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의 도미노

관을 짜라-5-

by 간서치 N 전기수


「못찾겠다 꾀꼬리」 노래 가사처럼 아이들의 여린 심정으로 외치기만 하면 좋겠지만, 외치는 걸로 끝나지 않는다. 이제 이 노래를 부르는 사람들은 아이들이 아닌 어른들이다. 어른들도 그냥 어른들이 아니라 화가 단단히 난 어른들이다. 그들은 분노를 표출하기 시작했다.


SNS 덕분에 이제 그 분노는 아주 작은 불씨에도 불이 붙는다. 2013년 4월말 이집트의 카이로의 한 커피숍에 모인 20대 청년 백수 다섯 명에서 시작한 하야 촉구 서명 운동은 무라라크에 이어 무르시 대통령을 물러나게 했다. 같은 해 6월 브라질에서는 버스 요금 인상 때문에 전국적으로 시위가 번졌다. 시위가 벌어질 정도면 아마 엄청 올렸다보다 싶겠지만, 놀라지 마라 단돈 ‘100 원’ 올렸을 뿐이다. 이들 시위가 주는 메시지가 있다. 겉보기에는 쉽게 흥분하고 분노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 시위 안에는 그동안 불만의 모멘텀이 쌓였었기 때문이었다. 브라질 시위의 이면에는 정경유착과 부정부패 척결의 메시지가 담겨 있다. 또 이집트의 시위 속에는 양극화에 대한 불만이 담겨 있다. 이제 선거로 세워지는 새로운 정부들이라 할지라도 언제 어떻게 폭발할지 모르는 휴화산(休火山)을 축하 화환으로 받는 셈이다. 자칫 국민의 분노를 잘못 다루었다간 커다란 내상과 외상을 입게 될 것이다. 신세대 중산층의 요구와 분노를 어떻게 다루느냐에 따라 정치 인생이 달려 있다. 부(富)의 편중으로 증가한 빈부 격차로 힘들어진 중산층 이하의 사람들. 그들의 분노는 국가와 권력의 또 다른 리스크로 떠올랐다.


그에 비하면 아직 한국은 양호해 보인다. 서구 유럽이나 중동 국가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한국이 그들 나라와 같은 문제가 없어서가 아니다. 한국의 상황도 양호하진 않다. 위험은 항상 잠재해 있다. 한국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노동 시장 여건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88만원 세대’라 불리는 비정규직의 증가는 상대적 빈곤을 가져왔다. 정규직 임금을 100으로 했을 때, 비정규직의 상대적 임금 수준은 60~70 밖에 안 된다. 그로 인해 2000년대 중반부터는 양극화 속도가 빨라지기 시작했다. 아직 홍콩, 싱가포르, 브라질보단 불평등이 덜해도 계층 간, 지역 간 격차가 벌어질 기미가 보인다. 성장과 분배의 연계 고리가 강화되지 않는 한, 한국도 언제 터질 줄 모르는 화병을 안은 휴화산 상태라고 필자는 본다. 한국 사회도 지금처럼 성장 위주의 경제 모델에만 매달린다면 위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중산층 이하 계층들이 경험하는 불안과 분노는 상류층들에게도 위험 요소다. 금융 위기 이후로 빌 게이츠나 워렌 버핏 같은 미국의 억만장자들이 사후 재산의 절반 이상을 사회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한 건 그들이 박애주의자이어서가 아니다. 끓어오르는 분노가 결국 자신들에게로 미칠 것을 감지했기 때문이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이런 문제의식을 갖고 2011년 매일경제는 ‘분노의 시대를 넘어서’라는 특집 기사를 다루었다. 그 기사를 통해서 전세계적으로 분노의 폭발을 막기 위한 몇 가지 변화의 화두를 제시했다. ‘공감 자본주의(Empathic Capitalism)’ ‘21세기 소통 정치’, ‘선진형 균형 경제’, ‘자정형 건전 생태계’.이다.


‘공감 자본주의’는 기존의 ‘고비용·저효율’인 사회를 ‘저비용·고효율’로 바꾸자는 의미라고 했다. 그러나 필자는 ‘효율’이라는 말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무용지물 경제학』에서 베르나르 마리스는 효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권력이 당신에게 효율성을 들먹이는 목적은, 당신이 시장을 위해 일한다는 것과 시장은 효율적이지 않다는 것을 잊게 만들기 위해서다. 효율성만이 효율적이라는 것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다. 목적과 수단이 완전하게 규정된 씨스템에서라면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시장은 전혀 그렇지 않으므로 여기서 효율적인 해결책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에서 경제 신문사가 말하는 ‘공감 자본주의’라는 말보다는 김광수 소장의 ‘대중 자본주의’라는 말에 더욱 애착이 간다.


