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하_인도 커피
조용한 일요일 아침. 남편은 잠시 일을 보고 오겠다며 아침 일찍 집을 나갔고 느지막이 늦잠을 자고 일어나 거실로 나왔다. 어느 사이엔가 내린 눈이 거실 창문 너머 앞집의 지붕을 하얗게 덮었고, 저 멀리 인왕산도 하얀 눈꽃이 피었다. 잠시 거실을 서성이며 무얼 할까 고민을 하다 커피를 한잔 내린다. 인도 커피를 처음 알려준 ‘자하’의 로스터가 신경 써서 볶아준 인도 커피이다. 어느 지역의 어떤 종류의 커피인지는 모르겠지만 내리는 순간부터 구수하고 달콤한 옥수수차의 향이 난다.
제일 좋아하는 커피를 한잔 들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기 시작한다. 창 밖에는 하얀 세상이 보기 좋게 펼쳐져 있고, 스피커에서는 부드러운 재즈음악이 흐른다. 그 누구도 방해하는 사람이 없이 온전한 나의 시간이다. 이 순간이 행복하고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이렇게 순수한 마음으로 무언가를 있는 그대로 즐거워하고 있다는 것이 꽤나 오래간만에 느끼는 감정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우울했던 것 같다.
뭘 해도 재미가 없었고, 보람이 없었다. 다 내가 아는 것 같았고 새로운 건 시도조차 해보고 싶지가 않았다. 나이를 먹어갔고, 연차는 쌓여갔고 더 이상 나에게 새로운 것은 없다는 듯이 그렇게 모든 것들을 시시하게 바라봤었다. 그 감정들이 나를 점점 우울하게 했었던 것 같다. 아마도 그랬던 것 같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나는 우울했던 것 같다.
내가 모든 걸 다 안다고 생각했던 오만이었다.
세상의 이치가 어떠하고, 사람들이 왜 그러한 생각들을 하고 행동하는지 다 아는 것 같았다. 나는 항상 열려있고 다양성을 인정하는 깨인 사람이라고 생각했었지만 그저 내가 아는 범주 안에서만 그랬었던다. 내가 모든 걸 다 알고, 깨달았다고 생각했던 그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어쩜 그렇게도 오만하고 무지했을까.
머릿속 혼돈이 없어지면 행복해질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래서 더 이상의 혼돈을 만들고 싶지 않았다. 나의 정체성과 삶의 가치관이 만들어진 것처럼 살면 더 이상 마음이 불안해지거나, 두려워지는 일은 없이 행복할 줄 알았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거짓된 안정은 나에게 안정대신 우울함을 주었다. 모든 것들이 재미가 없었다.
그 좋은 것들, 그 선물들,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황량함을 노려보게 해 주고, 그것을 더 명료히 보게 해 준 요령을 절대 놓치지 않을 가장 놓은 방법은 자신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사실을, 매 순간, 인정하는 것이다. 산사태처럼 닥쳐오는 혼돈 속에서 모든 대상을 호기심과 의심으로 검토하는 것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룰루 밀러>
이 구절을 읽고, 이 의미를 되새기는 내가 너무 좋았다.
지난 시간 옳다고 생각해 왔던 안정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것을 깨닫고 있는 것도 너무 좋았고, 새로운 생각들로 머리를 채우는 것도 너무 좋았다. 무엇보다도 앞으로도 더 즐거운 일이 생길 것이고, 나는 실패를 할지라도 무언가를 다시 해볼 수 있다는 생각에 희망이 생겼다. 이전이라면 아무 의미 없이 지나쳤을 이 구절을 다시 한번 되새기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 좋았다.
오늘의 인도 커피 한잔은 여전히 맛있었다.
보리차를 강하게 볶은 듯한 구수한 향을 맡고, 옥수수차에서 날 것 같은 이 단맛을 느낄 때마다 혼돈이 주는 삶의 의미들을, 이 책의 이 구절들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