭉해졌다. 정아는 말수가 아주 조금 줄어든 조형을 보며 혹시 그가 그만두는 건 아닐까 상상했다.


그리고 며칠 뒤.

“우리 머딜 컴퍼니도 B2B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고자 비즈니스 지원팀을 만들려고 합니다. 팀장은 김조형님입니다.” 조명오 대표는 전 사원을 불러 모아 놓고 이렇게 선언했다. 김조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청중들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아무도 무엇을 위한 B2B냐고 묻지 않았다. 그리고 오후 김조형은 책상 위 어지럽게 흩어진 물건들을 집어 던지듯 시끄럽게 박스에 넣었다. 그리고 물티슈 있는 사람 어디 없냐며  난리법석을 떨었다. 그가 자리를 뜨기 전까지 수민은 어색하게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었고, 정아는 그런 수민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퇴근 시간 무렵 조명오 대표는 정아를 불렀다.

“김조형님이 비즈니스 지원팀으로 발령이 나서 지금 제품 운영팀은 팀장이 없잖아요. 정아님이 ‘팀장 대리’로 있어 주면 좋겠어요.” 정아는 어리둥절했다. 팀장이면 팀장이지. 팀장 대리는 또 뭐람?

“팀장 대리는 팀장과 무엇이 다른가요?” 정아의 질문에 명오는 웃으며 말했다.

“팀장과 거의 같다고 보면 돼요. 거의 팀장! 회의 들어가고 의사 결정하는 건 제가 할거고 정아님은  팀장으로서 역할만 해주면 돼요.”

“제가 잘 이해가 안 가는데, 회의에 들어가지도 않고 의사 결정권도 없는데 어떤 역할을 하면 된다는 건가요?” 정아이 되묻자 명오는 역시 이럴 줄 알았다는 듯이 눈이 세모로 변한 채 차갑게 대답했다.

“정아님 팀장 되고 싶었던 거예요? 권력욕 같은 건가? 요즘 사람들은 다 선불로 받으려고 그러네. 저는 후불이에요. 올해 팀장 대리로 성과를 내면 제가 처우도 생각해 주고 직책도 주고 할 건데, 왜 기다리질 못해요? 또 욕심부리네. 입사 두 달밖에 안 됐는데 꽤 잘한다고는 들었어요. 그냥 그대로만 하면 돼요. 그게 팀장 대리야.” 정아는 명오의 대답에 기가 막혔다. 그냥 그대로만 하면 된다니 그러면 여태까지 나는 팀장 대리로 일해왔던 건가. 이 사람도 김조형과 다를 게 없었다. 더 이상 말을 섞기 싫었지만 정아는 마지막 기운을 짜내어 질문을 던졌다.

“방금 말씀하신 제안이요. 제가 거부할 수 있는 건가요?”

다음 날 업무용 메신저 전사 공지방에는 조형과 정아의 인사 발령 소식이 올라왔다.

‘김조형-비즈니스 지원팀 팀장’

‘허정아- 제품운영팀 팀장(대리)’

정아는 괄호 속’(대리)’라는 글자가 자신을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때 수민의 개인 메시지가 도착했다.

‘정아님… 이상한 직책만 맡게 되시고 죄송해요. 그래도 조형님이랑 더 이상 일하지 않아도 되니까 저는 좋아요. 제가 도울게요!’ 정아는 수민에게 괜찮다고 보내며 자신이 정말 괜찮은지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전혀 괜찮지 않았다.


석 달 차

팀장 대리로 한 달. 정아이 맡은 팀은 비단 팀장 김조형만 문제인 게 아니었다. 4년차 디자이너 전석재와 1년 차 디자이너 구윤아는 상대방이 자신을 무시했다면서 으르렁대며 회사 내 자기 측근들에게 상대방의 험담을 하고 다니고 있었다. 입사일부터 정아도 그런 기류를 파악하고 있었고, 그래서 팀장(대리)이 된 후로 둘이 겹치지 않게 일을 배분하는 중이었다. 하지만 연차가 얼마 안 된 두 디자이너의 산출물은 구멍이 많았고, 개발을 위해 작업을 리뷰할 때마다 개발자들은 그걸걸고 넘어졌다.


특히 석재는 회사 내 알아주는 일찐으로 그가 속한 무리는 한 시간이 멀다고 담배를 피우면서 오늘은 누구를 족칠지 작당 모의를 하는 불한당으로 유명했다. 그 무리의 머리는 안드로이드 개발 팀장 장현무였는데, 석재의 편을 들지 않고 윤아를 감싸는 듯한 정아에게도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아니, 구윤아 걔. 일도 못 하고 석재를 사수로 존중하지도 않고. 그런데 허정아는 왜 걔를 싸고도는 거야?” 현무가 담배를 뻐끔거리며 말했다.