분노의 시발점이 국민이요, 그 대상이 정치권이라는 점에서 ‘21세기 소통 정치’는 필요하다. 기존의 하향식의 정치 방식에서 이제는 상향식의 소통 정치가 요구된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런 정치의 변화는 해외 사례에서도 나타나듯이, 유권자들의 단결과 참여가 있어야 가능하다. 이제는 국민들의 정치에 대한 관심과 참여가 중요한 이유다. 필자도 과거에는 정치에 무관심 했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필자와 같은 비정규직의 한계와 탈출은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불가능하며, 정치력이 있어야 가능하다는 걸 깨달았다. 그 때부터 정치에 대한 관심을 갖고 참여를 키워 나갔다.


‘선진형 균형 경제’란 기존의 대기업과 수출 중심 경제 운용에서 내수와 수출의 균형을 이루는 경제를 말한다. 지금 이 부분을 쓰고 2013년 10월 4일 삼성전자는 ‘10조원 돌파’라는 사상 최대의 실적을 올렸다. 이 기사가 왠지 공허하게 들리는 건 이제는 ‘trickle down effect’라는 말이 허울 좋은 껍데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대기업의 대규모 흑자는 ‘낙수효과(落水效果)’보다 ‘지수효과(止水效果)’를 가져왔다. 돈의 흐름이 흐르지 않고 멈춰버렸다. 물이 차오르면 자동적으로 물을 흘려보내는 시스템이 있으면 가능하지만, 자본주의 경제에는 그와 같은 메커니즘이 없다. 결국 그들이 갑문을 열지 않으면 부는 흐르지 않는다. 상당한 양의 물을 끌어오기 위해서는 복지 국가라는 이름의 펌프가 필요하다고 장하준 교수는 『그들이 말하지 않는 23가지』에서 말할 정도다.


‘자정형 건전 생태계’는 공정한 경쟁을 통한 소상공인, 중소기업, 대기업의 상생을 유도하자는 말이다. 세계 여러 나라의 시위와 국내 상황에서도 나타나듯이, 공정하지 않은 대기업과 금융사 위주로 짜인 현대 산업 체계는 소상공인들과 중산층의 분노를 일으키는 원인이다.


사실 경제학은 이기심을 전제로 하는 학문이기에 ‘공정’이니 ‘정의’의 개념과는 멀다. 경제학에서 말하는 ‘파레토 기준’에 따르면, 일부 계층이 사회에 있는 모든 빵을 독식해도 효율적인 자원 배분이 될 수 있다고 본다. ‘경쟁’이라는 말도 한 번 생각해볼 개념이다.


경쟁이 경쟁을 향상시키지는 않는다. 경쟁은 더 많은 경쟁을 초래하는 것이 아니라 반대로 독점이나 경제적 지대, 부당한 가치의 점유, 사기나 도둑질을 향해 움직인다. 사업가나 가장 바라는 것은 경제적 지대나 독점의 상황이고 특별한 정보를 누리는 것이다. 『무용지물 경제학, 베르나르 마리스』, 조홍식 역, 창비 2008,151


이보다 중요한 건 시스템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장하준 교수도 기회의 균등을 보장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고 말한다. 최소한의 소득, 교육 의료 혜택을 보장함으로써 최소한의 역량을 갖출 수 있는 환경을 마련해 주지 않으면 공정한 경쟁이라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이와 같은 현실을 접한 우리는 불안하다. 과연 이런 험난한 시기를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이 험악한 시기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인가. 과연 그 길은 있는가. 의문점도 든다. 솔직한 심정으로는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불안 요소가 일찌감치 사라지기를 바라고 나에게는 전혀 피해 없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제는 개인과 국가가 세계와 동기화되어 살아가는 이상 그와 같은 바람은 허락되지 않는다. 시위는 그런 불안정한 세상 속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표현의 한 방편이기도 하다. 그러나 분노의 달음질도 향방 없는 것 같으면 안 되고 싸움도 허공을 치는 것 같아서도 안 된다(고린도전서 9장 26절). 블룸버그의 컬럼니스트 캐럴라인 바움의 조언은 그런 의미에서 가치가 있다.


