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복 탄력성'이라는 말에 대한 고찰
"명랑이라 하는 것은 개나 물고 다닐 것이오, 미소를 짓밟는 자의 의욕에 불과하다."
- 시인 김광섭
근래 '회복 탄력성'이란 말이 심심찮게 들린다. 원체 이 용어는 경제학 용어인데, 요즘은 사람의 마음을 두고 쓰이기도 한다. 회복 탄력성이란 실패에서 최대한 빠르게 회복하는 능력이다. 요즘 핫한 기업 채용 담당관들이 원하는 인재상의 하나로도 꼽히는 회복 탄력성. 이러한 특성 아니 '능력'을 지닌 이들을 귀감 삼아야 한다는 글이 도처에 넘치는 요즘 나 홀로 이 개념에 딴지를 걸어보고자 한다.
서두에 쓴 문구는 최근 읽은 책,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에서 발췌했다. 이 책의 저자는 국문학 교수로서, '명랑'이라는 밝고도 아름다운 말의 그림자를 파헤친다. 명랑이란 개념은 근대 이전만 하더라도 사물의 깨끗한 상태를 일컫는 용어에서, 점차 인간의 감정을 표현하는 말로 바뀌어 갔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검은 역사가 개입하고야 만 것이다. 첫 번째는 일제의 통치 정책이며, 두 번째는 근대 자본주의이다.
먼저 일제 총독부가 '명랑'이란 말을 어떻게 썼는지를 알아보자. 일제는 1920년대 문화 통치기를 거치면서 식민지 조선인들을 더 교묘하게 복종시키기 위해 온갖 머리를 굴렸다. 그 결과 '명랑화'라는 귀여운 말이 탄생하였다. 즉, 감정 정치가 시작되었다. '명랑화 사업'은 오물과 폐수, 부랑자를 도시 경관에서 제거하는 도시 정비 사업 중 하나였으나 점차 조선인들의 감정을 통제하는 여러 정책에까지 이르렀다.
이를테면 '유행가 대회'같은 것이 있었다. 이 대회의 목적은 한 마디로, "조선 팔도 내로라하는 가요 작곡가들이여, '명랑'한 노래를 만들어 오시오"였다. 주최 측은 그간 조선인들이 싸구려 감상주의에 젖어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회를 열었다 한다. 그런데 이런 행사들이 모이고 모여 무엇이 되는가, 결국 '명랑'이란 현 정치체에 긍정적이고 순응적인 것과 같다. 즉 그들이 말하는 명랑이란 '딴소리 말고 웃으라'는 소리와 똑같다. 그들이 진정 조선인들의 행복을 위해 명랑을 내세운 것은 아니지 않겠는가.
한편, 1920년대는 상업 자본주의가 한반도를 비롯한 세계 곳곳을 휘저어 놓을 시기다. 이때 경성에는 한 가지 독특한 종의 직업이 생겨났으니 이른바 서비스직, 다시 말하면 '감정 노동자'들이다. 백화점, 버스, 호텔 할 것 없이 미소를 지은 여성들이 고용되었고 이들에게 최우선의 가치는 '명랑'을 보이는 것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먹고살 길은 요원하다. 이들뿐이랴, 역사의 광풍을 맞은 조선인 대부분이 모두 명랑을 선보이기 위해 얼굴에 경련이 오도록 미소를 지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퇴폐적, 감상적인 것은 구시대의 산물이요 이제는 깨끗하고 순결하며 명랑한 것만이 '문명'이 된 것이다. 즉, 사람이 '경쟁력'을 가지려면 명랑해야만 한다.
저자는 이야기를 맺으며 캔디 주제가를 언급한다. '외로워도 슬퍼도 나는 안 울어.' 동요 하나가 세상을 바꿨다고 하는 건 어불성설이겠으나, 이 주제가는 여전히 '명랑'과 '긍정'이 미덕인 요즘 사회를 한 마디로 요약해준다. 물론 요즘 사회는 어느 때보다도 '우울증'을 병답게 취급하는 사회다. 즉 개인의 나약함만을 탓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회는 여전히 '밝게 웃기를' 은근히 권한다. 그리고 더 나아가 그런 사람들만이 '성공'할 수 있다고 암시한다.
이른바 '긍정'하지 못하면 도태될 것만 같은, '회복 탄력성'이 없이 우울에 침잠해 있으면 루저로 낙인 될 것 같은 사회. 앞서 회복 탄력성이 경제 용어라고 말했다. 하지만 사람 마음이 어디, 기업 실적이나 주가와 같은가?
자본주의 사회는 개인에게 '경쟁력'을 가지라고, 개인더러 '브랜드'가 되라고 말한다. "나를 잘 파는 법"을 끊임없이 연구해야 한다. 정말 멋진 말이다. 구시대의 산물인 연고, 학벌은 저리 가라다. 개인이 노력만 한다면 자기 강점을 강화하여 자신을 셀링 할 수 있는 시대. 부조리한 과거는 더욱더 멀리 사라지는 것만 같다.
그러나 정작 사회는 한 보, 아니 반 보도 나아진 것이 없다고, 나는 감히 말한다. 일제가 '명랑'을 강요하고, 명랑한 자만이 경쟁력 있다는 상업자본주의가 판치던 1920년대에서 100년이 지나도록 우리는 여전히 긍정적이어야만 한다. 세상에는 결코 승자만 없다는 것도, 혹자에겐 작은 생채기가 혹자에겐 크나큰 트라우마가 될 수 있다는 것도 여전히 충분히 알고 느끼지 못한다.
의지, 열정, 노력. 물론 중요하다. 그러나 이들은 어디까지나 사람의 마음에서 출발한다. 감정, 달리 말하면 사람 마음의 상태와 태도에 이름을 붙이는 잣대는 무엇인가? 우리가 말하는 긍정과 행복이 과연 진정한 의미의 긍정과 행복일까? 사회가 '인간'을 끌어당기는 보이지 않는 목줄이 아닐까? 그러나 감정은 훈련의 대상이 아니다. 이성의 통제의 대상도 아니다.
언젠가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우울증 환자가 회복하는 법은 딱 하나다. 바닥을 치면 된다.'
사람이 탱탱볼도 아니고. 쳤다손 쳐도 못 일어나는 경우가 대다수다. 일어서긴커녕 존재하지 않게 될 수도 있는 게 사람이다. 그때 가서 '쳤지만 못 올라와서 심히 유감이다.'라며 혀를 찰 것인가?
회복 탄력성, 그런 거 없어도 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프고 싶은 만큼 아플 권리가 모두에게 있다. 머무르고 싶을 만큼 머무를 권리 또한 있다. 마음에 '탄력성'이 없다고, 지나치게 슬퍼한다고 죄짓는 거 아니다. 애초에 게으름까지도 죄로 치부하는 프로테스탄티즘 아래에서 현대인은 계속 혹사당해왔다.
하지만 난 이제 쉬는 '척' 하지 않고 진짜 마음 놓고 쉬고, 아파하고, 눈물 흘려도 되는 세상을 살고 싶다. 오랜 '침체'도 이해받는 그런 세상에 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