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을 짜라-4-
경제학자란 무엇인가?
경제학 연구는 특별히 높은 수준의 특수한 자질을 요구하는 것 같지는 않다. 경제학은 철학이나 순수과학의 높은 수준에 비교해서 상대적으로 쉬운 학문으로 여겨지지 않는가? 하지만 훌륭한 경제학자 또는 단순하게 능력 있는 경제학자는 드문 듯하다. 이 같은 역설의 원인은 경제학자가 상당히 드물고도 당양한 자질들을 함께 갖추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경제학자는 여러 분야에서 높은 수준에 도달해야 하며 한 사람이 동시에 갖기 어려운 능력들을 종합해야 한다. 어느 정도 수준의 수학자이자 역사학자이며 정치가이자 철학자여야 한다. 기호를 이해하고 동시에 단어로 표현해야 한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특수한 것을 들여다보아야 하고 구체적인 것과 추상적인 것을 동시에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과거에 비추어 미래를 전망하면서 현재를 연구해야 한다. 인간의 본성이나 제도를 철저히 알아야 한다. 또 관심과 거리를 동시에 가져야 한다. 예술가처럼 거리를 두고 냉정해야 하며 정치가만큼이나 현실적이어야 한다.-「알프레드 마셜」
성경의 제일 첫 페이지, 창세기 1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한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짧은 한 줄의 말이지만 장엄한 전주곡이라 할 만하다. 뒤이어 2절의 연주가 이어진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영은 수면 위에 운행하시니라.
여기에 말하는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음은 비단 태초만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도 이와 같다. 전 세계는 경기 침체 가운데 있다. 얼마 전에는 자연재해로 인한 일본의 원전 사고가 있었다. 그보다 전에는 멕시코만 원유 유출 사고가 있었다. 지금도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다. 미국의 경제학자이자 문명 비평가 제레미 리프킨도 공감하는 말을 하였다.
세상은 날이 갈수록 혼돈의 와중에서 무질서해지고 있다. 어떤 일도 제대로 되어가질 않아서, 우리의 생활은 끊임없는 수리와 수선과 짜깁기의 연속이다. 위기를 넘겼다고 생각하는 순간 또 다른 사건이 벌어진다. 정부 차원에서 당장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의도에서 모종의 시책을 발표하고 나면, 그 규제 자체가 보다 큰 문제를 야기시키고 만다.
우리는 지금 불안과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전 세계가 붕괴되고 분열되어가는 지금 우리는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를 따져봐야 한다고 제레미 리프킨은 말한다. "우리 모두가 현존하는 세계관에 얽매여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계가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가를 따져본다'는 건, 세계관을 고찰하겠다는 말로 들린다. 달리 말하면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지, 우리 모두는 세계관을 갖고 살며 그것의 영향을 받고 있다. 따라서 무의식 영역 속에 있는 세계관을 의식 영역으로 이끌어 내는 작업이 필요한 셈이다.
저자에 따르면, 현재 우리들은 4세기 전 뉴턴 주의 의 '세계 기계라는 패러다임'(world machine paradigm)을 갖고 살고 있다. 현대인들이 경험하는 수많은 현대 문명의 병폐는 바로 결정론, 환원주의적인 기계론적 세계관에 바탕을 두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이제는 새로운 세계관을 요구하는 시기이고, 아인슈타인도 모든 과학의 근본 법칙이라고 했던 엔트로피의 법칙이 새 시대의 패러다임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엔트로피의 법칙은 물리학에 나오는 열역학 제2법칙에 해당한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질서가 있고 가치가 있는 상태로부터 무질서하고 가치가 없는 혼돈 상태로의 한 방향으로만 변할 수 있음을 뜻한다." 그런 점에서 볼 때, 엔트로피의 법칙은 뉴턴 주의 의 대척지에 있는 세계관이라 할 만하다.
하이젠베르크는 "원자 입자의 본성에서 볼 때, 관측이라는 바로 그 행위가 관찰대상을 고정시키고 보존하는 것이 아니라 간섭하고 변동을 가하는 것이라서 원자를 이루는 입자들을 객관적으로 관측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했다. 그의 말은 300년 동안 견고하게 지켜오던 고전 물리학의 결정론(determinism)의 판을 엎었다. 하이젠베르크는 뉴턴 과학의 골격과 그 위에 구축된 세계관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이었다. 사물을 단순히 고립되고 고정된 유형으로 관찰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것이다.