젊은이들이 분노할 대상을 제대로 찾고자 한다면 터프트 대학의 크리스토퍼 맥휴 교수의 강의를 들어보라고 하겠다. 정부가 은퇴한 베이비붐세대에 대한 부담을 젊은이들에게 지우려는 것, ‘세대 경제(Generational economics)’에 관한 내용이다. 이런 부채 부담은 향후 삶의 수준을 낮출 것이 분명하다. 할머니를 102세까지 부양하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을 대기 위해 생산을 위한 투자를 줄여야 한다는 의미다. 하지만 젊은이들은 오히려 이런 무제에는 관심이 없는 듯하다. 아마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 어마어마한 숫자 때문일 것이다. 오히려 은행 구제금융과 기업에 대한 특혜를 향해 분노를 발산하는 게 훨씬 쉬웠을 것이다.


분노는 가장 쉬운 화(火)의 표현이다. 그러나 때로는 즉각적인 분노보다는 잠시 화를 삭이고 곰곰이 생각해 보는 일도 필요하다. 이직할 회사도 알아보지 않고 홧김에 사원증을 던지는 일만큼 어리석은 일도 없다. 영악할 정도로 지혜로운 사람들은 반대로 그런 상황을 자신들에게 유용하도록 이용할 수도 있다. 보이지 않는 은막에 자신들을 숨긴 채, 분노한 대중들이 다른 대상에 정신이 팔린 동안 조금씩 자신들의 파이를 늘려 가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성경의 잠언은 쉽게 분노하는 태도의 어리석음을 여러 곳에서 지적한다. “노하기를 더디 하는 것이 사람의 슬기요 허물을 용서하는 것이 자기의 영광이니라”(19장 11절). “노하기를 더디 하는 자는 크게 명철하여도 마음이 조급한 자는 어리석음을 나타내느니라”(14장 29절).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 ”(16장 32절) 월가를 점령한다고 해서 상황이 크게 달라지는 건 아니다. 분노는 탐욕스러운 금융가들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던질 수는 있다. 그로 인해 조금은 변한 태도를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과 대책을 위해서는 분노보다는 지혜가 필요하다. 잠시 분노하된, 그 다음에는 잠시 그 상황에서 벗어나 객관적으로 살필 필요가 있다.


지혜롭다는 것은 마음이 어떠한 신념이나 지식, 관점에 점유되지 않은 자유로운 정신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혜는 우리의 마음이 자유로울 때만 작동하는 능력입니다. 우리의 내면에는 어떠한 지식이나 관념에도 물들지 않은 무한한 공간이 존재합니다. 지혜는 그곳에 존재합니다. 마음이 그 상태에 있을 때 우리는 변화하는 세상에 올바르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컴퓨터에 비유하자면 그 공간은 바탕화면입니다. 그곳에는 선택의 자유가 있습니다. 자기에게 필요한 적절한 기능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그곳에는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의 프로그램 안에서는 하나의 기능 이외에는 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지혜와 지식의 관계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지혜는 흡사 스토아 학파에서 말하는 지혜를 생각나게 한다. 스토아 학파는 욕정을 영혼의 질병으로 보았다. 이성의 힘을 가진 사람은 그 힘으로 욕정을 억제해야 한다고 하였다. 나를 둘러싼 모든 상황과 여건이 변해도 변하지 않는 한 가지로 ‘의지’ 꼽았다. 의지는 신이 준 ‘최고의 선물’이다. 의지는 환경을 접하는 반응을 좌지우지 한다. 의지에 때라 생각과 행동이 변한다. 에픽테토스는 애욕의 발생을 자기통제력을 강화할 기회로 본다. 그의 철학은 일종의 ‘무저항주의’로 월가를 점령하려는 시위대에게도 참으라고 말한다. 우리가 겪는 사건보다 감정이 고통을 키우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에픽테토스는 우리가 겪는 모든 사건들로부터 거리를 둘 것을 조언한다. 이런 훈련의 과정은 신과 하나가 되는 경지에 이르는 길이다. 『엥케이리디온』을 쓴 노예 출신의 철학자 에픽테토스는 ‘어떻게 할 수 없는 것’은 내려놓고,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에 집중하라고 권하는 철학이다. 그렇다고 스토아 철학이 항상 궁핍의 삶만 추구하는 건 아니다. 반대로 『명상록』을 쓴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는 알다시피 로마의 10대 황제였다. 그는 궁전에 살면서도 성인의 삶을 추구했던 철학자였다.


