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기별 형태가 달라진 듯 하지만 결국은 일맥상통하더라...
나에게 글쓰기란 시기별로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내 기억 속 첫 글쓰기는 방학 숙제로 몰아 쓰는 그림일기였다.
고학년 때도 일기 검사를 했던가는 기억에 없다.
요즘은 개인정보 보호 강화 차원에서 교사들이 아이들의 일기를 대놓고 검사할 수 없다. 또한 매일 쓰는 것이라는 강제성도 주어지지 않는다. 다만, 자율적인 기록 혹은 기간 내 최소 몇 편은 쓰기를 권고하고 교실 밖에서의 학생에 대해서도 알아야 지도가 가능한 것이기에 '세상에 하나도 관심 없듯이 매우 재빠르게 슬며시 일기 내용을 훑는다.'라고 아이 담임선생님께 들은 바 있다.
그와 달리 어릴적 그림일기는 방학 기간 내내 그림도 그려야 하고 글도 써야 하는 이중고였다. 당시 스케치북과 같이 생긴 두툼한 그림일기장에 방학을 오롯이 담아내야 했다. 그것도 엄마와 둘이 앉아서 개학을 하기 직전 몇 일간에 걸쳐 한 달 분량의 날씨와 일화를 되새기는 작업이었다.
지금처럼 정보의 데이터화, 인터넷 망의 범일상화가 이뤄지지 않았던 국민학교 시절엔 지난날 어떤 일이 있었는지, 하다못해 그날의 날씨라도 찾아낼 방법은 신문을 버리지 않았어야 한다. 일어난 시간, 잠드는 시간도 매번 같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당 일자에 안 쓴 거뿐이지 거짓으로 담을 수도 없어 최대한 사실에 입각해 기억을 되살리고자 애를 쓴다.
방학식 날 학교에서 나눠주는 방학생활, 탐구생활, 그리고 곤충/식물채집, 그림 그리기와 만들기 작품 활동은 당일치기로 하기는 어려운 작업이었을까 방학 중에 성심성의껏 작성했다. 탐구생활 등 방학과제는 전교에 전시를 하고 상을 받을 정도의 우수 모범생이었다.
하지만 저학년 때 작성했던 일기만은 그런 기억은 전혀 없다. 날마다 나름 다채로운 일들도 있었을텐데, 쓰기 싫어 미루다 미루다 엄마랑 상을 펴고 앉아 그림 그리고 몇 줄 안 되는 원고지 칸을 채우는 것이 어찌나 힘들던지 모른다. 크게 혼났던 기억이 없던 나지만, 아마 일기 몰아 쓰기의 대작업을 하면서는 엄마의 짜증을 북돋았을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어느덧 부모가 되어 순하디 순하고 예쁜 내 아이에게 짜증이 나는 임계점은 그 이하에 형성되어 있으니까.
이 글을 쓰면서 당시를 떠올려 보니, 내 아이가 가끔 써놓은 일기와 독서감상문에서 '왜 마지막은 다 같은 말이야? 느낀 점을 표현할 말이 이것뿐일까?'라고 물었던 내가 부끄러워진다. 나도 그랬었구나. '참 재밌었다, 다음에 또 OO해야겠다. 앞으로는 잘 OO겠다.' 이외에 다른 무슨 말을 썼을지 전혀 내 머릿속 저 구석의 기억에선 어떠한 문구도 꺼내지지 않는다.
(탐구생활 이미지를 검색하다보니 공감200% 영상이 있어 링크)
또 다른 글쓰기는 백일장 대회에서의 시 또는 글짓기였다. 내가 이전에 언제 글을 썼었나 생각해보니 너른 광장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혹은 누가 내꺼라도 볼까 싶어 각자도생의 길을 찾아 멀찌감치 자리하고 글쓰기를 했다. 함축적인 의미를 담아내는 것이 더 어려운 줄도 몰랐던 그 시절 어린아이는 시를 써보기도 하고, 축약과 운율보다 풀어쓰는 것이 낫다 싶어 산문형 글짓기를 제출하기도 했나 보다.
