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멈추는 사색의 공간

집학사전-서재

by 이재준
"서재는 책을 쌓아두는 창고가 아니라 영혼이 대화하는 살롱이다. 거기서 우리는 과거의 현자들과 만나고, 미래의 자신과 조우한다."

-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바벨의 도서관』


서재와 책장은 다르다. 책장은 책을 보관하는 가구지만, 서재는 책과 대화하는 공간이다. 거실 벽면에 놓인 책장은 장식이 될 수 있지만, 서재의 책들은 살아 숨 쉰다. 언제든 꺼내 읽을 수 있고, 필요할 때 찾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책과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이 서재라는 공간이다.


어린 시절 아버지의 서재는 책의 종이 냄새, 벼루와 먹냄새가 섞인 독특한 향이 났다. 한쪽 벽 가득한 책장에는 빼곡히 책들이 꽂혀 있었고, 책상 위에는 항상 명심보감이 놓여 있었다. 아버지는 저녁 잠들기 전 홀로 책을 읽으셨다. 나에겐 아버지가 책을 읽어주신 기억이 없다. 어릴 적 내게 책은 다분히 고독한 존재였다.


내가 책을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 도서관 때문이었다. 수많은 책들 사이를 거닐며 원하는 책을 찾아내는 기쁨. 숨죽이듯 고요한 적막함. 속삭여야만 하는 대화 때문에 도서관은 늘 나만의 놀이터 같은 존재였다. 특히 세계의 다양한 잡지책을 볼 수 있었던 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이 황홀한 세계 여행 같은 것이었다.


나만의 서재에는 특별한 시간이 흐른다. 책을 읽다 보면 몇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간다. 시계를 보지 않고도 시간이 흐른다. 이 몰입의 경험이야말로 서재가 주는 가장 큰 선물이다. 세상의 소음으로부터 벗어나 오직 책과 나만 존재하는 시간. 이젠 음악실을 겸하기도 하지만, 라이너 노트가 있는 특별한 앨범도 한 권의 책과 같은 존재다.


책과의 만남은 우연이면서 필연이다. 책장을 둘러보다가 문득 한 권이 눈에 들어온다. 오래전에 샀지만 읽지 않았던 책, 여러 번 읽었지만 다시 읽고 싶은 책. 그 책을 꺼내 드는 순간, 나는 이미 그 책의 세계로 들어가고 있다. 한 권의 책은 다른 책을 부른다. 이러한 아날로그식 읽기의 여정은 오직 서재에서만 가능하다.


서재의 책들은 시간의 층위를 보여준다. 대학때 읽었던 인문서와 전공서, 직장 시절 보던 자기 계발서, 아이가 태어난 후 육아와 교육에 관련된 책들. 책장은 그렇게 내 인생의 궤적을 담고 있다. 건축, 예술, 도시, 철학, 사회로 구분되다가 새책을 사는 횟수가 줄어들면서 자연스레 여러 번 읽을 책을 '별칸'으로 모아두기 시작했다.


나를 위한 서재에는 의식같은 것이 있어 문을 열고 들어가면서 마음의 전환이 일어난다. 일상의 모드에서 사색의 모드같은 특별한 세계로 가는 순간과 책장 앞에 서서 오늘은 어떤 책을 읽을까 고민하는 시간. 책을 꺼내고, 자리에 앉고, 책을 펼치는 일련의 과정이 하나의 소소한 일상적 의식이다.


가끔 서재에서 그냥 앉아 있기도 한다. 책을 읽지 않고 그저 책들에 둘러싸여 있는 것만으로도 평온해진다. 책들은 말없이 나를 지켜보고, 나는 그 시선 속에서 위안을 얻는다. 그러다 어느덧 읽히는 책의 제목을 꺼내 보면서 밑줄 친, 접혀진 페이지들 안에서 불현듯 옛날 기억을 되찾는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서재를 만들고자 할 때는, 그곳이 '책을 보여주는 공간인지, 읽고 싶은 공간인지를'생각 해 보라고 한다. 서재는 단순히 책을 보관하는 곳이 아니다. 서재는 정신이 거주하는 집이고, 사유가 숨 쉬는 공간이며, 영혼이 성장하는 토양이다. 그곳에서 늘 나는 책과 함께, 나 자신과 함께 자유롭고 풍요롭다.


tempImagevpuUt6.heic 책은 빛이 닿으면 안 되는 사물이다. 서재에는 다양한 의자가 놓여 있는 것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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