왠지 멀게 느껴지는 서양 철학인 스토아 철학이 있다면, 우리에게는 ‘관포지교(管鮑之交)’로 잘 알려진, 『관자』에도 이와 비슷한 가르침이 나온다. 그 책의 ‘백심(白心)’편의 내용은 마음의 함양과 심령의 정화다. 세상을 사는데 마음을 깨끗이 하는 일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는 게 ‘백심’편의 가르침이다. 백심은 첫째, 허정(虛靜) 즉 ‘비우고 고요함’으로 으뜸을 삼는다. 둘째, 그 때를 보배로 삼는다. 즉 형세를 보아 진퇴를 해야 하는 일이 마음 다스리는 일이다. 셋째는 의(儀)의 모양새를 갖추어야 한다. 허세나 보여줌 또는 소심한 마음이 없는 담담함을 말한다. ‘이것만이 심신(心身)을 보전하며 명(命)을 장구하게 한다’고 관자는 말한다. 이런 먼 나라의 이야기처럼 들리는 이야기가 어떤 유익을 줄 수 있을까. 아이러니 하게도 이런 ‘백심’의 마음은 부자들의 마음이기도 하다.


"역발상 투자의 귀재가 되면 부자가 될 수 있다. 부자들은 시장이 공포스럽게 침체되어 있는 상황에서도 긍정의 힘으로 질 좋은 사냥감을 찾는다. 부동산 가격이 떨어진다고 모두가 몸을 사릴 때도 그들은 과감히 베팅한다. 비록 지금 가격이 떨어지고 있다고 해서 미래에도 절대로 수익이 없을 거라고 섣불리 판단하지 않는다. 부자들은 모두 역발상 투자자였다. 적어도 내가 만나온 수많은 부자들은 그렇다는 말이다. 반면 부자가 아닌 사람들은 침체되어 있는 시장에서는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는다. 부자가 되고 싶다면 시장을 거꾸로 보는 습관을 가져라."


이 말은 “아무것도 바라지 말고, 죽음을 포함해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말라. 섭리에 따라 오늘 하고 있는 일에 만족하라. 그러면 나, 너, 우리는 모두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아우렐리우스의 가르침과도 비슷하다.


이제는 더 이상 자기계발서만 믿고 산다고 성공할 수 있는 세상이 아니다. 세상은 나만 잘한다고 되는 게 아니다. 우리는 상호연계 된 세상을 살고 있다. 내가 교통법규를 지켜도 음주운전자의 차에도 피해를 입는다. 금융위기에 이탈리아가 휘청거리면 이탈리아 국채를 많이 보유한 프랑스 은행이 휘청거린다. 이제는 사슬처럼 얽혀 있는 구조는 더 이상 강건너 불구경만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자기계발서 작가의 인문학 서적 출간은 이런 사실을 잘 말해 준다. 이제는 산적한 문제를 해결할 공동 지성, 집단 지성이 필요하다. 필자가 여기에 세계관을 이야기 하는 건, 바로 공동 지성, 집단 지성을 세울 토대를 만들자는 말이다. 현실을 바로 볼 수 있는 시각과 사고를 갖는 것. 동일한 가치관을 갖지는 못해도 서로 공유하고 조율 가능한 태도를 갖는 것이 세계관을 갖는 의미다.


현실을 바로 보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을 바로 보아야 한다. 지금 우리가 보고 경험하는 전세계적 위기. 또한 우기가 겪고 있는 어려움에 속에 우리의 잘못은 없었는가 반성해 볼 일이다. 탐욕스런 정치인, 탐욕스런 기업가는 탐욕스런 유권자, 탐욕스런 소비자가 키운다. 성경은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는다”고 했다. 무엇을 뿌리든 뿌린대로 거두는 게 인생의 황금률이다. 욕심으로 뿌리면 재앙을 얻을 뿐이다. 한 때 우리는 불안의 시대를 살면서 3퍼센트 대의 성장만족하지 않고 7퍼센트의 성장론에 손을 들어 주었다. 그것이 가져온 폐해를 지금 보고 겪고 있다.


참고도서


『무용지물 경제학』, 베르나르 마리스, 조홍식 역, 창비 2008

장건익, 『철학의 발견』, 사월의책,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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