경제학도 예외는 아니다. 모든 경제학 원론의 전제조건은 '세테리스 파리부스'(ceteris paribus)라는 말로 시작한다. 해석하면 "다른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면"이라는 뜻의 라틴어 문구다. 그다음에 수요와 공급에 대한 상관관계로만 경제 체제를 설명하려 한다. 그러고 보면 경제학자들은 '독아론자들'에 가깝다. 노벨 경제학상 수상자인 스티글리츠 교수도 이를 시인했다. 그는 "미국발 경제위기는 기존 경제학의 기본 가정에 근본적인 문제가 있음을 보여줬다"라고 지적했다. 또 "경제위기가 기존 이론의 문제점을 극명하게 드러낸 만큼 보다 설득력 있는 개인과 기업 등 경제 주체들의 행동을 가정하고 이에 근거해 새로운 경제이론을 만들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금융위기는 경제학이 말하는 대로 인간이 과학적이거나 합리적인 존재가 아님을 보여줬기 때문이다.
경제학이 이처럼 아직 독아론에 머무는 이유는 그 사고의 근원이 기계적 세계관에서 온 데 있다. 특히 베이컨은 고대 그리스의 자연관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이를 가리켜 그는 '논쟁을 일삼는 지식'(contentious learning)이라 폄하하였다. 그리스의 지성들은 분명히 '어린아이의 특성을 지녔다'고까지 하였다. 그러나 베이컨에게는 그들이 방황하는 아이들로 비쳤었나 보다. 만일 그가 《파우스트》의 말을 들었더라면 생각이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작 '어린아이의 특성'을 지닌 사람은 베이컨 자신이었다. 그렇게 말한 베어컨 자신도 고전 물리학의 변혁에는 거의 공헌하지 못했다. 아마 그가 후일에 "유럽 철학은 플라톤 철학의 각주"라 말한 화이트 헤드의 말을 들었다면 뭐라 했을까 궁금해진다.
근대 철학자들은 지나치게 보이지 않는 것을 뒤로하고 보이는 것에만 치중하는 오류를 보였다. 베이컨을 포함한 근대 철학자들은 인식의 완전성을 믿었다. "세계는 인간의 인식적 조작의 대상으로 그 앞에 놓여 있으며, 인간은 세계질서를 나름대로 자신의 의도에 따라 포착한다."고 믿었다. 그 세계의 인식적 조작의 대상에는 신(神)도 포함한다.
그런데 어디 실상이 그런가. 인간이 위험에 대해 가진 정보는 유한하고 불완전하다. "경제학은 합리적이지만 현실의 개인은 행운의 확률을 과대평가하고 불행의 확률을 과소평가하며, 미래의 욕구보다 현재의 욕구 충족에 치우치는 불합리한 존재이다."고도 말한다.
서양 근대철학이 세계관으로써 가진 오류는 콘포드가 말한 "철학의 발전 단계의 역행에 있다." 고대 철학에서 발아를 시작해 중세 철학을 젖줄을 먹고 형이상학의 풍성한 열매를 맺어야 했는데 근대 철학에서는 인간이 모든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신은 흑암의 자리로 밀려났다. 땅은 여전히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는데 신이 수면 위에 운행하시는 것을 한사코 막고 있었다. 근대 철학과 이를 따르는 경제학은 히포크라테스의 말에 귀를 기울어야 한다.
2011년 10월 6일 오전 11시 30분경. 신촌의 모 대학교 상경대학의 강의실 앞에 긴 줄이 생겼다. 12시부터 시작하는 '국제 금융론'강의를 듣기 위해 아침 일찍부터 몰린 학생들이 서 있었다. 취업난에 금융위기까지 겹쳐 경제학에 대한 관심이 깊어진 이유였다. 필자도 그런 학생들의 관심에 공감이 간다. 그 계기로 경제학 서적 한 권 더 읽게 되었으니까.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경제학'도 좋진 않을 듯한데. 경제학도 중요하지만 '어떤 경제학' 중요하지 않을까. 또한 '왜 경제학'도 중요할 텐데.
그 시기에 그런 일이 있었다면 최근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2013년 9월 초에 대학에서 마르크스 경제학을 강의하는 30대 저술가가 학생으로부터 반자본주의 반미사상을 갖고 있다며 국가정보원에 신고하는 일이 벌어졌다. 그 일이 있기 얼마 전부터 필자는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관심이 가기 시작했다. 그래서 입문서로 강상구 작가의 『하이 마르크스 바이 자본주의』를 읽은 뒤였다. 비록 자본론 입문서 한 권이었지만, 자본주의의 또 다른 면을 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필자가 자본주의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다만 자본주의에 분명한 오류가 있고, 여러 번의 금융위기로 증명되었다. 그렇다고 지성의 요람인 대학에서 자본론에 대한 강의를 한다는 이유로, 또 강사가 민주노동당 간부로 일한 전력이 있다고 국정원에 고발하는 건 지성인의 도리가 아니다 싶다.