이후 본격적인 글쓰기는 논술고사 대비 글쓰기였다. 학력고사가 폐지되면서 수능이 도입되고 논술시험 비중이 크게 축소되는 과도기에 있었기에 논술 준비를 했다. 논리적으로 서술하는 글쓰기를 위해서는 갖춰야 할 기본적인 구조가 필요하다. 주장과 견해에 근거를 들어 설득을 해야하기에 전제를 바탕으로 결론을 이끌어 낸다. 문득 '논리야 놀자.'라는 책 표지가 아련히 떠오른다.
주제가 일상적으로 생각해 볼만한 것이든, 유명 대학 논술고사에 나오는 심오한 것이든 상관없이 'OO에 대해 논술하라.'라는 문제가 적힌 A4사이즈 갱지를 받아 들면 세상엔 없는 빠른 뇌 운동이 시작된다. 내가 아는 모든 배경지식을 끌어내어 평소 딱히 내 주장이 어느 쪽이었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던 지문이라도 난 한쪽 입장에 서야 한다. 그리고 주장을 뒷받침할 모든 요소들을 꺼내어 다소 기계적인 구조 설계에 따라 글의 뼈대를 세운다. 돌이켜보니 이는 비단 대입 논술고사만이 아니었던가 보다. 토플 영작 시험에서도, 대학시절에도 회사에서 보고서도 사실 논리적 글쓰기는 당연한 것이다. 그리고 그건 매번 힘든 글쓰기 경험만을 남긴다.
글쓰기에 대한 욕망이 딱히 있었던 건 아니었는데, 소통과 기록의 채널로 이용했던 글쓰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20년이 족히 되었을 법한 개설일자도 명확하지 않은 네이버 블로그 글쓰기이다. 요즘 유명 인플루언서, 유튜버에 비할 순 없겠지만, 나의 소소한 일상을 나눈 블로그에 공감하는 많은 이웃과 단순 방문자들이 즐비했다. 나의 글쓰기로 인해 서로 이웃을 맺고 얼굴 한번 본 적 없지만 그 시대의 한 조각을 함께 나누었다. 이 당시 글쓰기가 가장 마음이 편했던 거 같다. 악플러라는 개념도 없었고, 서로 좋은 글을 가져가서 나누겠다는 의미의 '글 펌'이 유명했다. 어찌 보면 저작권이라는 개념이 정착되지 않은 시기였기에 가능했던 일이었고, 지금처럼 세상이 무섭지도 않았던 순박한 시대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블로그는 물론 싸이월드를 전면 폐쇄하고, 지금까지도 SNS 게시는 최소화하며 나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지 않았다. 글쓰기 부담이 없다는 강점에 유행한 트위터 몇 마디나 인스타그램에 사진과 함께 올리는 해시태그 조차도 쓰지 않는다. 오롯이 나와 가정, 회사에 집중하기에 힘쓰며, 지인은 물론 타인의 SNS 게시물 접근은 의도적으로 차단한다. 친한 지인의 안부를 금세 알 수 있는 채널은 애써 찾아가서 들르지 않는다. 다들 그곳에서 활동하고 있기에 나의 생사도 전하지 않는 일이 된 것이다. 우습게도 업무적으로 좀 더 빠른 정보 습득을 위해 늦은 취침과 이른 기상 일과에 마치 개인 카톡 신규 메시지 여부를 확인하듯이 전 미국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나, 해외 주요 기관 트위터를 확인하는 내가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공학분야 논문은 실험을 토대로 한 데이터 정리만 끝나면 의뢰로 명료했다. 하지만 업종을 달리해 15년 넘게 국제 원자재 시장에 몸 담은 채로 관련 전망치를 도출하고 나의 견해를 다양한 근거를 통해 제시하는 전망 보고서, 이슈 분석 보고서는 상대적으로 명료함이 떨어지는 작업이다. 그나마도 최대한 많은 자료와 데이터를 토대로 이왕이면 과학적, 수학적 수치를 뽑아낼 수 있다면 글에 힘이 실린다. 나의 연구 분야가 미시적인 공학 일부에서 거시적인 경제 일부로 옮겨왔다하지만, 아이러니하게 원자 단위 아래의 양자역학으로 귀결되는 것 같다. '양자(Quantum)역학'은 굉장히 정확하나, 빠르게 움직이는 작은 입자에서는 양자 역할이 먹혀들지 않는다. 