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젊은 안무자 창작공연을 보고
2022년 젊은 안무자 창작공연 포스터
청춘의 춤, 꼰대를 깨우는 시간
공연예술계가 조금씩 기지개를 켜고 있습니다. 팬데믹 상황에서 가장 직격탄을 받았던 공연예술계가 다시 무대를 향한 열정을 조금씩 지펴가고 있는데요. 오늘은 무용계의 젊은 안무가들의 창작공연을 소개해 드리려고 합니다. 현대무용의 거장 피나 바우쉬는 "춤은 동시대의 삶에서 태어나는 것이며, 기성 춤의 형식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예술계도 결국 인간이 만든 시스템이기에, 여기에도 앞서 무대를 만들어내고, 표현의 문법을 만들어낸 이들의 목소리가 작지 않습니다. 선배들은 자신들이 해온 관행과 표현의 방식을 '전승'이란 이름 아래, 답습하게 하고 내면화시키려고 부단히 노력합니다.
무용읽기, 추리게임의 시작
예술은 이런 선대의 꼰대질과의 싸움 위에서 발전하는 것입니다. 표현의 문법에 자신이 살아낸 삶의 표정을 함께 담는 것. 놀랍게도 동시대의 젊은 창작자들은 이런 도전을 즐겨합니다. 그들이 처해있는 사회구조와 변화 양상, 아름다움에 대한 태도, 표현법 이런 것은 그들을 가르친 선배 세대의 것과 많이 다릅니다. 세대는 결국 10년을 단위로 '한 사회를 함께 살아낸' 동류 그룹의 감성이 다르고, 사회를 보는 시각과 대응방식도 다르기 마련입니다. 젊은 안무자들의 춤에는 현대적 감성들이 농밀하게 녹아있기 마련입니다. 춤을 읽는다는 것은 안무자의 내면 속 수수께끼를 풀기 위한 정밀한 게임과 같아서, 그 게임에 들어가서 무용수의 움직임을 읽고 있자면, 그 속에서 저 또한 반성의 계기를 맞게 됩니다.
김민의 <BARCODE> 사진제공: 대한무용협회
말놀이의 힘 The Power of Pun
12팀이 경합을 벌이는 가운데 저는 3개의 공연밖에 보지 못했습니다. 시간을 내서 다른 공연을 보지 못한 게 못내 아쉽더군요. 저로서는 첫 공연이었던 김민의 <바코드 BARCODE>는 도발적인 작품이었습니다. 무대는 아주 미니멀합니다. 상자로 구성된 일종의 벽이 보이고, 균일한 크기의 벽돌처럼 보이는 상자로 만들어진 그 세계는 어찌 된 일인지, 자신과 맞지 않는 블록 하나를 지속적으로 바깥으로 토해내며 극은 시작됩니다. 벽돌의 각 면에는 알파벳이 쓰여 있는데요. 이 알파벳은 조합에 따라 상품을 뜻하는 PRODUCT, 상품체계와 정보를 담은 BARCODE, 허무함을 뜻하는 EMPTY 등으로 변화됩니다.
춤이 생산하는 의미는 무엇인가
이 작품의 매력은 현대사회의 젊은 세대들의 가장 존재론적 질문에 답하려는 노력에 있습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과연 자신만의 아이덴티티를 가진 존재인가 아니면 상품 미학 사회의 한 일원으로, 다양한 기능을 조합해 익혀 조직의 일부가 되거나, 혹은 상품성을 가진 짧은 수명의 존재가 될 것인가에 대해 묻습니다. 생산하다란 단어의 라틴어 어원은 프로듀체레 producere인데요. 이것은 여전히 무의 상태에 있는 어떤 것에서 '구체적인 생각과 원료를 끄집어내어 유형의 것으로 만드는 것'을 뜻합니다.
김민의 <BARCODE> 사진제공: 대한무용협회
상품이 되기를 거부하는 청춘의 몸짓을 읽는다는 것, 적어도 상품경제가 지고선이 된 후기 자본주의 사회에서 우리들은 무엇을 만들고, 소비하는 가는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호모 콘슈무스(Homo Consumus)는 괜히 태어난 말이 아닙니다. 15세기 서구의 르네상스 시대, 상품경제가 본격화되던 시대, 사람들은 자신의 소비를 통해 자아를 증명하고, 발흥하는 사회에 필요한 인간임을 타자에게 보이려고 노력했으며, 이를 위해 위계화된 소비의 문법을 만들었습니다. 다양한 장인과 시장의 위계가 이뤄진 것도 이때부터지요.