고사에 "구류(九流)를 섭렵(涉獵)"한다는 말이 있다. 구류란 유가(儒家) ․ 도가(道家) ․ 음양가(陰陽家) ․ 법가(法家) ․ 명가(名家) ․ 묵가(墨家) ․ 종횡가(縱橫家) ․ 농가(農家) ․ 잡가(雜家)를 일컫는 말이다. 따라서 구류를 섭렵한다는 말은 이러한 제자백가들의 사상이 어느 한 곳에 편중됨 없이 두루 통달해 있다는 뜻이다.
또 그 말과는 정반대의 뜻에 해당하는 '노목궤 지우위목'라는 말도 있다. '노목궤'(櫨木櫃)는 '버드나무 궤짝을 말하고, '지우위목'(指牛爲木)이란 '소를 가리켜 나무라 한다'는 말이다. 이 말의 뜻은 '옛날에 들은 것만 가지고서 상황이 변했을 때조차도 그것을 변통할 줄 모르는 지극히 융통성 없는 사람이나 행위를 가리킨다. 이와 비슷한 속담으로 '가르친사위'라는 말도 있다. 어떤 상황 변화에 대처할 줄 모르는 사람을 조롱할 때 쓰는 말이다. 버트런드 러셀의 말에서도 이와 비슷한 내용을 엿본다.
먼저 지적인 면에서, 학문적으로 다양한 의견이 있다는 점에서 젊은이들을 자극하는 것은 실질적으로 매우 중요하다. 예를 들어, 경제학을 공부하는 젊은이는 개인주의자, 사회주의자, 보호주의자, 자유무역 주의자, 통화팽창 주의자, 금본위제를 주장하는 이들의 모든 강의를 들어야 한다. 우리는 그 젊은이가 각 학파에 속한 이들이 권한 책 중에서 가장 뛰어난 것을 읽도록 격려해야 한다. 이렇게 할 때 그 젊은이는 다양한 주장과 증거를 가늠할 수 있으며, 그 어떤 의견도 절대 옳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또한 사람을 선입관이 아니라 자질로 판단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위와 같은 안타까운 일들은 학생의 잘못일까. 대학의 잘못일까. 만일 버트런드 러셀이 이 광경을 봤다면, 뭐라 했을까. 대학생들의 평균 지성이 지금보다는 과거 민주화 운동을 하던 시기에 더 높았다고 생각한다. 그 시대에 대학을 다니던 분들은 아마 지금과 같은 학문의 자유화가 부러울 것이다. 그때에 마르크스 이론을 공부했던 학생들은 감시의 눈을 피해 몰래 읽고 토론하며 지성의 힘을 키웠으니까. 반면에 지금은 학문의 자유화는 넓어졌지만 생각은 도리어 좁아졌다. 지성의 요람 대학에서 마르크스 이론을 가르친다고 정보기관에 신고한 현실을 그 사실을 잘 보여준다. 버트런드 러셀은 ‘생각이 자유롭다’는 말은, 종종 가해지는 어떤 외부적 통제에서 자유롭다는 말이라고 한다. 외부적 통제에서 자유롭기 위해서는 내부적 통제에서도 자유로워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이다.
아마도 그 학생은 마르크스는 공산주의 국가들이 맹종하는 이론이니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온당치 못한 일이라 생각했겠다. 자본주의 국가에서는 자본주의 국가에 맞는 경제학만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했는지 모른다. 그런데 경제학 안에도 다양한 학파가 있다. 정작 보수 언론이나 학자들에게 접하는 경제학은 영미의 신자유주의 경제학이다. 미국에 번영을 가져오고 평평한 세계를 가져온 경제학이 가장 완벽한 경제학 이론일 것 같은데, 그들에게 맞는다고 우리에게도 맞을까. 그도 그럴 것이 장하준 교수는 신자유주의의 기본 특징을 저투자, 저성장 고용 불안으로 꼽는다. 신자유주의 경제학은 금융 자본을 위한 경제학인데, 금융위기는 금융 자본만을 위한 경제학도 아님을 보여 줬다.
