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et coffee 한남_아메리카노
웻커피의 예쁘장한 도넛들이 카운터 옆에 줄지어 서 있었지만 딱히 단 걸 먹으며 하하 호호 기분 좋게 대화할 만한 그런 상황은 아니었다. 항상 그렇듯이 아메리카노 한잔을 시키고는 자리에 앉았다. 그렇게 직장 상사와의 면담 같은 티타임이 시작되었다. 한남동에서 일하면 딱딱한 분위기의 대화일지라도 힙하고 트렌디한 장소에서 이야기할 수 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싶었다. 그동안 꽤 여러 번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던 것 같은데 내 입에서 정확한 단어와 문장이 나오지 않는 이상 이 대화가 반복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고심고심하며 어쩌면 듣고 싶었을지도 모를 이야기를 전했다. 사실 지금 이 상황 속에서 이것 말고는 다른 대안이 없다는 생각이 들긴 했었다.
커피는 아주 뜨거웠지만 손에서 놓을 수 없었다.
항상 그렇듯 차분하고 조근조근하게 나의 생각들을 이야기하려 했지만 마음은 불안했고, 그 불안함을 감추고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손에 쥐고 있었다. 뜨거운 아메리카노에서 전해지는 열기가 꽤나 자극적이었다. 그렇게 모든 이야기를 전하고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따뜻하고 진한 커피가 목구멍을 타고 내려가며 나를 진정시켜 주는 듯했지만 어떠한 반응이 나올지 몰라 불안한 건 매한가지였다. 이번엔 과연 정답 같은 나의 생각을 잘 전달한 것이 맞을까.
생각보다 티타임은 짧게 끝났다.
만족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직 열린 결말인 것처럼 몇 가지의 가능성들을 열어두긴 했지만 아마 그쪽도 당장 해결해야 할 문제가 있으니 내가 좋은 해결점이 될 수도 있다. 내가 그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러 간다 생각하니 이 결말에 짜증 났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풀리는 듯하다.
제자리인듯하지만 나는 달라졌다.
지난 1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고, 많은 생각들이 나를 힘들게 했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제자리인 듯 보이지만 나는 제자리에 머물고 있지 않다고 생각한다. 지난 시간 동안 나름의 생각들을 정리했고, 나를 좀 더 단단하게 만들기 위해 많은 변화들을 시도했다. 나는 여전히 이른 아침 일어나 새벽 요가를 하고, 글을 쓰며 나의 생각을 정리하고, 책을 읽으며 좋은 구절은 필사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이 단순한 과정들이 무너졌던 나의 자존감과 자신감을 다시 키워내고 있고, 더 나아질 수 있다는 희망을 가져다준다.
씁쓸했던 커피가 달게 느껴진다.
진하고 씁쓸하기만 했던 커피가 조금씩 달게 느껴진다. 제자리인듯한 그 자리에서도 나는 더 나아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더 좋아질 것이라고 생각이 든다. 그것 만으로도 나는 달라지고 있다고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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