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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ia Feb 11. 2021

인도에 도착하다

인도에 도착했다. 뉴델리역에 도착한 시간은 늦은 밤이었다. 공항을 빠져나와 호텔을 예약해 놓은 구시가지로 가는 길은 온통 남자 뿐이었다. 각 나라의 윤리에 따라 삶의 방식이 결정되는데, 구시가지에서 여자들은 밤에 돌아다니지 않는다. 남자들만이 있었고 그들의 시선은 외국인 여자인 나에게 한번씩은 향했다. 


어두운 밤거리에서 본 인도의 첫 이미지는, '영혼의 풍요'를 생각하기엔 어려움이 있었다. 영혼은 커녕 나의 짐이 소매치기를 당하지는 않을지 불안해 하기에 바빴다. 길을 잘 못 찾는 나는 같은 길을 몇번이고 왔다갔다 하다가 결국은 파리처럼 달라붙는 호객꾼들을 뿌리치고 가장 깨끗해 보이는 게스트 하우스로 들어갔다. 게스트 하우스는 빛 한 점 없는 방 한칸이었지만 안락했다. 앞으로 인도에 있는 동안 어디로 가야할지 어떻게 가야할지와 같은 계획도 없었고 목표도 없었다. 그냥 정처없이 돌아다니다 보면 누군가 날 붙잡고 "신과 영혼에 대해 알려준다고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같은 일이 한국에서 일어난다면 질색했겠지만 여긴 인도니까 모든 게 괜찮을 것만 같았다. 그래서 아무 계획없이 돌아다녀도 누군가는 날 붙잡고 "영혼을 어떻게 보살펴야 할지 잘 모르겠죠?"라고 물어주겠지 생각했다. 


숙소 안에는 TV가 있었다. 화질이 좋진 않았다. 드라마의 대화는 힌두어로 진행되었다. 나는 채널을 돌렸고 광고들을 봤다. 인도 최대 기업인 TATA 광고를 제외하고는 거의 해외 브랜드 인 것 같았다. 한국 삼성의 광고, SONY, TOYOTA광고가 순차적으로 지나갔다. 인도에도 전 세계 광고가 그대로 들어와 있었다. 알아듣지 못하는 힌두어 드라마대신 여러편의 광고를 보다 잠들었다. 


잠에서 깨 눈을 떴는데 세상이 깜깜했다. 창문이 없었기 때문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6시였다. 한국 시간으로는 9시였기 때문에 평소 한국에서 6시 30분이면 일어나는 나에겐 늦잠을 잔거였다. 창문도 없는 게스트하우스에서 있는게 답답해서 새벽 바람이나 쐴 겸 밖으로 나갔다. 아무도 없는 한적한 거리를 생각했던 나는 잘못 안 것이었다. 사람들은 (역시 남자들만) 자신의 앞마당을 쓸고 있었다. 마치 류시화 시인이 번역한 <성자와 청소부>의 한 장면 같았다. 예전 인도 시인 타고르가 우리 나라를 가리켜 '조용한 아침의 나라'라고 했다면 인도는 '활기찬 아침의 나라'였다. 떠오르는 태양과 시끌벅적한 골목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한국에서와 다르게 누구의 시선도 신경쓰지 않고, 화장도 하지 않은 채로 거리를 돌아다닐 수 있다는 게 무엇보다 가장 좋았다.


인도 구시가지의 중심이라고 할 수 있는 빠하르 간지의 골목골목을 들어가며 걸어가다 라씨(인도의 요거트)를 파는 집 앞에 멈췄다.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했기 때문이다. 아저씨는 장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아저씨는 뼈와 혈관, 가늘고 긴 근육으로 구성된 마른 몸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구멍이 난 런닝 셔츠를 입고 있었다. 사실 깨끗한 흰색은 아니었지만 아저씨의 까만 피부색 때문에 런닝 셔츠가 흰색으로 빛나는 것 같았다. 라씨는 커드와 물, 설탕을 섞어 만드는 것이다. 아저씨 옆에 서 있던 어린 꼬마는 꾸벅꾸벅 졸면서 솥에 커드를 끓이고 있었다. 나는 20루피를 내밀고 플레인 라씨를 주문했다. 아저씨는 돈을 받고 옆에 있던 금고를 열어 돈을 넣었다. 금고 안쪽 벽에는 금관을 쓴 코끼리신이 사람처럼 앉아있는 사진이 있었다. 그는 금고를 닫기 전 두 손을 모아 기도를 했다. 


나는 돈을 받을 때마다 이렇게 신에게 기도 하는지, 신에게 기도하는 건 어떤 의미가 있는 지 물었다. 안타깝게도 그가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정도는 돈을 받고 라씨를 팔 수준밖에 안되어서 내가 뭘 묻고 있는지 모르는 것 같았다. 그는 나에게 라씨에 바나나를 넣어 주길 원하는 것이냐고 물었다.


-바나나?


내가 아니라고 하자 


-망고?


라고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하지 않으면 그 메뉴판에 있는 코코넛, 사과, 파인애플 등 10여가지의 과일을 다 물어 볼 것 같아서 망고를 넣어 달라고 했다. 그는 그럼 10루피를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고 했고 난 지갑에서 10루피를 더 꺼내주었다.

라씨는 일회용 컵이 아닌 스테인리스 컵에 담겨 나왔다. 라씨를 먹으며 걸어다니고 싶었지만 스테인리스 컵을 돌려줘야 했다. 나는 가게 앞에 있는 나무 의자에 앉아 라씨를 마셨다. 마시는 동안 아저씨와 할 수 있는 대화라고는 


-맛있어?


