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조문희 Nov 22. 2023

고통 구경하는 사회

231121

  단순히 매체들이 조회수 장사에만 혈안이 되어있고 지극히 비윤리적이라서가 아니다. 이 경향은 영향력을 확장하여 세상을 바꾸고자 하는 매체의 욕망, 사회 정의 실현을 위해 효과적인 뉴스를 만들겠다는 기자의 선한 다짐들과도 분리하기 어렵다. - 김인정, <고통 구경하는 사회>, 235p


  자주 저열하고 이따금 고상한 욕망과 윤리의 결을 하나씩 세심하게 들여다 본 결과물. 책을 다 읽은 사람이라면 "분리하기 어렵다"는 고백의 진의를 알 것이다. 체념이 아닌 의지의 표현다.

  진지한 기자라면 이 책에 실린 저자의 고민 일부를 해봤을 테다. 취재 윤리부터 재현의 윤리까지. 현장에서 길어올린 의문을 글로 풀어낸 사람도 여럿 기억난다. 하지만 여러 쟁점을 다양한 위치에서 종합해 풀어낸 사례는 본 적이 없다. 역 방송국과 외신을 오간 저자의 이력이 눈에 띄었다.

  책을 읽고 좀 기이했던 건 알라딘, 교보문고 등 홈페이지에 올라온 (아마도 출판사가 작성했을) 책 소개와 (독자가 적어둔 듯한) 인용구들이 내가 책을 읽으며 눈여겨본 대목과 좀체 일치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산업재해가 이렇게 많은데, 오히려 많다는 이유 때문에 뉴스가 되지 않는다는 역설이라거나. 그 정도 분석은 어디서든 볼 수 있다. 이 책이 비추고 돌아보는 지점은 그보다 더 깊다. 구경과 목격을 분별할 수 없을 때, 가까운 연민이 먼 배제와 다르지 않을 때, '좋아요'를 향한 이기심이 행동의 잠재력이 될 때.

  기술 발전을 포함한 매체 환경의 변화는 뉴스 공급자뿐만 아니라 소비자에게, 나아가 두 주체가 교류하는 장(field)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오랜 물음과 새로운 질문은 어떻게 다르고 또 겹치는가. 반성하고도 끝내 현실론을 놓지 못해 꾸역꾸역 살고 후회한 흔적이 여기에 있다.


  고통은 언제 보여줘야 하도 언제 보여주지 말아야 하는가? 우리는 어떤 고통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하고 응시을 참아내야 하는가? 고통을 얼마나 보여주고 또 가려야 하는가? 보여주기의 윤리와 보여주지 않기의 윤리는 누구를 지키는 것이며 누구를 위한, 향한 것인가?
... 나는 보여주기를 옹호한 쪽이었고, 마지막 편집본에 결국 그 영상을 넣었다. 반복적으로 고통을 지켜보는 일이 고통스러운 건 당연하지만, 한 이야기를 생산해낼 때 시청자가 그 영상에 어느 정도 노출된 사람인지 가늠하는 일이 늘 가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었다. 고통을 보는 사람들의 고통보다도, 그 영상 안에 담긴 선연한 고통을 외면하는 일이 더 어려워서였다.
... 그러나, 겪는 고통이 아닌 이상 보는 고통 정도는 감내할 수 있지 않냐는 나의 결정은 고통을 보여주는 일에 따라붙는 도덕적 타당성이라는 관성에 기댄 것은 아니었을까? - 167~168p


  누군가는 '저렇게 회의적이어서야 어떻게 뾰족한 기사를 쓰겠느냐'고도 물을 법 하다. 나는 그 반대항을 편애한다. 영복 선생의 래된 글 하나. "여윈 바늘 끝이 떨고 있는 한 그 지남철은 자기에게 지워진 사명을 완수하려는 의사를 잊지 않고 있음이 분명하며, 바늘이 가리키는 방향을 믿어도 좋다."


  특혜에서 배제된 집단으로 묘사되는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들은 선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 악한 일을 하는 경우에도약자라는 맥락 안에서 조명받곤 한다. 약자의 선행을 바라볼 때는그 사람이 속한 집단이나 계층의 특성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한 개인의 독특한 선함의 질감을 놓치지 않도록, 악행을 바라볼 때는개인의 악함으로는 다 포착되지 않는, 그가 그런 선택을 하기까지 영향을 미친 사회적 요인과 모순에 고루 책임을 묻고 있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그렇지 않는다면 우리는 자꾸만 약자의 일을 저 멀리 타자화하며, 나와 관련 없는 남의 일로 간단히 치부해 버리는 인지적 게으름에 빠지게 될지도 모른다. -136p


  고통을 이해하기 위해 나를 틀로 쓰자는 뉴스의 제안은 얼마만큼 유효한 기획일까? 실제로 '나'의 고통은 뼈저리게 생생하다. 남의 고통보다 훨씬 더. 이따금 끔찍한 사건을 취재하고 난 뒤에 나나 가족이 피해자가 되어 같은 사건을 겪는 악몽을 꾸곤 했다. 그럴 때면 식은 땀이 범벅이 된 채로 깨어나 몸서리를 쳤다. 취재를 하며 피해자의 말을 듣고 이해하려던 순간보다 꿈에서 스스로 피해자가 된 순간이 훨씬 고통스럽게 여겨졌다는 점이 끔찍했다  가짜 고통, 가짜 겪음이라도 내 몸을 통과하니 진짜보다 더 진짜처럼 여겨진다는 게 괴물 같았다.
... 인류의 상상력과 지성을 믿어본다면, 오늘날 여전히 뉴스를 보는 사람들은 뉴스를 통해 세계와 타인을 배우고 싶어 하는 호기심과 욕망을 갖춘, 퍽 유연한 공동체다. 뉴스를 보는 일이 행동으로 꼭 변환되지는 않지만, 행동에 대한 가능성 역시 이 공동체 안에 있다.
  어쩌면 오늘날의 뉴스를 만드는 사람들에게 더 필요한 건, 나와 닮지 않은 것들을 향한, 닮음을 넘어 다름과 접속하는 공감이 가능하다는 믿음 아닐까. - 147~155p


  대상화를 무작정 멈추라는 말은 함정이다. 타인에 대한 말하기가 멈출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로를 도울 기회를 알지도 못한 채 지나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시선이 구경이 될 수 있다는 걱정에 빠져서 고통을 보는 일 자체를 멈춘다면, 그것은 또 다른 인간성 실패의 시작일 것이다. 우리의 눈은 움직일 수 있다. 자랑스럽지 않은 이유로 머물렀다고 하더라도 더 나은 곳으로 분명히 이동할 수 있다. 본 뒤에 무엇을 할 것인지가 더 중요하다. 전달과 전달, 중개와 중개를 통해 유예되어 버린 행동의 가능성이 당신에게 있으니까. - 36p


매거진의 이전글 좋아서 하는 일이라는 '착각'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