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이적 - 이상해

[J] 새까만 코트와 샛노랑 후드티 사이의 간극

by Jay
쓰기 위해 쓰는 휴가는 독립출판물을 만들기 위해 떠난 집필 여행의 기록입니다. [J]와 [ㅈ]가 함께 쓰는 글이라, 같은 제목의 글이 두 편씩 업로드됩니다. 에피소드 제목은 그날을 가장 잘 담은 노래이니 들으며 읽으시길 권합니다. - J


매일 외출을 하고 있다. 먹을 게 떨어졌을 때 집 옆 편의점에 가거나 배가 고플 때 밥을 먹으러 집 근처로 가는 정도. 하루에 2회 이상 외출을 하는 것 같은데, 어딜 갔었는지 기억도 안 날만큼 사소한 나들이다. 메이크업은 고사하고 선크림을 바른 적도 없다.


오늘, 휴가 중 처음으로 멀쩡히 외출이라는 걸 했다. 집에서 입고 있던 후드에 외투만 걸치고 나가다 멀쩡한 외출이란 걸 하려니 처음 화장하던 때처럼 설렜다. 며칠째 자연에 가까운 상태로 마주하던 ㅈ에게 새삼스레 잘 보이고 싶은 마음도 들었다. ㅈ이 한참 전에 준비를 끝낸 줄 알면서도 한참 거울 앞에서 시간을 보냈다.


ㅈ의 휴대폰 액정은 깨져있다. 정확히 언제부터 저 상태였는지는 몰라도 내가 기억하기로 늘 깨져 있던 상태였다. 안 그래도 심각했던 액정은 최근 ㅈ이 휴대폰을 몇 번 더 떨어뜨리고 나서 꽤 처참한 상태다. 3-4년 전쯤 내 휴대폰 액정도 그 정도로 처참했던 적이 있다. ㅈ은 깨진 액정을 그럭저럭 써보려는 것 같지만 휴대폰에서 떨어져 나온 유리 조각에 손과 다리를 몇 번 베인 추억이 있는 나는 ㅈ을 꽤 꾸준히 닦달해왔다. 그리고 마침내 오늘, ㅈ이 휴대폰을 고쳤다. 간만에 제대로 꾸민 ㅈ과 나. 깨끗이 교체된 휴대폰은 오늘과 잘 어울렸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차려 입고 향한 곳은 내가 아직 ㅈ에게 소개한 적 없는 카페였다. 조용해 도서관 느낌마저 나는 그곳에 앉아 그간 꿈나라 여행을 하느라 더뎌진 집필 진도를 만회하려고 글을 썼다. 우리 자리 맞은편 벽에 TV가 세 개나 나란히 붙어 있어 눈이 시렸지만, ㅈ과 나는 꾹 참고 글 두 개를 마쳤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옆에서 함께 걷는 ㅈ은 아까 집을 나설 때처럼 멀끔하고 단정했다. 얼마 전에 새로 산 까만 코트와 내가 선물한 회색 울 머플러는 볼 때마다 뿌듯한 케미를 자아낸다. 며칠간 못 보던 ㅈ의 멀쩡한 모습은 새로웠다.


그 멀쩡한 모습이 신데렐라 마법처럼 풀려버린 건, 무려 글을 두 개나 쓴 스스로에 대한 포상으로 밤늦게 치킨을 주문한 후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다. 잠시 한숨 돌리는 사이 ㅈ은 이미 까만 코트와 회색 울 머플러를 벗어나 요즘 늘 집에서 입고 있는 병아리색 후드 속으로 쏙 들어가 있었다.


이상하다. 내가 알던 ㅈ은 완전 달랐는데.



첫 출근을 했던 날, 회사에서 처음 만난 인간 두 명 중 하나가 ㅈ이다. 이름도, 나이도, 정체도 불분명하던 그때부터 이렇게 가까워지기 전까지, 내가 ㅈ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단어는 neat 였다. neat만큼 적절한 단어가 생각나진 않지만 굳이 한국말로 바꾸면, 잘 정돈된 인간 정도랄까. 단정하게 정리된 새까만 직모에 늘 군더더기 없는 옷을 입고 다니던 ㅈ은 말도 없고, 가끔 하는 말도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말을 잘 하지 않지만, 할 때는 머릿속으로 세 번쯤 거르고 걸러 선택한 단어들로 조심스럽게 문장을 만들어내는 것 같았다. 내가 정의한 ㅈ은 좀처럼 빈틈을 보이지 않는다. 아니, 않았다.


ㅈ도 집에서는 추리닝을 입는다. 이상한 무늬가 있는 ‘집안일 전용’ 냉장고 바지를 입고, 지금처럼 말도 안 되는 병아리 색깔 후드티도 입는다. ㅈ의 집에 놀러 가는 날은 그 병아리 색깔 후드티를 입고 지하철 역까지 마중을 오기도 한다. 가까워진 후, 그러니까 내가 ㅈ의 집에서 오후 늦게까지 바닥에 붙은 껌처럼 널브러져 있기 시작하면서 보기 시작한 ㅈ의 모습은 그렇다. 머리가 마구 헝클어져 있는데, 본인만 모르고 지낼 때도 있다. 염색과 파마끼가 조금 남은 지금의 머리는 ㅈ이 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새까만 직모와는 대단히 다른 분위기라, 조금이라도 헝클어지면 난장판이다. 모든 게 정돈된 채로 지낼 것 같았던 ㅈ은 가만히 보면 빈틈 투성이다.


내가 좋아했던, 그래서 오늘도 퇴근할 때 나랑 같이 좀 걸어가 줬으면 생각했던 ㅈ은 늘 그 정돈된 모습이었는데. 나는 그 모습을 참 좋아했는데. 앞에 샛노랑 후드티를 입고 머리가 헝클어진, 정돈됨이라고는 코트와 함께 옷걸이에 걸어둬 버린 ㅈ이 실실 웃고 있다. 그런데 이젠 이 모습도 참 좋다. 옷을 갈아입느라 지금도 제멋대로인 머리를 더 엉망으로 헝클어트리고 싶다. 그래도 잘 어울릴 것 같다. 이상하게.



그냥 걷기만 하는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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