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 최선주 [특이점의 예술]
p.9
사실 우리는 기술 변화에 따라 달라진 예술을 지속적으로 접하고 있었다. 예컨대 발명 초기 사진은 예술과는 거리가 먼 과학 기술의 산물이었다. 당시 많은 예술가, 학자는 사진을 그저 기록물을 위한 것으로 바라볼 뿐 예술로 인정하기를 거부했다. 그러나 사진이 담아내는 뚜렷한 현실 이미지는 재현에서 벗어난 현대 매술의 시작을 촉구했고, 그 결과 회화와 다른 사진만의 예술성이 인정받을 수 있었다. 컴퓨터도 처음에는 그저 전쟁용 계산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컴퓨터의 대중화는 기존 아날로그 이미지와 전혀 다른 방식의 이미지 생산을 가능하게 했다. 그 결과 우리는 컴퓨터를 이용해서 손쉽게 현실에 존재하지 않는 이미지를 만들고 공유한다. 이처럼 기술의 등장은 예술의 매체를 변화시켰고, 이 변화에 따라 예술의 형태와 의미가 달라졌다. 그뿐만 아니다. 기술이 변하자 예술을 평가하는 기준과 작품을 통ㅇ해 얻는 미적 경험까지도 변화했다. 새로운 기술의 등장이 예술의 범위와 의미를 바꾼 것이다.
p.16
인간은 과연 특별한 존재인가
신이 자신의 모습을 본떠 인간을 만들었다는 신화를 한 번쯤 들어 봤을 것이다. 신화에서 신은 인간의 원본, 인간은 신의 모사품이다. 원본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사품이고, 일반적으로 모사품은 원본에 비해 질이 떨어진다. 이러한 이유로 신의 손길이 닿은 자연적인 것은 아름답고 조화로운 것으로 여겨지는 반면, 인간이 만들어 내는 인공적인 것은 조작한 것, 부정적인 것으로 간주됐다.
이러한 대립의 근원은 서양 고대 철학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에게 현실은 이데아를 모방한 세계였으며, 인공물은 그런 현실을 모사한 질 낮은 것이었다. 모사품인 인공물은 결코 원본인 자연을 넘어설 수 없다는 것이 플라톤의 생각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역시 세계에는 위계질서가 있다고 보았다. 그는 자연적인 생성에는 무엇이 되고자 하는 목적이 내재되어 있지만 기술적인 생성은 그 목적이 명확하지 않다고 했다.
근대에 이르러 자연과 인공의 대립은 인간과 기계의 대립으로 구체화되었다. 이를 근대의 철학적 문제로 이끌었던 인물은 르네 데카르트다. 데카르트는 인간 외의 모든 동물은 기계라고 정의했다. 인간이 기계와 다른 점은 바로 모든 상황에 적절히 대처할 수 있는 도구, 이성을 갖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고민하고 생각하는 것은 이성을 지닌 인간만의 고유한 특성이며, 인위적으로 만든 인공물에는 결코 이성을 주입할 수 없다는 것이 그의 의견이었다. 다시 말해 데카르트에게 생각하는 기계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있어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한 세기 뒤 인물인 라 메트리는 데카르트를 비판하며 논의를 확장했다. 프랑스 출신의 라 메트리는 의사이자 계몽주의 시대의 첫 유물론자로 꼽히는데, 데카르트와는 반대로 인간도 기계이며 본빌적으로 동물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는 당시의 과학 실험에 근거해 인간 역시 하나의 자동인형, 스스로 태엽을 감는 기계라고 주장했다.