그중에서도 상위 최고 경영자만을 위한 경제학일 뿐, 그들을 믿고 돈을 맡긴 서민을 위한 경제학은 아님을 여실히 보여줬다.
필자는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 중 하나는 “의심”이라 생각한다. 일종의 회의주의자가 되는 것이다. 회의주의자도 합리적 회의주의자. 강사를 의심한 학생도 회의주의자이긴 하지만 함량을 끌어올릴 필요는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의심에의 의지’를 말하며, 우리가 가진 믿음들 이 가진 진실의 ‘함량’을 끌어올리기 위한, 실현 가능하고 널리 알려진 방법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모든 관련 사실을 확인하면서 모든 주장에 귀를 기울이며, 우리와 의견이 반대인 사람들과 대화를 통해 우리의 편향된 주장을 조정하고, 부적격 판결을 받은 가설은 거리낌 없이 포기할 수 있는 능력을 함양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 한번 히포크라테스의 격언을 떠올려보자. "인생은 짧지만 지식은 길다. 기회는 순식간에 지나가는데, 경험은 믿을 수 없고 판단은 어렵기만 하다." 이 말의 범위를 벗어나는 사람은 없다. 금융위기는 그들도 이 말에 있어 전문가들도 예외가 아님을 보여주었다. 그들의 그릇된 판단과 결정의 폐수를 탁한 공기를 고스란히 모두가 마신다. 그런 악의 산물으로부터 우리를 어떻게 보호할까. 주기도문에 있는 “우리를 시험에 들게 마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소서”라는 기도. 비신자라도 십자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만, 때로는 그대를 악에서 구하는 건 십자가보다 지성이다. 러셀은 “세상에 존재하는 악은 도덕의 부재만큼이나 지성의 부재에서 기인한다.”라고 했다. 구약성서에 있는 책, 「호세아」 4장 6절은 “내 백성이 지식이 없으므로 망하는도다”라고 했다. 지식은 바르나 편협하지 않다. 다양한 구류를 접하되 합리적으로 의심하고 생각하라. 이것이 그대를 그릇된 유혹에서 구원할 길이다. 이왕 신자유주의 경제학 이야기를 하였으니 한번 의심해보자.
자유주의자의 오래된 구호가 적용되어야 할 분야는 정신적 분야인데, 이제까지 경제학이라는 잘못된 분야에 적용이 되었다. 우리에게 ‘자유 경쟁’이 필요한 곳은 생각이지 경제가 아니다. 여기서 문제는, 경제 분야에서 자유 경쟁이 점점 사라져 감에 따라 ‘승리자들’이 자신의 경제력을 정신적 · 도덕적 분야로 확대 적용하려 하고, 다른 사라들에게 먹고살게 해 줄 테니 ‘바른’ 생각을 가지고 ’ 바르게 ‘ 살 것을 설파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불행한 일이다. 실제 여기서 ’ 바른 삶‘은 위선을, ’ 바른 생각‘은 어리석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러셀의 이 말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버트런드 러셀은 경제학자가 아니라 수학자, 논리학자, 철학자이다. 경제학자가 아닌 그가 어떻게 경제학에 대해서 논할까. 경제학을 세세하게 알지 못한다 하여도 사고할 수 있는 힘만 있다면, 어렵지 않게 전문가들이 말하는 이론의 맹점을 간파할 수 있다는 것이다. 도리어 경제학자들이 못 보는 가장 근본적인 문제도 볼 수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우리 시대의 근본적 착오는 인간 삶의 경제적 측면을 지나치게 강조하는 것이다. 따라서 인간의 생물학적 필요를 파악하지 못한 것은 그 어느 쪽도 합당한 철학이 아니라는 것을 인식해야, 자본주의와 공산주의라는 철학적 차이에서 생기는 갈등이 비로소 사라질 수 있다.