“뭐 여자들 그런 거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회사에서 분 냄새 나면 안된다니까” 또 다른 그룹원이 말했다. 석재는 현무에게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가슴을 치면서 호소했다.

“제가 그래서 화가 치밀어요! 어우 씨. 구윤아 걔 진즉에 발을 못 붙이게 했야 했는데. 눈빛 봤어? 완전 날 무시해.” 얼굴이 붉어진 석재를 보며 현무는 마음이 저렸다. 내 동생이 저렇게 아파하다니. 담배를 연거푸 두 모금 들이마신 현무는 석재의 어깨를 두드리며 얘기했다.

“내가 허정아한테 얘기할 게 똑바로 단도리하라고.”

현무는 저벅저벅 정아의 자리로 걸어왔다. 정아는 정신없이 기획서와 디자인 파일을 맞춰보는 중이었다.

“정아님 저랑 얘기 좀 하시죠.” 현무의 둔탁한 음성에 정아는 뒤를 돌아봤고 화가 난 듯 귀가 빨개진 현무를 따라서 사무실 밖 빈 회의실로 나섰다. “네 현무님 무슨 일이죠?”

“석재와 구윤아 그대로 두실 겁니까?”

“저도 두 분 사이가 안 좋은 건 알고 있어서 일이 겹치지 않도록 분배하고 있어요. 무슨 문제가 있나요?”

“일이 겹치지 않도록 분배할 게 아니라 누가 누구 위에 있는지 팀장이 딱 정해줘야죠. 전석재가 구윤아 사수다! 이렇게. 지금 질서가 안 잡혀서 제품 운영팀이 엉망이고, 그래서 개발팀도 일이 안돼요.” 현무의 말에 정아는 말문이 막혔다. 이 사람이 지금 뭐라고 하는 거지?

“저도 제 방식대로 팀 운영 방식을 정리하는 중이에요. 현무님의 의견은 참고하겠습니다.”

“아니 지금 은연중에 구윤아 편을 드는 거잖아요. 석재만 맨날 피해 보고.”

“그런 거 아니에요. 지금 현무님이야말로 전석재님 편을 들고 계신 거 같은데요.”

“그건 전석재는 잘못이 없으니까. 저는 잘한 사람 편을 드 는거에요.” 현무는 정아를 잡아먹을 듯 노려보았다. 정아는 속으로 그동안 장현무한테 잘못한 것이 있었는지 기억을 곱씹어 보았다. 정아는 입사 3개월 중 현무와 사적인 대화도 한 적이 없었다. 그냥 일을 하는 데 필요한 사람이었을 뿐 정아는 그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었다.

“저 구윤아님, 전석재님 어떤 분한테도 편을 든적 없어요. 저는 그냥 일이 잘 흘러가게 팀을 운영하고 싶을 뿐이에요. 그런데 두 분의 관계가 팀 운영에 좋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저도 고민이 많아요.”

“일단 정아님 의견이 그러니 그런 줄 알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한 말 똑똑히 기억하세요.” 현무는 엄포를 놓으며 회의실을 나갔다.

자리로 돌아온 정아는 스타일은 중학교 시절 일찐 깡패 같았지만 현무의 말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했다. 한참을 고민하다 전석재와 구윤아 캘린더에 점심 식사 일정을 보냈다. ‘그래, 팀장(대리)이니까 팀원의 화합을 위해 노력은 해봐야지’하는 마음 때문이었다. 일정을 받은 구윤아는 메신저로 ‘갑자기 왜 이런 일정을 잡으셨나요? 저 석재님 불편해요!’라고 메시지를 보내왔다. 정아는 ‘제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요. 불편해도 참석해 주시면 좋겠어요.’라고 답했다. 이윽고 점심시간. 정아는 두 사람을 이끌고 주변 고가의 갈빗집으로 향했다. 점심 식사 갈비탕이 1인당 1만 8천 원씩이나 하는 곳이었다. 팀장 대리인 정아는 법인카드도 받지 못했지만, 둘 사이가 회복될 수 있다면 사비라도 지출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보고 먹고 싶은 것을 시키라며 권했다. 그리고 드디어 삼자대면이 시작됐다.

“저는 윤아님과 석재님이 잘지냈으면 좋겠어요. 친구처럼 아주 살가운 사이는 아니더라도 일적으로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는 정도의 관계는 되었으면 해요. 그게 안 된다면 저는 두 분을 분리할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갑자기 윤아의 눈시울에 새빨개졌다.

“저도! 노력으을…. 많이 흑흑 했는데! 석재님은 저한테 사과를 안해요. 사과를!” 똥씹은 듯한 표정의 석재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윤아에게 대꾸했다.

“뭘 노력했는데. 아니 제가 미안하다고 했어요 안 했어요. 그런데 윤아님이 저를 계속 무시한 거잖아요.”  윤아는 어깨를 들썩이면서 울기 시작했다.

