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mething New’를 제안하자!
“방송작가는 어떻게 뽑나요?”
이런 질문을 받을 때면 참 곤란하다. 내가 방송작가 지망생이던 20년 전만 해도 방송국이 주관하는 공개채용이 심심찮게 있었다. 방송작가라는 직업을 아는 사람들의 수가 많지 않은 반면, 작가를 필요로 하는 프로그램의 수는 점점 많아지던 때였다. PD나 기자, 카메라 감독, 아나운서 등 다른 직종은 이른바 ‘언론고시’를 치른다. 그렇다면 방송작가 공채는 어떤 시험 과정을 거쳐야 했을까?
방송작가는 크게 드라마작가와 비드라마작가로 나눌 수 있다. 드라마작가는 예전에 비해 그 기회가 많이 줄긴 했지만, 각 방송국에서 단막극이나 미니시리즈 공모전을 통해 작가를 발굴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는 순수하게 자신이 써놓은 극본, 즉 작품으로 승부수를 띄워야 한다.
그럼, 비드라마작가인 구성작가는 어떨까?
내가 난생처음 구성작가 공채 시험을 본 곳은 부산 KBS였다. 1차 서류전형에서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그리고 KBS 프로그램 중 한편의 모니터를 요구했다. 당시 대학 3학년에 재학 중이었지만, 경험이라도 해보자는 생각으로 지원을 했고 운이 좋게 1차 서류전형을 통과했다.
그렇게 KBS 공개홀로 필기시험 및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면접은 알겠는데, 필기시험이라니!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아 방청객 아르바이트를 가서 안면을 익힌 작가 언니에게 연락을 했다. 아마도 프로그램 기획이나 구성을 해보라고 하지 않겠냐며 귀띔을 해 주었다.
그리고 드디어 찾아온 면접 당일. 1차 서류전형 과정을 거쳤는데도, 수십 명의 지원자들이 KBS홀에 모여 있었다. 서로 눈치를 보며 이리저리 다른 지원자들의 면면을 살피던 그때, PD로 보이는 한 사람이 들어오더니 칠판에 큰 글씨로 “사과”라는 단어를 썼다.
그리고 백지를 두 장씩 나눠주었다. “어떤 형식의 글이라도 좋으니, 사과를 주제로 글을 써주십시오. 시간은 30분 드리겠습니다. 필기시험 후 바로 면접을 시작하겠습니다.”
‘사과, 30분, 곧바로 면접....’ 정신이 아득해졌다. 부산 KBS 프로그램 중 한 편을 기획하거나 구성해보라는 요청이 있을 줄 알고 모든 프로그램의 기획의도를 숙지하고, 방송들을 모니터 했는데 보기좋게 예상이 빗나갔다. 너무 간단하고, 그래서 너무 폭넓은 주제와 필기시험 방식에 적잖이 놀랐지만, 그렇게 멍하니 있기엔 30분이라는 시간이 짧았다.
곧바로 브레인스토밍을 시작했다. 사과하면 떠오르는 단어들을 두서없이 쓰기 시작했다. 백설공주, 뉴턴, 세잔, 명절을 앞두고 치솟는 과일값, 그리고 시골의 사과농장 등등.
정말 단편적인 지식과 기억의 찰나들이 지나갔다. 그 많은 글감들 중 무엇을 선택해 썼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시골 할아버지 댁에 놀러 가 옆 과수원의 사과를 몰래 따먹었던 기억을 라디오 오프닝 형태의 글로 썼던 것도 같고, 경제학 전공을 살려 치솟는 과일 값에도 수익이 농민에게 돌아가지 않는 유통구조를 비판하는 시사프로그램 기획안을 썼던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두 글의 방향을 두고 한참을 고민하다 십여 분을 남겨두고 허겁지겁 글을 쓰기 시작했던 기억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그 결과는 당연히 불합격이었다.
20여 년이 흐른 지금, 방송사에서 여러 명의 구성작가를 뽑는 공채 시험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젠 구성작가가 되려면 특채라는 형식의 바늘구멍을 통과해야 한다. 많은 작가 지망생들이 오늘도 미디어 관련 취업사이트나 애플리케이션을 '즐겨찾기' 해놓고 매일매일 구직공고를 체크하고 있다. 그러다 보면, 가뭄의 단비처럼 채용 소식이 뜬다. 그도 아니면 특정 학과나 방송 아카데미, 지인을 통해 알음알음으로 채용되는 경우가 있다.