지금 들어도 파격적인 라 메트리의 주장이 그 당시에 받아들여질 리가 없었다. 심지어 교회는 그의 책 <기계-인간>을 불태워 버리기까지 했다. 그 충격 때문인지라 메트리는 요절했지만, 기계와 인간에 관한 그의 주장은 막 깨어나는 근대 지식인의 상상을 자극했다. 라 메트리의 주장은 후대의 유물론이나 기계 역학 같은 과학 분야에 영향을 끼치며 일반 문화 안으로 퍼져 나갔다.
p.27
많은 작가들이 사이버네틱스 예술을 기계와 컴퓨터를 사용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관객과 예술 자굼 사이의 피드백에 중점을 두고 이를 해프닝happening이라는 예술의 형식으로 발전시킨 예술가들도 있었다. <4'33''>을 작곡한 존 케이지가 그렇다. 이 작품이 유명한 이유는 존 케이지가 4분 33초 동안 아무것도 연주하지 않기 때문이다. 관객은 작가가 제공하는 음악의 우발성에 적응하고 자신이 처한 환경 속에서 효과적으로 작품을 감상한다. 1단계 사이버네틱스의 특징인 정보 교환, 그리고 인간(관객)이 환경에 적응한다는 원리가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다.
2단계 사이버네틱스 예술의 핵심은 비물질성을 활용한 관객과 매체 간 작동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중요한 매체로 등장한 것이 바로 비디오였다. 비디오는 일대일 개인 매체인 동시에 쌍방향 소통이 가능한 상호 매체이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대표적인 작가는 한국을 대표하는 예술가, 백남준이다. 소리가 백남준의 <참여 TV>는 관객이 마이크를 통해 내는 소리가 TV 화면 속에 그래픽으로 나타나는 작품이다. <참여 TV>라는 작품의 제목처럼 관객의 목소리는 파동이라는 정보가 되어 화면에 나타난다. <모빌>처럼 물리적인 바람, 움직임은 아니지만, 관객과 비디오 사이에는 비물질적인 피드백 과정이 있다. 다시 말해 비디오는 모니터에 투사된 이미지와 주체 사이의 간격을 없애 관찰자의 위치를 작품에 참여하는 주체로 변환시킨다. 이 작품에서 관객은 창조의 주체이며, 동시에 감상의 주체다.
3단계 사이버네틱스 예술에서는 물질적 대상을 정보 패턴으로 해석하기 시작하면서, 인공 생명artificial life이 중요한 주제로 떠올랐다. 인공 생명은 생명체의 정보를 해석하여 인공적으로 생명체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인공지능의 목표가 인간과 구분할 수 없는 지능ㅇ르 기계 안에 만드는 것이었다면, 인공생명의 목표는 생물이 스스로 찾아낸 경로를 통해서 기계 지능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예컨대 플루트를 연주하는 자동 인형이 인공지능의 구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다. 인공 생명을 만들려고 하는 움직임은 장차 바이오 아트와 사이보그 아트cyborg art로 이어진다.
MIT 인공지능 연구소의 로드니 브룩스는 세상 자체가 최고의 모델이라는 믿음으로, 인식과 행동을 통해 세상과 직접 연결되는 로봇을 꿈꿨다. 그는 인간의 특성을 환경과의 상호 작용으로 파악했고, 인공지능보다 인공 생명이 인간의 미래에 더 큰 영향을 끼칠 것이라 보았다. 그러나 사실상 브룩스가 인공 생명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현대적 인공지능에 가깝다. 오늘날의 인공지능은 환경과의 상호 작용을 통해 필요한 것을 직접 배우기 때문이다.
사이버네틱스 이전까지 예술의 역사는 기술을 지워 나가는 과정이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예술이라고 생각하는 회화, 조각, 음악, 시, 무용에 기술적 활동이 없다는 것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사이버네틱스 예술은 기술과 예술 사이의 벽을 무너뜨렸고, 인간과 기계를 동일하게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을 만들었다. 사이버네틱스는 새로운 기술 매체인 인공지능에게 창작 가능성을 열어 준 기술적, 철학적 토대다.
p.36
인공지능 번역은 문자 그대로의 의미를 이해하는 자동화의 대표적인 예다. 구글 번역은 신경망 기계 번역 시스템을 사용한다. 예전에는 문장을 구phrase로 나누고, 구 구를 개별적으로 번역한 뒤 합치는 방식이었다면, 새로운 신경망 시스템은 문장 전체를 한 번에 번역한다. 인공지능 번역은 기존보다 오류를 평균 60퍼센트 정도 줄였을 뿐만 아니라 사용자가 더 많이 사용할수록, 즉 데이터가 더 많아질수록 더 정확한 번역을 제공한다. 유행어나 은어를 번역할 수 있는 것도 이 시스템 덕이다.