숲 속에 있는 사람은 결코 숲을 보지 못한다. 우리가 자본주의를 제대로 알려면 자본주의 밖으로 나와야 한다. 이를 객관화시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마르크스의 사상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필자가 만약 강상구 작가의 책을 읽지 않았다면 마르크스 이론의 중심축인 노동 가치설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노동 가치설을 알지 못했다면 그래서 자본가의 이윤이 노동자를 착취하고 남는 잉여가치(剩餘價値)에서 나온다는 점을 알지 못했을 것이다. 잉여 가치설에서 보니 노동자들의 임금 인상 파업이 어느 정도 공감이 간다. 그의 연구에 힘입어 오늘날 우리가 몸담고 있는 자본주의 체제의 성격을 훨씬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된 것이 사실이다. 모두가 그를 좋아하는 것은 아니나, 그가 근대사회에 끼친 영향이 지대했다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하겠다. 우리가 양단간의 적절한 자리에서 이 둘을 알려고 하지 않는다면 결코 경제학이 갖는 오류를 발견하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가 처한 문제를 해결할 길도 요원해진다. 이제 우리는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
김상근 교수는 카라바조의 뛰어난 천재성, 창조성은 성(聖)과 속(俗)을 넘나드는 이중성에서 나온다고 한다. 여기서 말하는 이중성은 인격의 이중성이 아니라 사고의 이중성이다. 단순한 사고가 아니라, 다면적 사고. 획일적 사고가 아니라 넓은 시각의 사고를 말한다. 바로 세상과 인간을 두루 헤아릴 수 있는 개방적 자세를 지닌 사람 말이다. 스티브 잡스의 통찰이 기술과 인문학을 아우른 이중적 사고에서 나왔듯이, 지금은 다각적이고 폭넓은 사고를 가진 사람을 필요로 한다. 금융위기의 해법도 굳이 경제학에서 찾을 게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경제학 밖에서 찾을 수도 있다. 경제학에 장하준 교수의 말도 이런 사실을 입증한다.
동아시아 국가들의 경험에 한 가지 가능한 해석은 경제 정책을 운용하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것은 경제학 전문 지식이 아니라 전반적인 지적 능력이라는 점이다. 대학 강의실에서 가르치는 경제학은 현실과 너무 동떨어져 실용성이 없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경제학의 무용성을 말하는 게 결코 아니다. 다만 장하준 교수의 말대로, 올바른 경제학을 배워야 한다. 올바른 경제학이란 경제학 안팎의 여러 이론들을 접해보는 것이다. 한마디로 구류섭렵이 필요하다. 비단 신자유주의뿐 아니라 필요에 따라서는 마르크스 도 끌어안아야 한다. 이렇게 자본주의를 다방면에서 다각도로 볼 필요가 있다. 금융위기가 터졌다고 국제 금융론을 배우는 것도 좋지만, 전혀 다른 분야의 관점을 취하는 게 더 유익할 수도 있다는 말이다.
학부에서 화공학을 전공한 철학자 강신주가 철학자가 될 수 있었던 바탕에는 80년대 대학을 다닌 학생들의 장점이 있어 가능했다. 대학생활의 60~70%를 인문사회 서적을 읽고 토론하는 내공이 있었다. 오늘 대학을 다니는 대학생들은 그런 점이 부족해 보인다.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가 위기를 접한 사람들의 반응을 이해하게 해 주고, 철학의 인식론이 경제학이 갖고 있는 인식론에 오류를 보게 한다. 다른 경제학, 다른 분야에 대한 지식은 그동안 우리 옳다고 여겼던 많은 전제들에 대해서 의문을 갖게 한다. 노하우(know-how)와 노홧(know-what)과 노와이(know-why)를 아우르는 단계에 이를 때, 우리는 올바른 질문과 답을 동시에 갖게 된다.
고등학교와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가르치지 않기 때문에 학생들, 더 나아가 사회가 입게 되는 손실에 대해 제대로 진단하고 대처 방안을 세우려면 아마도 책 한 권으로는 모자랄 것이다. 성찰적 사고의 윤리적이고도 지적인 힘을 망각한 국가가 앞으로 얼마나 더 번성할 수 있을지는 두고 볼 일이다. 특히 그런 나라가 세계적으로 지도적인 위치를 유지할 수 있을지는 심히 의심스럽다.
참고도서
베르나르 마리스, 조홍식 역, 『무용지물 경제학』, 창비, 2008
제레미 리프킨, 김명자․김건 역, 『엔트로피』, 동아출판사, 1995
최무영, 『서울대 명품 강의』, 글항아리, 2010
서양 근대철학 학회, 『서양 근대철학』, 창작과 비평사, 2001,
유시민,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2002,
버트런드 러셀, 김경숙 역, 『우리는 합리적 사고를 포기했는가』, 푸른숲, 2008
장하준·정승일·이종태, 『쾌도난마 한국경제』부키, 2005
이준구, 『열린 경제학』, 도서출판 삼성, p347
김상근, [인문학으로 창조하라,], 멘토프레스, 2013
장하준, 김희정․안세민 역, 『그들이 말하지 않은 23가지』, 부키
희망의 인문학 얼 쇼리스, 이매진, 20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