“내 디자인 파일 막 만지고! 막 바꿔놓고! 왜 내 허락을 안 받아요 왜에 흐흐흑 엉엉엉!”

“아니 그게 허락을 받아야 하는 거에요? 회사 일인데, 급하면 후다닥 고칠 수도 있는거지. 어이없네 진짜” 대화가 고조되어 갈 무렵,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갈비탕 세개 가 나왔다. 테이블을 세팅하러 나왔던 주방 직원은 엉엉 오열하고 있는 윤아와 씨발을 반복하는 석재, 그 사이에서 얼이 빠진 정아를 번갈아 보며 황급히 음식을 놓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그럼 두 분 같이 일 못 하는 거죠? 그럼 한 분은 비즈니스 지원팀으로 가셔야 해요. 그 팀에 디자이너가 필요하다고 전달 받았어요. 제가 조형님이랑 상의해서 한 분을 정할 건데 이의 없죠?” 정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석재와 윤아의 눈빛이 달라졌다. 윤아는 오열 후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정아에게 물었다.

“흐흐흡 제가 흐흐흡 가야 하는 건 흡 아니죠? 흡흡”

“그건 저도 몰라요. 조형님과 상의를 해봐야 할 것 같아요.”

“저 헙 자함시 화흡-장실 흡 다녀올게요.” 윤아는 헐떡이는 숨을 진정시키기 위해 화장실로 향했고 테이블에는 석재와 정아만 남았다. 석재는 정아에게 넌지시 말했다.

“저는 윤아님이랑 일할 수 있어요. 그런데 윤아님이 절 너무 싫어해요. 제가 먼저 사과해 볼게요.” 비즈니스 지원팀으로 가야 한다는 말이 꽤 충격적이었는지 석재는 갑자기 꼬리를 내렸다.

“석재님이 그래 주시면 저는 너무 감사하죠. 그런데 괜찮겠어요?” 그때 화장실에 갔던 윤아가 돌아왔다.

“윤아님 그냥 우리 다시 잘해봐요. 제가 그동안 미안했어요.” 석재가 대뜸 사과를 건넸다. 한결 차분해진 윤아도 석재의 사과를 담담히 받아들였다.

“저도 미안해요. 석재님.. 저도 비즈니스 지원팀은 가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갈비탕은 포장해 갈게요.”  사무실로 돌아온 정아는 갈비탕에 5만 4천 원 쓰길 참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팀장으로서 이런 자리를 만든 자신이 자랑스러웠다. ‘그래 이렇게 치고박고 일하는거지. 서로 잘 얘기하면서 일하면 좋겠다. 나중에는 둘 다 이랬던 게 참 우스워질 거야.’ 문제가 일단락됐다는 사실에 정아는 다시 후련하게 일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러나 두 시간 뒤. 윤아와 석재는 또다시 정아를 불러냈다. 둘의 결론은 ‘이별’이었다. 윤아는 아무리 생각해도 석재와 같이 일하고 싶지 않다고 했고, 석재도 윤아와는 얼굴도 마주하고 싶지 않다고 했다. 정아는 갈비탕 5만 4천 원이 너무나 아까워졌다. 윤아가 포장한 갈비탕이라도 다시 가져가고 싶었다.


결국 윤아는 비즈니스 파트너 팀으로 이동하게 됐다. 조형이 사납고 무서운 석재와는 함께 일할 수 없다고 했기 때문이다. 지쳐버린 정아는 미련 없이 윤아의 발령을 요청했다. 윤아는 발령이 난 날 충격으로 오후 반차를 쓰고, 다음 날 아침 일찍 짐을 싸서 비즈니스 파트너 팀 자리로 이동했다. 수민은 가끔 윤아가 자기편을 들어주지 않은 정아의 험담을 회사에 하고 다닌다고 귀띔해주었다. 석재는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이라도 딴 듯 기세등등해졌고, 현무는 정아에게 좀 친절해졌다.


석 달 하고 며칠이 지난 날 정아는 머딜 컴퍼니에서의 시간을 끝내기로 결정했다. 이제 정아는 본인이 비정상인지 저들이 비정상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김조형도 조명오도 전석재, 구윤아, 장현무도 정아에게는 모두 지우개로 싹싹 지워버리고 싶은 인물들이었다. 이 모든 것이 다 꿈이었다면, 어서 이 악몽에서 깨어나 머딜 컴퍼니에 입사하기 전 그 순간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정아는 석 달 치 월급을 바칠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퇴사일, 정아는 조형에게서 메시지를 받았다.


‘정아님 퇴사하신다면서요? 어디로 가시는지 물어봐도 돼요? 연봉도 많이 올리는지 궁금한데… 마지막 날이니까 차 한잔하실래요? 제가 명함 이벤트로 당첨된 쿠폰이 있는데…’ 정아는 조용히 업무용 메신저의 삭제 버튼을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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