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고 아름다운 여성 노동자의 시간

여성 기상 캐스터와 남성 기상 전문가의 간극

by MEI
연령주의 사회일수록 나이 듦과 늙음은 동의어로 간주된다. 그러나 나이 듦과 늙음의 상관성은 성별에 따라 다르다. 남성에게는 나이 듦이 곧 늙음을 의미하지 않지만, 여성에게 나이 듦과 늙음은 같은 말이다. 대개 중산층 이상의 남성들은 나이가 들수록 권력과 자원에 접근할 가능성이 높지만 여성은 그 반대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2005


오래전 일이다. 전후 상황이 희미해서 어쩌면 의도치 않은 기억 조작은 아닐지 의심스럽지만 또 그러기엔 너무 생생하기도 하다.

때는 늦은 밤이었고 장소는 상수, 유명한 로스터리 카페 인근의 좁은 도로였다. 회식을 마치고 각자 차를 돌리거나 대리운전 기사를 기다리느라 어수선한 때, 우리 팀에서 관리자 한 사람이, 프로그램의 내레이션을 맡고 있던 연예인 A의 매니저를 한쪽으로 불렀다. 관리자는 매니저에게 'A가 피부관리를 받는지' 묻더니, 관리 좀 할 필요가 있다며 은근한 압력을 넣었다.


연예인 A는 중년의 여성이었다.


사실 그날 처음 나온 말은 아니었다. 사무실에선 'A가 나이가 너무 많아 보인다' '관리를 하지 않는 것이 문제' 라는 말이 이미 여러 번 나왔고, 윗선(?)에서 나이 든 여자가 나오는 걸 싫어한다는 소문도 돌았다. A의 더빙은 발음도 정확했고 감정선도 풍부해, 그 능력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었는데, 관리자(지들도 늙을 대로 늙은 주제에...)들은 프로그램에서 3분도 채 나오지 않는 A의 외모를 더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프로그램에서 A의 목소리는 사라졌다.

비슷한 시기에 함께 일하던 남성 연예인은 이제 그때의 A보다 나이가 많아졌지만 여전히 그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다.


방송국에서 여성 노동자의 시간은 너무 빨리 흐른다.


얼마 전, MBC가 여성 기상캐스터를 전원 계약 해지하고 '남성' 기상 '전문가'를 정규직으로 채용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무슨 '해경 해체'도 아니고 문제 있다면 고치는 게 아니라 털어버리면 그만, 식으로 대응하다니. 말했듯 방송국은 너무도 견고한 계급주의 사회라 중심 외 변방은 동료는커녕 사람으로도 대접받지 못한다.

게다가 이러한 개편에는 방송사의 성차별의 문제도 드러난다. 물론 그 자리에 남성이 아닌 여성 정규직이 채용됐을 수도 있다. 일부러 남성을 채용한 것은 설마 아니겠지만, 문제는 그다음이다. 이번에 새롭게 채용된 기상 '전문가'를 소개하며 MBC가 배포한 보도자료에는 그의 학력과 기후 관련 전문성이 얼마나 대단한지 가득했다. 뉴스의 '꽃'들에겐 주어지지 않았던 상찬이었다.


역겹고 치욕스럽다.


여성 기상캐스터,

성 상품화 논란이 없었던 건 아니지만, 어떤 여성 청년에겐 소중한 일자리고 또 장래의 꿈이었다. 나는 물론 페미니스트이지만 여성의 치마 길이나 원단 종류에 여성 인권이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깡마른 기상캐스터들이 0 사이즈의 원피스조차 허리춤에 옷핀 여러 개를 꽂아 팽팽히 당겨 입고 블루스크린 앞에 서는 모습을 보면서도 그들의 옷차림에 대해 말하기는 망설였다. 스포츠 채널에서는 편안한 소파에 앉은 남성들은 가랑이를 편히 열어두고 불룩한 배를 가릴 쿠션을 끌어안고 있는데 한 뼘 스커트를 입은 여성 진행자에겐 쿠션 하나가 주어지지 않는 걸 보면서도, 그 상황을 지적하면 행여나 당사자가 도리어 모욕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런 옷이 그의 취향이 될 수 있다고 애써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런 옷이 개인의 취향이든 아니든, 카메라 안에 잡혔다는 건 제작진의 의도가 담겨있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어쩌면 나도 그 방송국 놈들 중 하나라서 모르는 척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번 사건으로 확실히, 외면할 수 없이 알게 됐다.


고아한 방송국 엘리트들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의 시간을 상품으로 팔고 있었다는 것을.


방송국은 그럴듯한 전문직인 양 포장해서 꿈 많은 청년 여성들을 불러 모은 다음, 그들에게 꽃다운 옷을 입혀 아름다움을 팔았다. 그런데 아무리 치열한 경쟁을 뚫고 카메라 앞에 서도, 여성 기상캐스터는 비정규직이다. 방송국은 그들의 청춘이 끝나기도 전에 유행 지난 상품을 매대에서 밀어내듯, 손쉽게 정리했다. MBC가 여성 기상 캐스터를 채용한 지가 30여 년 된다는데 경력 30년의 현직 여성 기상 캐스터를 우리는 알지 못한다.


여성들이 종사하는 직업은 대개 성애화되어 있거나 업무와 관련 없는 부분에서도 성적 서비스를 강요받는다. 이처럼 성별화된 노동 시장 구조에서 여성이 상사나 고위직이 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노동 시장에서 여성을 통제하는 남성의 권력은 결국 연장자, 상급자에 대한 '예우'로 인식되고 고착화된다. 성차별이 연령 위계로 합리화되는 것이다.

- 정희진, [페미니즘의 도전], 2005

비단 기상 캐스터 직군만의 문제가 아니다. 카메라 앞에 서거나, 뒤에 서 있는 방송국의 수많은 여성 노동자가 자신이 맡은 업무 외에 일종의 성적 서비스, 여성이라는 성에 기반한 또 다른 역할을 요구받는다.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은 나는 지난번 해고를 당할 때 팀장으로부터 "어머니와 같은 역할을 해 주길 바랐는데 기대에 못 미쳤다."라는 말을 듣기도 했으니. 하하.


물론 젊고 아름답다는 것이 여성에게 '기간 한정'의 무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그 짧은 시기가 지나면 남은 시간, 대체로 무거운 족쇄가 된다.

우리, 사무실의 조명이나 꽃이 아니고 애인이나 어머니도 아닌, 그냥 노동자 여성.

그렇게 살 순 없나.


능력주의 사회의 언어로 말하자면, 여성이 이러한 이중의 역할을 수행하거나 수행을 거부함으로써 갈등하는 데에 자기 자원을 쏟지 않고 업무에 집중한다면, 당연히 당사자도 사회도 더 나은 성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여성주의자의 언어로 말하자면, 방송국에도 '개저씨가 너무 많다'는 것이다. 여전히 남성만 시민이고 주체인 아테네 광장 같은 이곳에서 남성(...늙남)의 필요에 따라 여성의 자리를 만들고 지워버리는 행태에 대해 부디 성찰하길 바란다. 여자도 인간이라는 걸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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