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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MEI SEO Jul 03. 2023

가끔은 죽도록 걷고 싶어서, 지리산

성삼재에서 중산리까지 38km의 지리산 성중종주

종주縱走  

능선을 따라 산을 걸어, 많은 산봉우리를 넘어가는 일


하나의 산에는 여러 봉우리가 있다.

북한산도 정상 백운대를 비롯해 만경대, 노적봉, 인수봉, 원효봉, 문수봉, 의상봉, 보현봉 등 무수한 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다.

그러한 산 봉우리를 두 곳 이상 지나는 능선 산행을 종주라고 부른다.


국립공원 1호이자 가장 면적이 넓은 지리산의 경우 봉우리가 90개가 넘는다고 하니, 어디서 시작해 어디를 지나 어디로 하산하느냐에 따라 무궁무진한 종주코스를 만들 수 있다.


종주코스는 주로 출발지점과 도착지점의 이름을 붙여 만든다.

지리산 주능선을 걷는 가장 긴 종주코스인 화대종주는 전남 구례군 화엄사에서 출발해 노고단을 거쳐 지리산 주능선을 따라 천왕봉을 오른 다음 경남 산청군의 대원사로 하산하는 것이다.

화엄사로 올라 중산리로 하산한다면 화중종주,

성삼재에서 올라 백무동으로 하산한다면 성백종주, 가 되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약 46km의 화대종주를 하루 만에, 그것도 15시간 내외로 완료하기도 한다.

가파른 오르막 1km를 걷는데 1시간이 걸리기도 하는 것이 산인데 수없이 오르고 내리기를 반복하는 지리산 주능선을 평균 시속 3km 내외로 달리다니, 강인한 다리와 타고난 운동능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일이다.

34km 정도의 성중종주를 무박으로 하는 사람들은 좀 더 많다.

아무래도 코로나19 때 지리산 대피소가 폐쇄된 시기가 있어 그 이후로 무박 종주가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 같기도 하고, 바쁘다바빠현대사회에서 2,3일씩 산을 타는 게 현실적으로 어렵다 보니 다들 무리할 수밖에 없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산행의 난이도를 좀 더 올리고 싶은 욕심도 다들 있을 것이다. 같은 코스도 시간을 단축한다든가, 산객이 드문 시간대나 날씨를 골라 간다든가, 더 멀리 더 빠르게. 똑같은 산이라도 새로운 퀘스트를 추가하면 전혀 다른 산행이 된다.


내가 무박 성중종주를 떠난 건

돈과 시간 모두 부족한 보통의 도시 노동자라는 이유가 가장 클 것이다.


물론 꼭 성중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처음엔 성삼재를 출발해 반야봉을 들렀다가 뱀사골로 하산하는 코스를 생각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반야봉을 내려와 천왕봉까지 계속 걸었다.

요즘 내 기분이 그랬다. 죽도록 걷고 싶었다.


마음이 힘들 때 몸을 괴롭히면 걱정을 잊는다고 하는데 내가 바란 건 그것과 좀 달랐다.

몸과 마음의 일치랄까? 마음이 괴로운 만큼 몸도 괴로운 편이 좋았다. 정신의 고통은 모호하지만 육신의 고통 보다 분명하고 표현하기도 단순하니까. 어쩌면 내 안의 골방에 웅크린 번민과 우울을 육체적 고통으로 형상화해 끄집어내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죽도록 걷고 싶다는 나의 소망이 너무도 강렬했나 보다.

보통의 성중종주보다 무려 4킬로 이상 더 걷게 됐으니 말이다.  




1. 우리는 왜 평균보다 4킬로 이상 더 긴 성중종주를 했나.


앞서 말했듯이 성중종주는 34km 내외이다. 

우리가 남보다 약 4km 더 긴 종주를 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반야봉을 다녀왔다.

지도에서 보듯, 반야봉은 종주코스에서 약 1km 정도 벗어난 지점에 있다. 왕복 2km면 얼추 1시간을 잡아먹기 때문에 보통은 주능선 종주를 할 때 가지 않는다. 

