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을 '관찰'하기
내가 방송작가 일을 시작한 때는 스물셋 늦가을이었다.
아직 대학 4학년으로 방송아카데미를 다니고 있는 상태였지만, 마음이 다급했던 기억이 난다. 방송작가가 되겠다며 혼자 준비할 때는 몰랐지만 아카데미라는 곳에 입성하고 보니, 나보다 재능과 능력이 넘치는 예비 글쟁이들이 도처에 숨어 있었다.
문득 이들이 다 같이 아카데미를 졸업하는 그 날이 오면, 나에게 돌아올 기회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무식하면 용감하다는 말처럼, 무작정 저지르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음먹은 바를 행동으로 옮겼다. 아마도 열 곳이 넘는 방송국에 나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방송 프로그램 관련 포트폴리오를 보냈던 것 같다. 그리고 기적처럼 단 한 곳, 그렇게 원하던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연락이 왔다.
재미있는 것은 방송일의 첫 시작을 방송작가가 아닌, 리포터로 열게 됐다는 것이다. 아침 정보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부산 아가씨의 잡동사니’ 쯤으로 기억되는 한 코너를 맡게 되었다. 생활정보들을 모아 원고를 직접 작성하고, 걸쭉한 부산 사투리를 과장되게 쓰면서 마이크 앞에 앉았던 것이 내 방송 인생의 출발이었다.
그 이후로 20여 년이 흘렀고, 이제는 대학에서 수업을 함께 하는 제자들이, 또는 다양한 특강에서 만난 방송작가 지망생들이 나에게 털어놓는 진로 고민들을 들어줘야 하는 나이가 되었다. 그들의 진지하고, 깊이 있는 고민을 들을 때면 ‘내가 과연 이런 얘기를 들어줄 자격이 있을까?’, ‘이들에게 내가 전하는 말이 과연 도움이 될까?’ 등등 여러 생각들이 앞서서 대답하기를 주저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공간을 빌려 방송의 여러 장르에서 글쓰기를 하며 실패도 하고 시청자들의 귀중한 공감도 얻었던 나만의 경험들을 풀어놓으려 한다. 서툴고 부족했지만 열정이 넘쳤던 지난날 나의 이야기들이 방송작가를 꿈꾸거나 방송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궁금한 이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길 바라면서 말이다.
강의실에서 만난 후배나 제자들이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는 방송작가로서 자질에 관한 것이다. 즉, 방송작가가 되기 위해 평소 어떤 능력을 갈고닦아야 하느냐에 대한 물음이다. 짐작하겠지만, 방송 글쓰기 역시 많이 보고, 많이 읽고, 많이 써야만 실력을 꾸준히 키울 수 있다. 그리고 또 하나, 나만의 조언을 덧붙이자면 ‘일상의 관찰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다.
관찰의 의미는 ‘사물의 현상이나 동태 따위를 주의하여 잘 살펴보는 것’이다. 다시 말해, 눈에 보이는 것을 그냥 바라보는 데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각별히, 관심을 가지고, 주의 깊게 살펴보는 행위를 일컫는다. 특정 대상을 그저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관찰하며 보았을 때 우리는 그 안에 숨겨진 의미를 ‘발견’할 수 있고, 그것으로부터 ‘이해’와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
예를 들어, 평소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나는 지하철에서 사람들의 신발을 관찰하는 버릇이 있다. 이것은 라디오 작가를 처음 시작하던 시절부터 생긴 버릇인데, 신발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신발이야말로 그 사람만이 가진 특성을 잘 보여주는 매개체라는 생각 때문이다. 매일 다른 옷으로 갈아입는 사람은 많지만, 일주일 내내 다른 신발을 신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리고 발이 불편해 느끼는 스트레스는 생각보다 크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신이 평소에 즐겨 신는 신발을 무의식 중에 자주 찾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는 신발을 보고 그 사람의 하루를, 그리고 인생을 그려보는 즐거운 상상놀이를 하곤 한다.
단정한 정장 차림의 중년 부인이 하이힐이지만 걷기 편한 형태의 구두를 신었다면, 보험설계사로서 그녀가 오늘 하루 만날 사람들과의 대화를 상상해 볼 수 있다. 70대가 훌쩍 넘은 어르신이 옷차림과 어울리진 않지만 새 것으로 보이는 나이키 운동화를 신은 모습에서는, 지난 가족모임에서 자녀들이 사 온 운동화를 소중히 아꼈다가 친구들과의 모임에 신고 나온 아버지의 마음을 엿본다.
신발을 관찰하면서 나는 신발 속에 담긴 각자의 사연을 떠올리고 신발의 주인들이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며 쌓아온 인생의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그들의 일상 역시 소중한 내 가족, 내 친구의 삶과 다르지 않음을 깨닫는다. 시청자이기도 한 신발 주인들을 이해하는 마음으로, 또는 그들이 공감해주기를 바라며 신발에 관한 방송 소재를 찾고, 마지막까지 방송 원고를 수정한다면 조금 더 공감이 가고 위로가 되는 글을 쓸 수 있지 않을까?
훗날 기회가 된다면, 상대적으로 교육의 기회가 적은 지역의 방송직 지망생들을 위해 선배들이 돌아가며 품앗이 교육을 하는 조그마한 공동체를 만들고 싶다. 그리고 그 공동체 속 수업 과정에 ‘일상을 관찰하기’ 혹은 ‘제대로 보기'와 같은 시간을 꼭 넣는 것이 나의 바람이다.
주위를 둘러보면, 사소하고 평범해서 그동안 ‘주목받지 못한 것들’이 우리의 애정 어린 시선을 기다리며, 자신이 지닌 이야기의 가치를 이제는 알아봐 달라고 메시지를 보내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니 당신이 방송작가가 되고 싶다면, 또는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는 글을 쓰고 싶다면 주저 말고 오늘부터라도 당신만의 시선으로 일상을 관찰해 보기를 진심으로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