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광고의 시대를 표류하는 방송작가
"우리가 뭐, 대단한 일 하는 건 아니잖아.
24시간 광고만 틀 순 없으니까 광고 사이에 넣을 '방송'이라는 걸 만드는 거지.
방송 사이에 광고가 있는 게 아니라, 광고 사이에 방송이 있는 거야."
서브 작가 시절, 내부 일정 때문에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았을 아이템을 떠맡아 급하게 VCR 한 편을 제작해 내보낸 뒤, 동료들에게 자조적으로 한 말이었다.
생각해 보면 그 '자조'는 시사 교양 프로그램을 만드는 젊은 방송작가의 자존심에서 나왔던 것 같다. 내심 내가 '대단한 일'을 한다고 생각했고 일정을 펑크낸 미운 동료 때문에 하찮은 VCR을 만들었다는 게 속상해서 던진 농담이었다. 그때는 정말 '나 뭐 돼'의 마음으로 살았다.
그런데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나지 않아, 그 말은 농담이 아니게 됐다.
케이블 채널은 말할 것도 없고 지상파 채널에서조차 광고-진짜방송- 광고-방송을 과장한 광고... 다시 광고로 이어져 사실상 유사 홈쇼핑 채널로 변해갔다.
내가 처음 제작해 본 협찬 방송은 선거관리위원회의 투표 독려 VCR이었다.
15년 전쯤이었던 것 같다. 그 당시에도 안테나로 전파를 수신해 방송을 보는 사람이 얼마나 되겠냐마는 그래도 '전파는 공공의 자산이다', '허접한 방송으로 전파 낭비하지 마라' 정도의 관용구는 여전히 통하던 시절이어서 지상파 채널의 공익성을 지키는 것이 중요했고, 협찬도 정부, 지자체, 공공기관 등으로부터 받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협찬 건수도 많지 않아 내가 서브 작가 때는 협찬 방송을 제작해 본 경험이 한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후 한창 협찬 광고 시장이 커지던 때는 시사 프로그램에서 일하고 있어서 업계의 동향에 어두웠다. 다만 흡연구역에서 다른 프로그램을 제작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 최근 아침 매거진 프로그램은 협찬 없이는 방송이 나가지 않는다거나, '모 방송국은 기업 협찬을 옥석 가리지 않고 받아 엄청난 흑자를 기록했다'라는 소식을 전해 듣긴 했었다.
아침 매거진 프로그램으로 돈을 벌 수 있다니. 본래 그 시간대는 광고도 거의 들어오지 않아서 프라임 시간대를 구매한 광고주에게 끼워주는 서비스 광고가 주로 나왔었는데 말이다.
고지식했던 나는 '아니, 공공의 전파를 이용해서 방송인 척 광고를 해도 돼?'라고 생각했지만, 종편과 케이블, 거기에 온라인 시장까지 가세하면서 당시 광고 매출이 점점 하락하던 방송국은 협찬과 간접광고 팔이에 사활을 걸고 있었다.
2018년 전후였나. 건강기능식품 열풍이 불면서 관련 협찬(*내가 계약하는 게 아니라서, 협찬인지 간접광고인지 확실치 않다. 그냥 하는 익숙한 용어로 '협찬'이라고 부르겠다) 프로그램이 우후죽순 생겨났다.
지상파 채널은 처음에는 생활정보 프로그램에 5~8분 정도의 VCR을 통해 제품은 노출하지 않는 방식으로 협찬을 진행했다. 예를 들면 혈관 건강 관리를 위해 등푸른 생선을 주로 먹는 주부 사례자가 등장하고, 이어서 의사 등 전문가가 '등푸른 생선에 있는 오메가3가 혈관을 건강하게 한다.'라며 특정 성분을 강조하는 인터뷰를 하는 식이었다. 물론 같은 시간대에 진짜 홈쇼핑 채널에선 오메가3 건강기능식품을 판매하고 있다.
그러나 케이블 채널은 러닝타임이 무려 50분에 제품을 섭취 장면도 그대로 노출하는 터라, 지상파의 이런 은근한 협찬 방송은 경쟁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결국 지상파도 제품을 노출하기 시작했다. 분량도 늘었다. 새 프로그램을 만들거나 생활 정보나 연예인 신변잡기를 다루던 프로그램을 타이틀만 두고 협찬 전문 방송으로 고쳐 쓰기도 했다. 건강기능식품뿐 아니라 최근에는 병원 협찬도 흔해졌다. 형편이 어려운 노인에게 허리나 무릎 수술을 시켜주는 식이다. (의료의 방송 광고는 불법이라 들었는데, 이런 협찬은 어떤 메커니즘으로 가능한지 나도 궁금하다.)
이러한 환경 변화에 대해 방송계 종사자들은 저마다 입장도 다르고 다양한 의견이 있을 것이다. 일단 누적된 적자에 고심하던 방송국은 당연히 반기겠지. 지금도 더 많은 규제 완화를 외치고 있으니 말이다. 또한 도무지 물가 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하는 제작비에 허덕이던 외주 제작사 대표들도 협찬 영업을 뛰는 지금이 더 낫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일개 방송작가에 불과한 나로선 잃은 게 너무 많다.
우선 방송의 다양성이 사라졌다. 그렇지 않아도 쇼 예능 프로그램에 밀려 시사 교양 프로그램의 입지는 좁아지고 있는데, 줄어든 일자리를 채운 건 교양 프로그램의 외피를 쓴 광고였다. 나도 문제지만 후배들은 어떻게 커리어 설계를 할지, 궁금해지곤 했다.
나도 이러한 협찬 방송을 제작한 적이 있다. 광고주나 대행사가 주는 시나리오에 맞춰서 사례자를 섭외하고 논리를 정리하는 것이 작가의 일이었다. 촉박한 일정 때문에 맘에 차지 않는 아이템을 맡은 것만으로도 자존심이 상해 불평을 쏟아내던 '창작자 자아'는 이런 협찬 방송에서 설 자리가 없다.
무엇보다 협찬사가 돈 주고 의뢰했을 것이 분명한 특정 성분의 효능 논문을 인용하며 방송이라는 공신력을 더해 약을 팔아주는 것이 과연 옳은 일인가,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 없었다.
대체 이 방송의 효능은 뭐란 말인가.
일부 방송국은 프로그램 제작비를 외주사에 일절 지급하지 않고 도리어 협찬 방송을 틀 때마다 송출료를 받으며 돈을 벌고 있었다. 심지어 송출료가 비율이 아닌, 정액이라, 협찬 금액이 1억이든 1천만 원이든 방송국이 똑같은 돈을 챙기는 바람에 외주사는 도리어 적자를 보는 상황도 생겼다고 했다.
야바위도 돈을 놓고 돈을 먹는다는데, 방송국은 돈 안 쓰고 돈 버는 법을 찾아냈다.
경쟁 우위, 효율, 이윤의 극대화... 이건 우리 사회의 미덕이라 할만하다.
그러니 상업 광고에 점령당한 TV는 그 자체로 자본주의에 잘 적응했음을 보여주는, 이 시대의 [선]인지도 모르겠다.
나의 문제의식은 그저 도태된 자의 불평일까.
하지만 정말, 이대로 사유하지 않고 그저 흘러가도 괜찮은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