그러나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향상된 번역의 수준이 아니라, 신경망 번역 시스템 내부에 만들어지고 있는 자체 언어interlingua다. 구글의 개발진은 이를 제로 샷Zero Shot 번역이라고 정의했다. 예를 들면 한국어-영어를 번역할 수 있는 데이터와 영어-일본어를 번역할 수 있는 데이터가 있다면, 한국어-일본어 번역은 별도의 데이터 주입이 없어도 가능하다. 인공 신경망 내부의 형상을 보면 같은 뜻을 가진 문장이 같은 색으로 표시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인공지능이 단순히 문자 대 문자의 번역을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문장의 의미론semantics으로 접근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인기 언어를 구성하는 자체적인 능력을 가진 것이다.
p.38
창작의 과정이 자동화되면서 떠오르는 문제는 누가 창작의 주체냐는 것이다. 앞서 마노비치는 자동화로 인간이 의도가 없어질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이와 비슷한 문제 는 과거에도 제기됐다. 초기 사진술을 뜻하는 헬리오그래피 heliography를 글자 그대로 해석하면 빛이 그려 낸 이미지다. 인간의 손을 거치지 않았다는 의미다. 사진이 처음 발명되었을 때, 사람들은 필름에 이미지를 찍어 내는 역할을 빛, 즉 자연이 한다고 생각했다.
사진이 등장하고 나서 손으로 일일이 인화를 해야 했 던 노동은 사라졌다. 하지만 사라진 것만 있는 것은 아니다. 창작자가 구도나 상황을 선택할 수 있는 시간과 기회는 늘었다. 사진의 등장 이후, 예술가는 새로운 표현 방법을 고민했고, 그 결과로 인상주의 그림처럼 단순 재현에서 벗어난 그림이 등장했다.
《워싱턴 포스트》의 자체 인공지능 헬리오그래프Heliograf는 2016년 850건의 기사를 자동으로 발행했다. 그중에는 50만 건 이상의 클릭 수를 기록한 기사도 있었다. 인공지능 알고리즘이 기사를 작성하는 것은 헬리오그래피에서 빛이 이미지를 그려 내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헬리오그래프는 정확한 정보를 토대로 간단한 내용을 구상하는 것에 그치기 때문 에 인간 기자는 인공지능의 기사를 토대로 분석을 더해 기사 작성을 마무리한다. 인공지능은 인간 기자의 일을 뺏은 것이 아니라 다른 가능성을 열어 줬다.
p.41
분명 넥스트 렘브란트의 그림은 렘브란트 그림의 모사품이 아니다. 그러나 눈을 그리는 방법, 선호하는 색상, 물감 두께 등 렘브란트의 모든 스타일을 담고 있다. 이렇게 한 미디어 (렘브란트)가 다른 미디어(인공지능)에서 나타나는 것을 재매개라고 한다. 재매개는 철학자 제이 데이비드 볼터Jay David Bolter와 리처드 그루신Richard Grusin이 제시한 개념으로 뉴 미디어를 이전 미디어와의 상호 관계 속에서 분석한 것이다.
볼터와 그루신은 매체의 변화도 재매개로 보았다. 자료에 접근하는 수단이 변하면 그로 인한 경험 또한 달라진다. 예를 들면 렘브란트를 구글에 검색해서 나오는 고화질 jpg 파일이 실제 그림과 똑같다고 해도 그 그림을 보는 우리의 경험은 미술관에서 실제 그림을 관람하는 것과 다르다. 해당 파일이 암스테르담 국립박물관에 있는 실제 렘브란트의 그 재매개인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 창작에서 발견되는 재매개는 과거의 예술 작품과 형태적 유사성만 가지는 것은 아니다. 넥스트 렘브란트의 작품은 실제 렘브란트의 작품과 차이를 느끼기 힘들 정도로 비슷해 보이지만, 명백히 새로운 창작물이다. 인공 지능의 재매개와 기존의 재매개 간 차이는 바로 여기서 발생한다. 인공지능은 작품 자체가 아닌, 창작 과정 그리고 창작 주체인 인간을 재매개한다.