-완전 맛있어요.


정도였다. 그 이상의 대화는 불가능했다. 

라씨를 마시고 일단 델리에 있는 유적지를 가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는 사람이 많이 모일 테니까. 

일단 레드 포트를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붉은 성'이라는 이름이 매력적이었다. 인도의 뜨거운 태양아래 성도 붉게 타고 있을 것 같았다. 좀 걷고 싶었기 때문에 길도 잘 못찾으면서 무작정 지도를 보고 걸었다. 빠하르 간지를 벗어난 곳은 관리 받지 않은 곳이었다. 공기에는 공기 분자 반과 먼지 반이 있는 것 같았다. 숨쉬기도 힘들었고 재채기를 쉴 새 없이 했다. 인도의 벽쪽에서는 지린내가 진동을 했다. 남자들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벽을 향해 섰다. 심지어 취해 있지 않을 때도 말이다. 멀지 않은 곳에서 사람과 소들이 한데 섞여 잠을 자고 있었다. 죽었는지 살았는지 알 수 없었다. 그들은 앙상하게 말라 있었고 미동도 없이 잠을 자고 있었다. 한 시간쯤 걸은 것 같은데 레드 포트는 나오지 않았다. 지도 상으로는 삼십분 정도 걸으면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걸으면 걸을 수록 서 있는 사람보다 길가에 누워있는 사람이 많은 곳이 나왔다. 나는 태양 때문에 더이상 걸을 수가 없었다. 앞에 가는 자전거 릭샤를 잡았다. 사실 잡았다기 보다 자전거 릭샤를 모는 할아버지가 내 앞에 멈춰 섰다.

할아버지 역시 장소와 요금을 말할 수 있을 정도의 간단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것 같았다.


- 레드 포트?


- 네


- 100루피


- 100루피는 너무 비싸요! 50루피


인도에 가면 그들이 부르는 가격의 반부터 시작하라던 친구의 조언을 떠올리며 50루피를 불렀다.

깡마른 할아버지는 손을 휘저으며 50루피는 안된다고 했다. 그리곤 80루피를 불렀다. 하지만 나는 이론에서 배웠던 경제학의 수요와 공급 법칙을 즉시 체험할 수 있었다. 다른 릭샤꾼들이 내 주위로 몰려들어 공급이 늘자 급해진 할아버지는 가격을 낮춰 50루피에 레드 포트로 데려다 주기로 했다. 하지만 나는 곧 가격을 그만큼 낮춘걸 후회했다. 나에게는 그 돈이 한국에서 캔 음료수 한 잔 살 수 있는 1300원이었지만 할아버지에게는 그 날 세 끼의 식비가 되는 돈을 깎은 것이다. 그가 그 돈을 받고 하는 노동은 돈에 비해 가혹했다. 자전거만으로도 힘에 부쳐보였는데 나를 태우고 가는 할아버지의 옷에는 땀이 맺혔다. 할아버지는 질서 없는 인도의 도로에서 쌩쌩 달리는 차 사이를 뚫고 붉은 성으로 향했다.


나중에 안 사실은 인도의 수많은 릭샤꾼들은 어릴 때부터 길러지는 것이었다. 보통 부모님으로부터 그 직업을 물려 받는 경우가 많은데 마르고 성장이 덜 이루어진 상태로 릭샤꾼이 된다는 것은 말그대로 골병이 드는 일이었다. 심지어 장기가 파손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반면에 그런 어려움을 극복하고 성공한 '자수성가 형 인간' 도 있었다. 예를 들어 자이살메르에서 한국인을 전문으로 받는 '타이타닉' 게스트 하우스의 주인은 릭샤꾼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자기 소유의 건물을 가지고 있는 부자가 됐다. 그는 항상 돈을 꺼내보이며 "난 부자야. 이렇게 돈이 많잖아." 라고 했다. 우리가 돈을 지불하고 거스름돈을 달라고 하면 "난 단위가 큰 돈만 들고 다녀서 동전은 없어. 나중에 생기면 줄게." 했다.


인도를 여행하는 내내 나는 돈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 내가 돈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외국인인 나에게서 돈을 더 받고자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하는 일명 '바가지 상인'들이 날 시도때도 없이 괴롭혔기 때문이다. 돈은 누구와도 뗄 수 없는 관계였다. 물론 한 단위의 돈으로 살 수 있는 물건의 양과 질은 달랐어도 돈이 우리에게 의미하는 건 비슷했다. 영적인 삶과 세속적인 것은 아주 오래 전부터 논쟁거리였지만 어느 정도까지는 뗄 수 없는 관계였기 때문에 이해하기로 했다. 그들이 그들의 배고픔을 달래 줄 밥과 따뜻한 생활을 위한 옷을 살 수 있는 돈을 원한다는 게 잘못은 아니니까. 한국에서도 다이어트 약을 사거나 주사를 맞고 또 피트니스 센터 요금을 지불하는 데 항상 돈이 들었다. 뉴스에서 가난할 수록 체중이 많이 나간다는 보도를 본 이후로 내 몸이 돈이 없어 보이는 몸일까 전전긍긍했다. 한국에서처럼 인도에서도 돈에 시달리는 일이 힘들었지만 넘어가기로 했다. 이젠 모든 삶이 돈으로 움직이는 시대라는 걸 더 깊이 느끼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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