그런데 채용 방식이 공채이든, 특채이든 지원자에게 요구하는 바는 거의 비슷하다. 요즘은 각 프로그램별로 작가를 채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땐 보통 자기소개서와 이력서, 그리고 해당 방송의 모니터나 한 회 구성안을 제출하라고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이 모니터와 구성안이다. 먼저 구성작가가 필수로 준비해야 하는 방송 모니터에서는 해당 프로그램을 칭찬만 해서도, 그렇다고 단점만을 열거해서도 안 된다. 그럼, 장점과 단점을 반반씩 잘 섞으면 안 되냐고? 그것도 안 된다. 채용 담당자들이 원하는 모니터란, 이 프로그램의 기획의도와 구성의 특징을 방송 제작진의 시선으로 파악하고 있으며, 현재 처한 어려움을 짚어주면서도 앞으로 개선 방향까지 고민하고 있는 신선한 글이다.
어려운가? 그렇다. 원래 기존의 제작진들은 자신이 갖지 못한 것을 새로 유입되는 동료 혹은 후배가 채워주길 기대한다. 그래서 구성작가를 꿈꾸는 사람들이 그리 많은데도 방송 현장에선 늘 인재가 없다고 불평하고 있다.
기획안이나 구성안 쓰기에서는 더 대단한 능력이 필요하다. 그 프로그램이 그동안 방영한 방송 목록을 모두 체크하여 아직까지 방송하지 않은 아이템이면서, 기존의 큰 구성 틀을 벗어나지 않지만, 참신함이 느껴지는 기획안과 구성안. 한마디로 “SOMETHING NEW"를 원하는 것이다. 여기에 내일 당장 우리 팀에 합류해도 바로 일을 진행할 수 있겠다는 신뢰까지 줘야 한다.
이게 가능하냐고? 물론 어렵다. 하지만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다. 일단, 모니터의 경우 이 방송을 구성하는 요소들을 구분하여 요소별 장단점을 꼽아본다. 예를 들어, 방송의 주제와 소재, MC 및 출연자의 역할, 세트의 배치, 자막이나 CG의 활용 등등을 꼼꼼히 분석한다. 특히 만약에 내가 작가라면 어떻게 개선하고 싶은지 조목조목 서술한다.
그리고 기획안 및 구성안은 프로그램의 특성을 살리는 큰 뼈대 아래서 그동안 다루지 않은 주제, 그렇지만 시의적이고 시청자들에게 공감을 줄만한 주제를 정한다. 혹여 이미 방송된 주제를 다루더라도 시각은 같지 않아야 한다. 예를 들어, ‘고향’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든다면 어머니, 아버지가 한결같은 모습으로 기다리고 있는 시골 고향집의 모습이 아니라, 고향을 떠나 제2의 고향이 된 서울에서 치열하게 살고 있는 2,30대들의 일상에서 고향의 의미를 되묻는 다큐멘터리를 기획해보는 것이다. 그리고 자신이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가장 잘 살릴 수 있는 출연자나 인터뷰 대상자, 촬영지 등이 무엇인지 고민하여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렇게 어렵게 쓴 모니터와 구성안이 서류전형에 통과하고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을 받았다면 마냥 기뻐하고 있어선 안 된다. 짓궂은 제작진들은 면접 당일, 자신의 앞에서 글을 써보라는 서바이벌 오디션 같은 미션을 던질지도 모르니 말이다.
오늘, 구성작가 지망생들이 다시 나에게 묻는다.
“드라마작가는 공모전이라도 있던데, 구성작가는 어떻게 방송에 입문할 수 있나요?”
그럼 난 이렇게 대답한다.
“그때그때 달라요! 하지만 확실한 건, 미리 준비를 하고 있던 사람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어요. 그러니 평소에 어떤 프로그램이든 꼼꼼하게 모니터 한다는 마음으로 시청하고, ‘내가 만약 저 프로를 제작한다면’이라는 시각으로 구성 연습을 하세요.”
선배의 노파심에, 고단하고 지루한 이 과정을 힘들지만 ‘재미’ 있게 느끼고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만이 방송가로 향하길 바란다는 말도 덧붙인다. 그 즐거움을 모른다면, 채용되더라도 냉혹한 정글에서 곧 자신의 정체성을 잃고 방황하고 말 테니까. 하지만 그 고비를 지혜롭게 넘긴 자라면, 지망생 시절 수첩에 적어둔 아이디어들이 TV나 라디오에서 생생히 흘러나오는 기쁨과 보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