인공지능이 인간의 창작 과정을 재매개할 수 있는 이유는 창작 알고리즘 때문이다. 예컨대 원근법은 시각을 자동화 하기 위한 알고리즘이었다. 원근법을 이용하여 2차원의 회화 안에 3차원의 대상을 담을 수 있었다. 컴퓨터가 등장하면서 원근법은 컴퓨터 그래픽과 컴퓨터 비전의 토대가 되었다. 컴퓨터 비전은 인간의 시각을 알고리즘이라는 형태로 분석함으로써 인간의 시각을 재매개한다.
창작 과정에서 인간은 감각 기관으로 데이터를 받아들인 후, 뇌에서 분석한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손이라는 출력 시스템을 거쳐 작품을 완성한다. 창작을 위해서는 반드시 인풋input 데이터가 있어야 하고, 뇌 속의 창작 알고리즘을 거쳐 아웃풋output, 작품이 탄생한다. 이것이 일반적인 창작 과정이긴 하지만 우리는 뇌 속의 분석 시스템과 생성 시스템 속에 어떤 알고리즘이 있는지는 설명하지 못한다.
p.45
인공지능의 의지
인간의 모든 행동에는 자유 의지가 선행된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선택하고 조합하기 위해서는 먼저 프로그래밍이 필요하다. 무엇을 하려는 의지나 욕망을 기계에 주입하는 일은 아직 불가능하다. 인공지능의 창작 행위는 예술 의지가 아니라 설계자의 결정을 따른 것이다. 인간과 인공지능이 결코 같아질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인간의 예술이 인공지능 창작물보다 우위에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과 인공지능의 창작에는 공통점도 있다. 미지의 영역, 불투명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인지 과학자이자 컴퓨터학자인 더글러스 호프스태터Douglas Hofstadter는 “인간 역시 자신의 심상이 어디서 오는지 정확히 알 수 없고, 선택과 조합의 무한한 가능성 앞에서 무력할 뿐”이라고 말했다.
다음은 그가 자신의 저서 《괴델, 에셔, 바흐: 영원한 황 금 노끈에서 설명한 것이다. 어떤 작가가 마음속에 떠오르 는 이미지와 관념을 전하기 위해 붓을 들었다고 가정해 보자. 그러나 작가는 그 이미지와 관념이 마음속에서 어떻게 조화를 이루는지 명확히 알지는 못한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 방식으로, 다음에는 저런 방식으로 바꾸기도 하면서 다양한 표현 방식을 실험해 본다. 그리고 최종적으로 어떤 방법을 정해 그림을 완성한다. 작가는 이 모든 것이 마음속 어디에서 왔는지 모른다. 여러 방식을 실험해 보며 그 이미지를 가장 잘 표현하는 법을 어렴풋이 알게 된 것뿐이다.
컴퓨터 프로그램도 마찬가지다. 프로그램에 주입되어 있는 정보와 그렇지 않은 정보 사이에서 결과물이 나온다. 아 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미묘한 균형이 유지된다면 우리는 프로그램을 인간과 동등한 의미에서 작가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호프스태터는 자유 의지를 “자신이 어떻게 작동하는지에 대해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일종의 직관적인 감각” 으로 정의했다.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의 균형으로부터 자유 의지가 발생한다고 본 것이다.
창작하는 인공지능으로 주목받았떤 구글 딥드림은 합성곱 신경망을 이용해 이미지의 패턴을 분석하고, 분석한 이미지에 다른 이미지를 합성해 새로운 이미지를 만들어 낸다. 사용자는 입력 데이터가 되는 사진을 딥드림에 넣지만, 결과로 나올 그림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정을 할 수 없으며 결과물이 왜 그렇게 나왔는지도 모른다. 인간과 인공지능 모두 창작을 위해 일련의 알고리즘을 따른다. 이는 알고리즘 안에는 스스로 명확히 설명할 수 없는 자유 의지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행위의 범주를 창작을 좁힌다면, 자유 의지는 곧 예술 의지로 이해할 수 있다.
p.48
여기서 중요한 것이 순환성, 즉 반복이다. 마투라, 바렐라는 개체 발생을 "반복적인 질서에 끊임없이 변화하며 수행되는 창조적 진화" 라고 말하며 반복을 생명의 본질로 파악했다. 반복은 인공지능 창작의 중요한 특징이자 다른 기술 매체와의 차이가 드러나는 지점이다.