하지만 나는 블랙야크 100대 명산 챌린지도 하고 있어서 일단 올라가기로 했다. 이건 뭐, 나쁜 선택이라고 말하긴 어려울 것 같다.


둘째, 하산길에 길을 잘못 들어서 셔틀버스가 끊긴 순두류 코스로 진입했다. 

순두류 코스는 3km의 산림도로를 포함하고 있고 등산로 난이도도 낮지만 칼바위 코스보다 약 2.6km 정도 길다. 본래는 산림도로에 셔틀버스가 다니지만 우리가 하산했을 때는 이미 운행이 종료된 시각. 빛 한 줌 없는 도로를 하염없이 걸어 내려오는 일은 육체적으로도 심리적으로도 무척 고된 일이 었다.



2. 성삼재에서 연하천 대피소까지


성삼재에서 반야봉까지는 길이 쉬운 편이다. 

식수는 노고단 대피소(*공사 중이나 식수 보급은 가능)와 임걸령(*지리산에서 가장 물 맛 좋다는 샘물)에서 가능하다. 

노고단 고개에서 지리산 종주 수첩 인증 도장을 찍을 수 있다. 

삼도봉은 전라남북도와 경상남도가 만나는 지점에 있다. 삼도봉을 지나면 나타나는 화개재가 그 유명한 화개장터가 서던 자리라고 한다. 장터목도 그렇고 화개재도 그렇고 참 대단한 사람들이다. 

토끼봉 가는 길에 깔딱 고개가 있어서 힘들다. 다들 여기서 많이 쉬어간다. 

연하천 대피소에서 다들 아침을 먹고 간다. 우리처럼 반야봉을 들르지 않는다면 보통 7시 반쯤 도착하는 듯하다. 화장실은 쪼그려 앉는 푸세식이다. 


노고단 고개에서 지리산 종주 수첩 스탬프를 찍었다



가져간 것은 람지커피 콜드브루. 맛있다. 여러분, 드세요. (*급 광고)

콜드브루도 맛있지만 원두나 드립백의 경우 주문받으면 바로 볶아서 배송하기 때문에 늘 신선한 원두를 받을 수 있는 람지커피. 내 마음의 원픽이라 대놓고 광고합니다.  http://ramjicoffee.modoo.at/


반야봉 반가워!

반야봉의 반야와 관련해서는 두 가지 이야기가 있다. 지리산 산신 마고(노고 할머니)의 남편이라고도 하고, 옥황상제의 아들로 마고의 딸 마야고와 사랑에 빠진 인물이라고도 한다. 어느 쪽이든 마고와 마야고는 지리산을 지켜야 하는 천명을 가진 사람들이고 남자들은 다른 이유로 산을 떠났다. 상심한 지리산 산신이 연인의 옷을 찢어 날린 것이 풍란으로 피어난 자리가 바로 이곳 반야봉이라는 것이다. 

그래서일까. 참 잘생겼다, 반야봉!

서부 지리산의 최고봉이라는 반야봉의 낙조는 지리 10경 중 하나로 꼽힌다.



3. 연하천 대피소에서 장터목 대피소까지


연하천을 지나면 본격적으로 주능선 조망을 할 수 있는 지점들이 나타난다.

벽소령 대피소와 세석 대피소의 화장실은 수세식이다. 장터목 대피소 화장실은 이용객이 많은 탓인지 상태가 아주 심각하다.

벽소령-세석 구간은 종주꾼들에게 가장 힘든 구간으로 꼽힌다. 거리도 6km가 넘는 데다가 가파른 오르막과 바위 구간이 자주 나타나 난이도도 높은 편이다.

세석 대피소에서 장터목 가는 길의 난이도는 '보통'이라고 표시되어 있는데 속지 말자. 촛대봉까지는 무난한 오르막이지만 삼신봉, 연하봉은 생각보다 넘기 쉽지 않다. 

