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내가 제작에 참여했던 프로그램을 오랜만에 보던 중, 카메라 뒤에서 출연자와 대화를 나누는 목소리에 놀랐다. 내가 아는 목소리인데 이 프로그램에서 다시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여기서 다시 들리면 안 되는 목소리 아닌가? 설마, 했지만 제작진 스크롤을 보니 내가 짐작했던 그 이름이 거기 있었다.
'언제 돌아왔지?'
사건은 2018년, 다양한 업계에서 성폭력 피해 고발이 이어지던 때로 돌아간다.
미투운동에 발맞춰 의욕있는 활동가가 방송계 성폭력 실태조사를 진행했는데 그 일을 나도 도왔다. 방송작가는 대표적인 여초직종이고 피해를 당했을 때 해결을 요청할 회사도 없고 조력할 조직도 마땅치 않았던 터라, 중요한 자료가 될 조사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최초라 할 수 있던 방송계 성폭력 실태조사가 별도의 발표 자리를 갖지 못한 채 보도자료로만 배포되는 데에 그치고 말았다. 사사로운 욕심에 공사를 망친 그분들은 지금 어디 가서 뭘 할까. 인생 요령있게 잘 사는 인간들이 늘 문제다. 뭐, 다 지나간 일이지만.
당시 일하던 회사에도 성폭력 실태조사 설문지를 돌리며 참여를 독려했기에, 사내에 성폭력 사건이 벌어지자 피해자는 당연히 나를 먼저 찾아왔다. 나는 피해자에게 여러 증거 자료를 전달받아 사건을 문서로 정리하는 한편, 다른 동료들과도 소통하며 조력자들을 모았다. 지금 돌아보면 옆 팀의 선배 작가의 도움이 컸다. 바른 동료들이 곁에 있었다는 것이 겁많은 내게 행운이었다.
사건을 보고받은 대표도 단호했다. 아니, 어쩌면 다급했다. 말했듯 2018년이었다. 방송사는 내부에 별도로 성폭력 관련 고충 처리 조직을 만들고 외주사에 성 비위가 불거지면 바로 아웃시키겠다고 엄포를 놓는 시기였기 때문이다. 대표는 피해자가 원하는 대로 휴직을 주고 가해자에겐 회사를 떠날 것을 통보했다.
그런데 가해자가 퇴사 전, 그러니까 대표의 추궁과 엄단 의사를 들었으나 아직 퇴사하지 않아 업무를 계속하던 기간 중에 촬영을 다녀왔는데 거기에 황당한 게 찍혀 있었다. 얼마나 놀랐냐면, 수년이 지났지만 나는 그 영상을 아직 지우지 않고 USB에 보관하고 있다. (나는 사실 많은 걸(?) 보관하고 있다.)
영상의 내용은 이랬다.
길가의 들꽃을 촬영한 가해자는 동행한 스태프에게 꽃 이름을 검색해보라고 했다. 그런데 검색이 더뎌지자 다그치던 가해자는 이어서 욕설을 뱉었다.
"그것도 못하냐, 씨발년아?"
무슨 욕이든 언어폭력인 게 당연했지만 내가 더 놀란 건 가해자도 욕설을 들은 스태프는 남성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씨발년'이 성별을 불문하고 욕설을 쓰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중년 남성이, 자기보다 어린 남성에게 쓰는 건 사실 처음 들었다.
그 스태프가 피해자의 첫 조력자였다는 걸 알고 폭력적으로 군 것일까?
혹시 가해자가 뱉은 "씨발년아"가 눈앞의 남자 스태프가 아니라 이 영상을 보게 될 게 분명한 나를 향한 것은 아닐까, 의심스러워졌다.
그렇게 사건 기록에 더해 욕설 영상까지 남기고, 가해자는 회사를 떠났다.
피해자도 조력했던 팀원들도 모두 프리랜서였기에 하나둘 회사를 떠났고 나도 오래지 않아 자리를 옮겼다.
그런데 수년이 지나, 그가 다시 그 자리에 돌아온 것이다.
"씨발년아" 욕설을 뱉던 그 목소리로 출연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어떻게 해야 했을까.
회사 대표에게 당장 전화를 걸어서 이게 무슨 짓이냐고 항의하고 여전히 보관하고 있던 사건 기록을 방송사에 보내야 했을까.
그러나 당시 사건에 대해서 분명 가해자는 해고라는 징계를 받았다. 그리고 현재 그 회사에는 피해자도 조력자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징계에 유효기간이 있었나.
가해자도 먹고 살아야 하는데, 해도 될 일, 안 될 일을 타인이 정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게다가 어쩌면 엄벌주의가 더더욱 반성 없고 악랄한 가해자를 만들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까지 해봤다.
그러나 적절한 징계를 받고 마무리된 사건의 가해자라도, 그의 복귀에 결코 유화적일 수 없는 이유도 있다.
과연 이 업계가, 한국 사회가 애초에 가해자를 정말 벌한 적이 있는가, 의심스럽기 때문이다.
나이 어린 신입 작가들에게 수년간 상습적으로 성폭력을 저지르다가 그 중 딱 한 사건이 드러나 2018년 퇴출당한 가해자는 사건이 지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인근 제작사를 드나들며 억울한 피해자인 양 떠든다는 소문이 들려왔다.
방송계 뿐인가. 3년 6개월 징역까지 살고 나와서 5년간 아동 청소년 기관에 취업도 금지당한 성범죄자 안희정은 최근 정치 행사에 등장해 상석을 차지하고 앉아있었다.
우리 사회는 성폭력이 범죄에 얼마나 단호한가. 애초에 그 사건이 성폭력이었다는 것은 인정하긴 하나.
전도유망한 청년 여성들이 떠난 자리에 돌아오는 가해자들.
그걸 지켜보다 보면 결국 단죄 없는 사회에서 용서를 말하기는 너무 이르다, 는 결론에 닿게 된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데 고민하는 사이, 해당 프로그램 개편으로 그 제작사는 밀려났고 자연스럽게 가해자의 목소리도 같이 사라져 버렸다.
방송일이란... 피해자나 가해자 모두에게 임시적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