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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미 Feb 08. 2023

수수한 존재에 대한 예찬

나의 취향과 삶의 방향을 닮아서


얼마 전, 넷플릭스에서 일본 드라마를 보고 여주인공에게 반했다. 옷집 앞을 지나다 그녀가 드라마에서 입고 나온 코발트블루 카디건과 비슷한 색감의 옷을 발견했다. 충동적으로 옷을 데려온 지 한 달이 훌쩍 지났지만 아직 옷장 밖을 한 번도 벗어나지 못했다. 햇살이 좋은 날 입어야지, 반가운 이를 만날 때 입어야지, 기분이 꿀꿀한 날 입어야지 했지만 매일 나의 손길을 요리조리 피해 갔다. 아침마다 자석에 이끌리듯 내 몸에 딱 붙는 옷가지들은 검은색이나 무채색의 상, 하의들이다. 지금도 새 니트는 옷장 속 미운 오리 새끼처럼 혼자만 쨍한 파란빛을 발산하고 있다. 잠깐이나마 환한 빛에 매혹당하지만 나는 어쩔 수 없는 사람인가 보다. 화사함보다는 수수함이 몸에도, 마음에도 알맞다고 생각하는 그런 재미없는 사람 말이다.


‘수수하다’는 오래전부터 내가 좋아하는 형용사다. ‘수수하다’를 사람의 옷차림이나 물건의 겉모양에 쓴다면 ‘그리 좋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고 제격에 어울리는 품이 어지간하다.’란 뜻이다. 또 다른 의미로는 ‘사람의 성질이 꾸밈이나 거짓이 없고 까다롭지 않아 수월하고 무던하다’도 있다. 어느 공간, 어떤 시간에 만나도 어지간하고, 수월하고, 무던해서 편안한 사람! 소박해서 눈에 띄지 않고, 굳이 허세를 부려 나를 내세우려 애쓰지 않는 존재! 내가 소속된 작은 사회에서, 나를 알거나 모르는 타인들 앞에서 마지막까지 기억되고 싶은 나의 이미지가 아닐까.


언젠가 포털사이트 질문 창에서 “‘수수하다’란 말을 들었는데 긍정과 부정의 의미 중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하나요?”라고 묻는 글을 보았다. 어떤 답글이 달렸는지 기억나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단어가 누군가에겐 부정적으로 다가갈 수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러워 재밌다고 생각했다.

  

요즘 나에게 어떻게 살고 있느냐고 누군가 묻는다면, 참으로 ‘수수한 시간들’을 살아내고 있다고 답하려 한다. 그리 기쁜 일도 없고, 별다르게 큰 고행도 없이 적당한 파도 위에 올라 균형을 잡고 일상의 바다 위에 가볍게 서 있으려 한다. 마흔 중반, 주위에서 능력을 짜내 더 큰일을 도모해 보면 어떠냐는 제안도 있고, 왜 성공이나 성취를 추구하지 않느냐는 핀잔 아닌 핀잔도 받는다.


글쎄. 남들이 보기엔 심심해 보이는 하루를 살아내는 이유는 ‘수수하다’는 단어를 좋아하는 것과 같은 맥락이 아닐까. 가끔 화려한 이력을 가진 주위 사람들이 환하게 빛나보일 때도 있지만 나는 안다. 끝내 그 이력이 내 것이 된다 해도 옷장 속에서 선택받지 못하는 파란 니트처럼, 결국 나만의 삶의 취향과 목적이라는 큰 방향에서 본다면 필요 없는 사치품이 될 뿐이다.


오랜 시간 주위의 이야기를 채집해 온 방송작가로서 내가 끌리는 이야기도 언제나 수수한 그 무엇이었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쓸 때도 누구나 칭송하는 유명인이나 위대한 업적을 가진 위인들보다 골목길에 가만히 앉아있으면 쉬이 만날 수 있는 소박한 이웃들을 주인공으로 할 때가 좋았다. 라디오 프로그램을 만들 때도 시시콜콜한 수다 속에서 ‘그래, 이런 게 인생이지!’란 속엣말을 청취자들이 떠올린다면 더없이 좋겠다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에세이를 출간하고 나서는 독자들이 “내 얘긴 줄 알았어요.”, “제 과거가 떠올랐어요.” 같이 내 경험과 감정이 독자의 그것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것이란 반응을 들을 때 뿌듯함을 느꼈다. 그래서 지금도 글을 쓸 때, 문장을 수려하게 쓰고 싶다는 욕심보다 간결하고 담백하게 쓰면서 쉽게 읽히는 글을 쓰고 싶다는 욕망이 더 앞선다.


나란 사람은 수수한 문장을 좋아하고, 수수한 시간을 편안하게 여기며, 수수한 이미지를 갖고 싶은 인물이다. 그러니 세상에 아무리 화려한 것들이 넘쳐나도, 수수한 세계관을 가진 나의 글망에 걸리는 이야기들은 누구나 어지간하면 한 번쯤 들어봤을 사연들, 기승전결의 폭은 적어도 진솔한 서사들이다.


수수한 존재들은 모자라지 않으니 스스로 움츠러들지 않고, 주변보다 넘쳐흘러 시선을 어지럽히는 일도 없다. 하루를 무던하게 살아내다 한 번쯤 고개를 돌려 지긋이 바라보게 하는 풍경과 이웃들이 있다. 이제 그 수수함의 결정체들을 발견해 매주 수요일마다 이곳 이야기함에 하나, 둘 담아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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