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상수의 「밤의 해변에서 혼자」
세상에 '내 편'이 없다. 모두가 내가 없는 자리에서 나를 비난하지만, 내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웃는다. 누군가는 나의 '행실'에 대한 비난을 반면교사로, 반듯한 척 살아간다. 그들을 모두 떠나면 남는 것은 나 하나. 절대적인 고독의 시간. 그 시간을 견디는 방법은 몰입할 타자(인간이든 무엇이든)를 찾아내는 것이지만, 유부남을 사랑했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된 영희(김민희)에게는 그조차도 쉽지 않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밤의 해변에 혼자 선 여인의 고독한 시간은 익명의 타인들(혹은 그들이 만든 모종의 질서)으로부터 자유로워질 수 있는 시간일까.
욕망을 따르거나, 지우거나
영희는 유부남을 사랑했고, 그 비난을 못 이겨 독일로 도망치듯 떠났다. 독일에서 혼자 사는 지영(서영화)의 집에 얹혀살며, 산책하고 책 읽으며 조용히 지낸다. 영희가 지영의 삶에 궁금해하는 지점은 이것이다 - 결혼해서 잘 살다가 왜 혼자 사는가? 지영의 대답은 단순하다. 필요해서 같이 살았던 것이지, 원해서 같이 산 것은 아니라고. 자신이 남자가 필요했고 돈이 필요해서 살았던 것이지, 그 사람이 좋아서 같이 산 것은 아니라고. 실제로 그렇다.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동거)하고, 결혼(동거) 후에도 그 사랑을 지속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사례로 남는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그래도 지영은 '자기답게' 살아간다. 자기 자신에게 적합한 삶의 양식이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어차피 행복하기만 한 삶은 없다.
자신이 원하는 사람을 찾아 떠나는 것이 욕망의 지도에서는 순리처럼 그려지지만,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다. 명수(정재영)의 경우처럼 관계를 끊어내는 고통을 겪는 것보다,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익숙하고 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명수는 자신의 애인과의 관계를 친구 관계라고 속일 정도로 부끄러워하고, 술자리에서의 키스를 부끄러워하며, 무언가 체념한 듯 살아간다. 커피콩을 누가 고르느냐로 다투는 등 일상적인 '생활'에 파묻혀서만 관계 유지가 가능할 뿐, 둘 사이에 사랑이 기거하는 공간은 없다. 명수는 결국 사랑하는 누군가를 원할 수조차 없는, 욕망에 대한 체념만으로 자신의 삶을 유지할 수 있는, 얼굴조차 검어지고 늙어버린 인간으로 그려질 뿐이다.
아토포스의 비극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이후부터 기존의 '욕망'과 '허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사랑'에 대한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기존의 영화들의 주인공들이 남성1, 남성2, 남성3, 여성1, 여성2, 여성3 … 처럼 분류할 수 있다면, 「지금은 맞고 그때는 틀리다」, 「당신자신과 당신의 것」, 「밤의 해변에서 혼자」에서는 여성 한 명에게 독보적인 지위를 부여한다. 롤랑 바르트가 「사랑의 단상」에서 지적하듯, 아토포스(ATOPOS, 예측할 수 없는, 끊임 없는 독창성으로 인해 분류될 수 없다는 뜻1)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영희가 유부남을 사랑하고, 유부남도 영희를 사랑한 이유는 서로가 서로에게 아토포스적 존재로 자리매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둘의 아토포스는 비극이다.
바르트는 아토포스를 다음과 같은 정의한다. "내가 사랑하고, 또 나를 매혹시키는 그 사람은 아토포스이다. 나는 그를 분류할 수 없다. 왜냐하면 그는 내 욕망의 특이함에 기적적으로 부응하러 온 유일한 독특한 이미지이기 때문이다. 그는 어떤 상투적인 것(타인들의 진실)에도 포함될 수 없는 내 진실의 형상이다.2" 둘은 서로에게 '진실의 형상'이지만, 둘의 관계에서 벗어나 사회적 관계에서 둘은 사랑할 수 없다. 남자가 유부남이니까. 하지만 '유부남'이라는 타이틀은 둘의 사랑에 아무런 제약을 가하지 못한다. "모든 수식어는 거짓이며, 고통스럽고, 잘못된 것이며,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그 사람은 무어라 특징지을 수 없다.3" 하지만 영화 안에서는 둘이 만나지 못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사랑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날 수 없는, 자신의 아토포스를 포기할 수밖에 없는 영희는 고독을 시간을 무한히 헤매인다.
그래도 한 번, 솔직해져 보자고,
영희가 고독해질만 한 시점에 화면에는 검은 옷 남성이 영희를 항상 노리고 있다. 검은 옷 남성은 영희가 겪는 사회적 시선에 대한 공포를 보여준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한다고 할 수 없는 것만으로도 비참한데, 익명의 시선들이 자신을 괴롭히고 있다. 영희가 겪는 고독은 단순한 외로움이 아니라, 외로움이 싫지만 외롭게 살아갈 수밖에 없는 슬픈 운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추구하는 지점은 '솔직함'이다. 자신이 겪을 고통을 알면서도, 최소한 사랑을 찾았다면, 자신의 감정에 솔직해져 보자고. 자신의 아토포스가 부재하는 고통과 고독의 구렁텅이에 빠지더라도, 그래도 한 번 솔직해져 보자고. 운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면, 그 위에서만이라도 자유롭게 유영하자고. 그것은 비록 힘겨워보이는 몸부림에 불과할지라도, 자신을 향해 꿈틀대는 개인은 언젠가 그 자신이 아토포스가 될 것이니.
2017.03.25.
*본문 인용
1) 롤랑 바르트, 「사랑의 단상」, 동문선(2004), p.60
2) 같은 책, p.60
3) 같은 책, p.6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