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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omewhen Aug 15. 2024

언어가 멈춘 날

다시 글쓰기,

이제 다시는 그 어떤 이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던 겨울, 그 결론에 도달하기까지 내가 사랑했던, 지난날의 인연들이 떠올랐다. 슬라이드를 한 장씩 넘기듯 어떤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어떤 슬라이드에 놓치지 말았어야 할, 후회로 남은 기회 같은 것들이 보였다. 그리고 어떤 슬라이드에 선택하지 말았어야 할 어떤 갈림길의 모습도 보였다.


상처를 입고, 인내가 모두 말라 버렸을 때 포기했던 사람에게서 내가 진정 사랑하고 싶어 한 존재의 모습들이 어떤 유형의 삶에는 존재하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사랑할 수 있는 힘을 다시 채우고 다음의 순간이 찾아왔을 때, 사랑하고 싶은 모습을 그대로 지키기 위해서 과거에 만난 사람과 살아온 방식이 다른 사람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은 그 때문인 것 같다.


안타깝지만, 그 결심이 언어가 무용한 순간을 마주하게 만든 원인이 되었다. 말이 턱 하고 막히고, 더 이상 내가 가진 언어가 그 사람과 나 사이에서 쓸모가 없어졌다고 여기게 된 것은 사람과 세계를 표상하는 도구인 언어가 너무 다르기 때문이었다. 언어에는 삶의 경험이 녹아 있어 무엇이 가치 있고, 마주한 어떤 것을 어떻게 해석하고 이해하고, 느껴야 하는지 논리가 담겨 있다는 것을 극단의 순간 새삼 되새기게 됐던 것이다. 


언어에는 삶의 경험으로 얻은 사람과 세계에 대한 표상(representation)이 담겨 있다. 우리는  언어로써 구성한 표상을 도구로 삼아 일상에서 일어나는 사건의 의미와 유형을 파악하고, 사건에서 문제를 찾고 문제를 해결할 궁리를 한다. 그래서 언어가 다른 사람은 전혀 다른 세계에 살아가는 사람과 다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언어의 교집합을 찾지 못하면, 결국 공존할 수 없게 되거나 의미를 공유하지 못하고 단지 나란히 생물학적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삶의 경험에는 차이가 있다. 경험이 다른 만큼 언어도 달라서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만들려 할 때에는 상대가 가진 언어를 파악하고, 그 차이를 조율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사랑의 순간을 만나는 것은 언어로써 설명할 수 없는 강렬한 정념의 순간이지만, 사랑의 지속은 언어로 쌓아 올린 집에 그 정념(passion)이 흩어지지 않고 잘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것과 같다. 다른 언어로 허물어지지 않은 집을 지을 수 있을 때, 사랑은 계속될 수 있는 것 같다.


내게도 시간이 필요했다. 때때로 그 시간을 잘 보내고 있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브런치 사랑에 대한 글을 쓴 것은 언어의 집을 짓고, 사랑하는 마음을 잘 지켜서 오래도록 사랑의 시간을 이어가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너무나 다른 언어는 갈등이 커진 긴박한 순간에 문제를 일으켰다. 거친 말들이 폭력처럼 쏟아졌던 것은 언어가 다른 사람들이 서로 설득할 언어적 논리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한마디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서 너무나 많은 말을 해야 했다. 그것이 갈등이 벌리는 틈을 좁힐 기회를 잃게 만들었다. 무엇을 전제하고 있는지 일일이 말해야 하는 순간 언어는 그것이 필요한 '딱' 그 순간을 잃었던 것이다. 그것이 모든 '이해 불가'의 순간이 시작된 것이었다. 


언어가 무용하다고 확신하게 될 때까지 쓸모를 잃을, 

적절하지 않은 말을 너무나 많이 하는 동안에 

이해가 결코 성립할 수 없었다.



언어가 무용해지고 난 뒤에 연이어 있었던 감당하기 어려웠던 사건들이 일어났고, 끝을 맞았다. 그러나 그 사건들이 끝의 원인과 같았을지 모르겠으나, 어쩌면 끝의 본질이 아닌 부차적인 것이었는지 모르겠다. 자신의 언어가 무용하다 여기게 된 순간, 관계를 포기하고 있었을 것이다. 단절과 끝에서 기만으로 드러난 오래전부터 이루어지고 있었을지 모르는 배신은 말이 끊어지는 순간 정해진 과정에 불과했을 것이다.


관계와 관계를 지키기 위한 노력의 끝과 함께, 끝을 마주하는 동안에 내가 겪은 경험이 내 언어에 자리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떠올리지 않았을 감정과 생각이 말에 고스란히 남았다는 것을 너무나 쉽게 깨달았다. 그래서 말을 꺼내 놓기가 두려워졌다. 


두려움이 지난날의 선택을 복기하게 만들었다. 내 언어가 쓰일 수 있는 공간을 좁히며 관계를 맺어왔던 것 같다. 그리고 언어가 쓰지 못하며, 내 언어는 막히게 된 것 같았다. 악순환의 시작된 것만 같다. 


그러나 비극으로 마무리할 생각은 없다. 사랑을 위해 말하지 않더라도, 나로서 살아가기 위해서 언어를 가두지 말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사랑에 대해서, 사랑을 잘 이어가기 위해서 브런치에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현재 더 사랑하고, 더 잘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없다. 그러나 사랑에 대해서, 사랑의 언어에 대해서는 여전히 쓸 수 있을 것 같다. 사랑이라는 이 거대한 말이 한 사람, 그리고 사람과 사람으로 이루어진 세계를 틀짓는 거대한 논리의 근원이라 믿기에 사랑에 대해서 써야 한다고 믿는다. 


멈췄던 글쓰기를 다시 부지런히 이어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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