연하천->벽소령 가는 길의 조망바위, 가까이 보이는 우뚝 솟은 봉우리가 형제봉.
형제봉과 지리산의 이끼 바위들
벽소령->세석


세석->장터목. 쉽지 않다.
연하선경

연하선경 너머 우뚝 선 봉우리의 이름이 연하봉이다. 

1955년 구례 사람들이 모여 만든 산악모임 [연하반]은 지리산 주능선 종주길을 개척했고 당시 불법적인 산림 도벌로 몸살을 앓던 지리산을 보호하기 위해 '국립공원'이라는 개념을 처음 들여온 사람들이었다고 한다. 

그런 그들의 업적을 기려서 이름 없던 봉우리를 '연하'로 부르게 됐단다.

장터목 대피소

 


4. 장터목에서 천왕봉, 그리고 하산까지


장터목에서 천왕봉은 1.7km 밖에 되지 않고 초반 깔딱을 제외하면 그리 난이도가 높지 않지만 체력이 떨어진 상태면 쉽지 않다.

제석봉 인근은 천상의 화원이라 불린다. 

하산길인 중산리 코스는 경사도 높은 돌길로 아무리 건강한 사람도 무릎 통증을 느낄 수밖에 없다. 빠른 하산보다는 안전 하산을 지향하도록 하자

구름이 산을 넘지 못하여 만들어진 경계를 따라 오르는 천왕봉 가는 길
성중종주 드디어 완료!
중산리 가는 길
개선문
법계사 앞 표지판

법계사 앞 표지판 사진을 찍고 난 이후, 사진이 없다. 

이때 로타리 대피소에 앉아 잠시 속세(?)의 업무를 처리했는데 대피소 마당에는 중산리탐방지원센터까지 5.9km(? 사진을 찍어두지 않아 정확하진 않음) 라는 표지판이 있었다. 이상하다, 일출 산행 때 여기까지 올라오는 게 1시간 30분 정도 걸렸는데 그렇게 멀었다고?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분명 이상하다고 생각했으면서도 다시 하산을 재개했을 때 대피소 마당을 가로질러 바로 그 방향으로 걸어 내려온 것이다. 

나만 하는 실수는 아니었다. 법계사에서 길 따라 바로 내려오면 헷갈릴 일이 없지만 로타리 대피소 안으로 들어갔다가 방향을 잘못 잡아 순두류 코스를 탄 사람들이 꽤 있었다. 

아마 칼바위 코스보다 40분 정도 더 소요된 것 같다. 캄캄해진 산에서 40분이면 정말 긴 시간이고 무엇보다 이미 30킬로 이상 산을 탄 상태라면 100미터 차이도 클 수 밖에 없다. 

어이없는 실수에 화가 나서 하산길 내내 툴툴대다가 서울 가는 버스를 기다리며 콜라를 마실 때에서야 겨우 성중종주를 완주한 기쁨이 뭉클하게 다가왔다. 


해냈다. 

얕고 하찮은 성취감이라도 이 기분에 나는 또 산에 간다.







벽소령대피소에 있는 산행안전 체크리스트

만약 지리산 종주를 떠날 계획을 품고 이 글을 읽고 있다면 꼭 좌측의 [산행안전을 위한 자가진단 체크리스트]를 확인하자. 


해당 안내판을 찍은 곳은 벽소령 대피소이다.

작년 9월, 처음 무박 성중종주에 도전했을 때 나는 이미 벽소령에서 지쳐서 저 체크리스트의 첫 항목을 보며 내 잘못을 깨달았었다. 


SNS와 유튜브에 아무리 무박 성중종주 후기가 넘쳐나고 남들 다 가는 코스 같지만 그렇다고 나도 갈 수 있는 건 아니다. 


그리고 꼭 중등산화를 신고 가자. 

나는 경등산화 라인인 캠프라인 산티아고를 신었는데 나중엔 한 걸음도 옮기기 힘들 만큼 발바닥이 아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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