상품경제는 타인과 나의 관계를 소비를 통해 규정하고 큐레이션 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타인과의 관계성은 상품을 통해 표현되며 소비자의 내면도 상품을 통해 드러나게 되죠. 그 과정의 끝은 놀랍게도 허무의 세계를 향해 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 블록의 배열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우리라는 생각을 하며 이 공연을 봤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안무자 김민 씨의 작업이 좋더라고요. 젊은 안무가들과 연출자들의 특징이 뭔지 아세요? 자꾸 자신의 작품 안에서 일련의 해답을 찾고 관객에게 밀어붙이는 우를 자주 범한다는 것입니다. 안무자는 해답을 내는 것이 아니라, 움직임의 틀을 만들고, 큐레이션 해서 이를 하나의 이해 가능한 이야기로 만드는 이일 뿐입니다. 움직임의 청지기인 것을 잊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김민이란 안무자에게서 이 느낌과 가능성을 본 겁니다.
오정윤의 <할喝> 사진제공: 대한무용협회
청춘의 춤은 꼰대의 그것과 달라야 한다
젊은 춤꾼들의 창작공연을 보면서, 앞으로 더 많은 젊은 세대의 안무자들이 등장하기를 소망하는 것은, 무용계는 유독 사회적 목소리를 담기보다는, 자기만족에 빠졌다고 할까요? 사회를 냉철하게 때로는 감각적으로 풀며 놀고 뒤집는 이런 작업들을 잘하지 않았습니다. 이 날 보았던 나머지 두 작품도 '저는 무용이에요'라고 말하는 작품들이었어요. 물론 실패와 실수가 연속인 삶 속에서 매일 훈련하며 나아가는 자신을 보여주겠다는 오정윤의 <할>도 우리 시대 청춘의 숙제인 '자기 계발의 광풍'을 끄집어낼 수도 있었겠으나, 너무 추상적인 성장담론에 무용의 의미를 고정시켜버린 부분이 걸렸습니다.
오정윤의 <할喝> 사진제공: 대한무용협회
사실 제가 쓴 문장도 한쪽으로 너무 치우친 말일 수 있겠다 싶어요. 우리는 춤을 통해 몸을 통해 비춰본 사회를 보는 것이지만, 그 몸을 연단해 한 사회의 '조건'을 넘어서는 존재로 만드는 것도 춤 공연을 통해 찾아야 할 미덕이니까요. 특히 한편 한편 펼쳐지는 길 위에 뿌려진 저 갈빛의 씨앗들이 어떻게 자라날지는 지켜봐야 할 문제겠지요. 이 부분을 기성 무용답게 제의처럼 풀어낸 것도 매끈한 해결책이란 생각이 들긴 했습니다.
홍은채의 <나붸> 사진제공: 대한무용협회
세 번째로 본 홍은채의 <나붸>는 무용이란 고정된 틀에서 그다지 벗어나지도,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과 표현내용에 이르기까지 진부함을 느낀 게 사실입니다. 아마도 제가 '나비'라는 상징을 이용하는 모든 서사들을 진부하다고 생각해서일 수도 있겠습니다. 저는 무용이 조금은 청춘의 아픔에, 더 예민하게 반응하는 장르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몸의 반응만큼 빠르고 직접적인 것이 있던가요? 전체적인 구성은 좋았던 작품입니다.
홍은채의 <나붸> 사진제공: 대한무용협회
특히 서사가 시작되는 기와 승, 결의 부분이 조율이 잘 된 작품인데, 정작 나비가 '우화등선'하는 변화의 양상이 매끄럽게 안무를 통해 연결되는 것 같지 않아서 아쉬웠습니다. 그래도 마지막의 장면은 이날의 휘날레를 장식하기에 충분했어요. 온통 초록빛 세상 위에서 새롭게 자신의 껍질을 벗어던진 나비의 모습은 그 자체로 이 '상실의 시대'를 사는 청춘에게 충분한 희망이 되었으리가 믿습니다. 젊은 안무가 세 분의 이름은 앞으로 기억하고 제가 공연을 찾아보려고 해요. 수고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