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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츄르 Dec 09. 2021

여우같은 여자

보다는 그냥 사람이 되고 싶네요

여우같은 여자.

이 말에는 비난의 의미만큼 선망의 감정도 담겨 있다. 타인의 감정을 잘 캐치한 뒤 아양을 떨어 다른사람들의 감정을 제 필요에 따라 조정하는 여자에 대한 선망이다.


세련되게 꾸밀줄을 몰라 하이힐과 붙는 옷이 내 꾸밈의 한계여서 그런지 외모적인 면에서 여우같다는 말은 간혹 들었었는데 성격적인 면에서는 항상 곰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인지 나는 항상 '여우같은 여자'에 대한 선망이 강해서 이런 유형의 친구들을 무척 좋아하고, 곁에 두곤 했었다. 그 때는 그런 친구들에게 대인관계 스킬을 좀 배워 다른 사람들에게 더 좋은 평가와 더 많은 사랑을 받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친구들 중에 지금 내 곁에 남아있는 친구는 한 명도 없다. 그리고 나는 이제 여우같은 여자가 되기 보다는 자기 중심이 확고하게 잡힌 '사람'이 되고 싶다.

타인의 평가와 애정에 휘둘리지 않는 삶을 살고 싶다.
어떤 일이 닥쳐도 쉽게 회복할 수 있도록
스스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이 있는 사람이 되고 싶다.


이런 생각을 갖고 산지는 몇 년 되지 않았다. 20대의 나는 끊임없이 타인의 애정을 갈구하고 다른 사람들의 평가에서 내 가치를, 극단적으로 말하면 '내가 살아 있어도 되는 이유'를 찾았다. 그 때의 나는 연애를 통해 나자신을 찾으려 했다. 친밀한 한 사람이 주는 애정의 양과 질을 통해 내가 사랑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이라는 점을 확인하려 했다. 친밀한 한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배경이나 직업 같은)에서 '내가 이 정도의 사람은 만날 수 있는 사람'이라 은연중에 생각하며 내 가치를 찾으려 했다. 그러나 아무리 친밀한 관계라 해도 그 사람이 내가 아닌 이상 그가 내게 주는 사랑은 내가 내게 주는 사랑이 아니었고, 그가 가진 것들은 내 것이 아니었다. 


조금만 서운한 게 있어도 내 감정은 극단으로 치닫곤 했고 나는 허무할 정도로 쉽게 관계를 정리하고 다른 관계를 찾아나섰다. 나는 성숙함과는 거리가 멀어서 함께 성장할 파트너를 찾는다기 보다는, 칭찬해주고 감정을 받아주는, 그러면서도 외부에 보이기 좋은 직업이나 외모를 갖고 있는 도구적인 존재를 원했다. 그리고 내가 '정상적인 연애를 하고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걸 증명해 주는 보호막을 원하기도 했다. 사실 나뿐만 아니라 이성애 경험이 있는 많은 여자들이 이런 이유들 때문에 연애를 했을 거라 생각한다. 꽤 많은 여자들이 타인의 시선을 넘어 진정으로 자신을 보지 못한다. 다른 사람의 애정이라는 필터를 통과하지 않은 건강한 자기애를 할 줄 모른다.


존 버거의 대표작 <Ways of seeing>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여자로 태어난다는 것은 주어진 한정된 공간에서, 남자들의 보호, 관리 아래에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했다. 여자들의 사회적 존재는 이렇게 제한된 공간 안에서 보호, 관리를 받으며 그 여자들 나름대로 살아남으려고 머리쓰고 애쓴 결과로 이룩된 것이다. 그러나 그 대가를 치르기 위해 그녀의 자아는 두 갈래로 갈라진다. 즉 여자는 거의 계속해서 스스로를 계속 감시하고 감독해야한다는 말이다. 스스로 갖고 있는 자신의 이미지는 항상 그녀를 뒤따라다닌다. 방을 가로질러 갈 때 또는 아버지가 사망하여 울 때도 그녀는 걸어가거나 울고 있는 자신의 모습을 머릿속에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중략)... 한 여자가 자기 스스로의 존재에 대해 갖는 생각은 타인에게 평가받는 자기라는 존재로 대체된다. 

90년대에 태어난 여자가 20년대에 태어난 남자의 통찰력에 충격을 받을 정도로, 여자들의 어떤 부분은 예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았다. 시대가 변하고, 여자가 더 많은 경제활동을 하게 되고, 미친 여자들의 피해망상으로나 여겨지던 페미니즘이 한 시절을 풍미하기도 했으나 여자들의 어떤 부분은 과거에 머물러 있다. 소위 z세대로 불리는 요즘 친구들이 어떤지는 모르지만 내 세대까지는, 성공해 홀로 사는 여자들보다는 성공한 남자에게 선택받아 그 남자의 사랑을 받는 여자들이 더 성공한 삶을 사는 거라고 교육받아 왔다. 일적으로 성공하는 것보다 (이성애적) 사랑에 성공하는 여자들이 더 가치있다고 교육받았다. 


실제로 내 기억을 되짚어보면, 교단에 선 선생들이 아이들의 긴장을 풀어줄 잡담을 한답시고, '여자는 똑똑해봤자 외적 매력이 없고 남자에게 사랑받지 못하면 불행한 삶을 산다.'라든지, '여자의 레벨은 만나는 남자의 레벨이 결정한다'라는 말들을 자주 했다. 어떤 선생은 '연애용 여자와 결혼할 여자는 완전히 다르다'고 말하며, 남자에게 결혼상대로 여겨지려면 어떤 태도를 보여야 하는지 설교하기도 했다. 마치 '결혼 상대로 선택받는 것'이 여자의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것인양. 예민한 사춘기 시절, 나도 머리가 굵어 당시에는 비웃으며 넘겼지만 결국엔 이러한 어른들의 말들을 나도 모르게 내재화 했던 것 같다. 그보다 더 어린 시절도 마찬가지다. 동화책 속 여주인공들은 왕자와 결혼함으로써 해피엔딩을 맞곤 했다. 

이렇듯 나를 포함한 많은 여자들은 누군가를 행복하게 만들거나 그 누군가의 욕망을 자극하는 존재가 됨으로써 그에게 선택받는 게 곧 행복인 것마냥 교육받았다. 그 결과 다른 사람에게 어떻게 하면 사랑받는지에 대한 공부는 평생을 걸쳐가며 하지만, 정작 나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에는 끝도 없이 무지해진다. 이제부터라도 나는 타인이 아닌 나자신에게 사랑받는 법을 배워보려한다. 타인의 욕망이 아닌 나의 진짜 욕망을 기민하게 캐치하고 그 욕망을 채우기 위해 노력하고 싶다. 

남의 시선이 아닌 스스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이 아직은 많이 어색하고 잘 되지는 않는다. 그래도 자신과 마주하고 진짜 원하는 걸 찾으려 애쓰는 날들이 하루 하루 쌓여가면 조금은 달라지지 않을까? 작은 희망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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