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년의 크리스마스 돌아보기
나는 종교도 없으면서 크리스마스에 미쳐있는 인간이다. 어린 시절 산타를 너무 열정적으로 믿어서 그런 것 같다. 크리스마스 영화들에 나오는 소위 '크리스마스 정신'이란 게 아주 충만하달까. 같은 영화를 한 번 넘게 잘 안보는 편인데, 크리스마스 고전 영화들은 수도 없이 돌려봤다. (주로 아동용이다.)
2019년 크리스마스는 당일에 뭘 했는지 기억은 안나지만 시즌 자체는 만족스럽게 보냈다. 11월 달에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한창 달아오른 롯데월드에 갔기 때문이다. 나는 롯데월드 특유의 레트로한 감성을 너무 사랑한다. '백투더 퓨처' 분위기가 충만한 혜성특급이나, 어린시절 봤던 만화영화들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신밧드의 모험, 촌스러운 너구리 캐릭터들. 모두 어린 시절 봤던 그대로라 롯데월드만 가면 어린아이처럼 들뜬다. 그 때 너무 행복해서 앞으로 매년 크리스마스 시즌엔 롯데월드에 오겠다고 결심했는데 코로나가 터졌다.
2020년 크리스마스 시즌은 크리스마스다운 설렘을 간직하며 꽤나 만족스럽게 보냈었다. 주말마다 혼자 백화점이나 시장을 사부작사부작 돌아다니며 크리스마스 소품 구경을 실컷 했었다. 새로 산 빔 프로젝터로 어린 시절부터 좋아하던 크리스마스 영화들(크리스마스 악몽, 더 엘프, 폴라 익스프레스 등등)도 몰아봤는데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당일에는 엄마와 맛있는 것을 먹으며 빔프로젝터로 <킹덤> 시즌 1,2를 몰아봤다.
2021년 크리스마스 시즌은 이상하게 크리스마스 특유의 설렘이 덜했다. 트리도 장식했고 크리스마스 여행도 갔지만 시즌 특유의 두근거림이 없었다. 게다가 이번 여행은, 인상적이긴 했으나 어떤 측면에서는 내 인생 최악의 여행이었다. 구스다운 패딩만 믿고서 발목이 드러나는 짧은 양말에 얇은 긴팔 티, 사계절 용의 기모 없는 청바지를 입고 갔는데 폭설을 만났다. 그 지역 주민들이 모조리 삽을 들고 나와 장엄한 표정으로 눈을 퍼내는데도 차가 갈 수 있는 도로가 거의 없을 정도로 엄청난 폭설이었다. 골목길은 길과 얼음으로 다 막혀있어서 밥 한끼 먹으려면 멀리 차를 세워놓고 눈을 맞으며 걸어가야 했다.
발목에 자꾸 눈이 들어와서 동상에 걸릴 것 같았다. 발목 부위의 타는 듯한 고통 때문에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을 봐도 빨리 차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결코 가볍지 않은 내가 날아갈 까봐 두려워질 정도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고 그 바람엔 물론 눈이 섞여 있었다. 추위보다 더 끔찍한 건 얼음이었다. 나는 미끄러운 지면을 극도로 두려워 해서 낙엽 밟는 것도 꺼려 하는 사람이다. 얼음은 말할 것도 없이 공포의 대상으로, 보기만 해도 무섭다. 그런데 이번 여행에서는 내 신발바닥이 얼음과 떨어질 일이 없었다. 흰 눈과 새파란 바다의 조합은 더할 나위 없이 아름다웠으나 기진맥진한 내 눈에는 아무것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쉬고 싶고, 기왕이면 바다가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스테이크나 썰고 싶었다. 하지만 여행을 함께 한 친구는 어떤 지역에 가면 그 지역의 명소를 두루두루 가야 직성이 풀리는 타입이라, 실망시킬 수 없어 부지런히 움직였다. 식당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보다는 그 지역에서만 먹을 수 있는 특별한 음식을 선호하는 친구라, 크리스마스 느낌이 나는 양식은 한 번도 먹지 못했다. 기왕 여기까지 왔는데 여기서만 먹을 수 있는 걸 먹어야 한다는데 그 말에도 일리가 있어 더 말을 보태지 않았다.
나는 스폿을 찍는 여행에 별로 익숙하지 않다. 어릴 때 가족여행을 가면 바다가 보이는 좋은 숙소를 잡아놓고 그 동네의 서점을 찾아갔다. 각자 원하는 책을 한 권씩 고른 뒤 숙소로 돌아가 바다를 보며 책을 읽었다. 사진을 찍기 위해 스폿을 찾는 일은 거의 없었고 느긋하게 드라이브하며 해수욕장에 차를 세워놓고 조약돌과 조개를 주웠다. 스폿이래봤자 주로 실내인 카페와 미술관 박물관에 갔다. 그런게 여행인줄 알았던 사람이라 학창시절의 수학여행이 고통스러웠고, 이번 크리스마스 여행도 고통스러웠다. 물론 같이 간 친구 입장에서는 내가 힘들어해서 원하는 만큼 여행을 즐기지 못했을 거다.
내년에는 크리스마스를 무조건 도시에서, 실내에서 보내리라 다짐했다. 그리고 반드시 롯데월드에 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