내가 제시한 미래 특정 시기의 특정 원자재 가격 수준이 어떻게 될 거라는 것은 현재 전망하는 시점에서 가정한 상황이 일정 기간 유지되었을 때 정확도가 그나마 높다. 물론 일기예보처럼 수 없이 많은 징조, 미세한 변화를 슈퍼컴퓨터로 분석하고 과거 히스토리와 비교해서 보다 정교화시키고자 하는 노력을 할 수 있다. 업무적 글을 쓸 때 가끔은 일기예보가 좀 더 쉽지 않을까 하며 푸념하곤 한다. 예보가 틀릴 수도 있다. 그리고 예보에 따라 대비를 하면 된다. 나의 원자재 시장 전망 글쓰기 작업도 전망치를 활용할 이가 유용할 지표 중 하나이다. 하지만 유기적으로 움직이는 세계 정치, 경제, 산업, 기상 변화 등 다양한 변화는 사람들의 심리와 맞물려 어떠한 위치에서 어떠한 모습으로 발현된다. 수 많은 '나비효과(butterfly effect)'가 서로 중첩되기도 하고 소멸되기도 하면서 우리가 겪을 내일을 만들어 낸다. 자연현상에 대한 예측이 어려운 것은 물론이다, 인간이 제어할 수 있는 부분에 한계가 있기에 그러하다. 반면, 인간이 일정부분 제어 가능하지만, '열길 물 속은 알지만,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것처럼 개개인의 심리가 다르기에 경제사회의 어떠한 작은 요소도 예상하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정확도에 대한 문제는 차치하고, 회사에서 쓰는 글쓰기는 정보에 대한 대가의 일부가 나의 소득으로 돌아온다. 그 소득이 많냐 적냐의 문제이기 전에 무상으로 제공되는 예보와는 무게감이 다른 나의 글쓰기였다.
물론 지금의 습작처럼 두서없이 써 내려가는 이 글도 논리적 전개가 필요한데 너무 가볍게 써내려 가고 있는 나를 반추해 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인이 되어, 그것도 자발적으로 글쓰기 강좌를 신청하고, 일상적 주제에 대해 글을 써보는 과제를 받아 든 나를 깨운 한 마디는 '무조건/우선 써라!'였다.
표현하지 않으면 누구도 내 알지 못한다. 그게 이야기든 말이든 내 머리나 가슴 속에 있는 것을 밖으로 꺼내 놓아야만 한다. 다. 그래서 지금 이 글을 무조건/우선 쓴다. 소설이나 에세이 한 권을 읽을 여유를 갖지 못했던 것인지, 단순히 관심이 없어던 것인지 모른다. 논리적인 글은커녕, 글쓰기 소재를 받아 쓰기 시작은 했는데 분량을 어느 정도를 써야하는지, 어떠한 내용까지만 담고 다음으로 넘겨야 하는지 알지 못한다. 무슨 일이든 마감에 직면하면 집중력이 생기는가 보다. 글쓰기 강좌 수업이 있는 당일 새벽에 이 글을 이쯤에서 마친다. 남들은 미라클 모닝을 실천한다는데, 야행성인 나는 2시에 잠자리에 들려다가 숙제 제출 의무감에 2시간 남짓 이 글을 무조건/우선 쓰고 본다.
아직 어떠한 글을 쓸지, 어떤 글을 쓰고 있는지, 개인적인 일기가 아니기에 이왕이면 남이 소비해 줄, 읽어 줄 주제로 책을 써봐야 할 텐데 내 책 제목은 아직 생각한 것이 없다. 제목 이전에 어떠한 주제를 담아야 하는지부터 구조화해야 할텐데 담을 것이 많을 거 같으면서도 초라하다. 그간 아무런 캘린더만 빼곡하게 스케줄 작성을 했을 뿐, 메모든 글귀든 소소한 일상의 기억 자료가 남아있지 않다. 지금 주어진 이 시간이라도 기록될 수 있도록 이글을 남겨본다. 종종 스트레스를 푸는 양 지인에게 에피소드 하나씩을 이야기하다 보면 일상이 시트콤이다. 하지만 나한테는 그저 일상이었기에 그리고 지나고 나면 잘 기억이 안 난다. 더 시간이 지나서 추억을 곱씹을 소재가 기억이 나지 않기 전에 삶을 정리하는 글을 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