과거 창작의 반복은 노동의 반복을 뜻했다. 같은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서는 똑같은 행위가 반복돼야 했다. 반복이 완벽히 똑같은 창작물을 보장하지도 않았다. 19세기 초에 등장한 석판은 이미지를 반복적으로 생산할 수 있는 기계나 마찬가지였다. 석판은 신문의 삽화 같은 일상의 모습을 빠르게, 그리고 많이 그림으로 담아내며 이미지를 대중화했다. 사진의 발명은 동일성을 보장하는 무한한 반복 창작을 가능케 했다. 1950년대 컴퓨터가 창작의 과정에 들어오면서 반복적인 이미지는 더 쉽고 빠르게 제작될 수 있었다. 초기 컴퓨터 예술 은 컴퓨터의 기술적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 일부러 반복적인 선이나 도형을 주로 사용했다. 그동안의 반복에는 어떠한 차이도 발생하지 않았다. 그리고 그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었다. 사진을 인화할 때마다 결과물이 매번 달라진다면 필름이 수명을 다한 것이고, 컴퓨터에서 복사한 것과 붙여 넣은 내용이 다르면 컴퓨터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인공지능의 반복은 다르다. 반복을 통해 학습하 고 최상의 결과를 찾아낸다. 알파고를 개발한 구글 딥마인드는 딥러닝과 강화 학습을 결합한 방법으로 인공지능의 게임 플레이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보여 주는 연구를 발표했다. 인공지능은 아무런 규칙없이 벽돌 깨기 게임을 시작한다. 처음 몇 번은 계속 공을 놓친다. 100회 반복했을 때는 단순히 공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학습을 반복할수록 공이 오는 지점을 예상해 공을 놓치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600회를 반복하면, 가장 빠르게 점수를 얻는 방법을 깨우친다. 바로 한쪽 벽에 구멍을 만들고 그 사이로 공을 넣어 벽돌을 단번에 없애는 것이다.
p.67
오랫동안 미술사에서는 창작을 이야기할 때 작가의 의도를 가장 중요한 요소로 여겼다. 인간이 아닌 다른 개체가 창작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주장이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각기 다른 작가의 의도가 반영된 창작 과정을 결코 일반화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론이 등장한 1960년대 중후반부터 미니멀리스트들의 작업을 통해 작가의 의미가 변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작품의 제작 방식을 탈개성화’ 했는데, 이에 따라 작가의 의도보다는 작품과 관람객, 공간과 맺는 상호 교환이 중요해졌다. 작가를 축출하자 알고리즘만 남았다. 이제 창작은 작가 외부에서도 발생할 수 있는 일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예술과 기계를 미학적으로 연결한 인물은 솔 르윗Sol LeWitt이었다. 그는 독단적이고 변덕스러운 주 관성을 제거하기 위해 미리 설정한 방법(프리셋, Preset)으로 작업하는 것을 제안했다. 이제 예술가는 문제 해결을 좌우하 는 기본적인 형태와 규칙, 다시 말해 알고리즘을 설정하는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된다. <벽 드로잉 #150, 여섯 개의 벽 각각에 고르게 분포된 1인치 선 1만 개>는 솔 르윗이 쓴 지시문에 따라 조수들이 만든 작품이다. 분명 솔 르윗이 미리 설정한 방 법에 따라 조수가 작업했지만, 미술사가 조명한 건 작가인 솔 르윗과 그가 만든 개념뿐이었다. 작가의 주관성에서 벗어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조수는 알고리즘을 실행만 할 뿐 스스로 결정하지 못한다는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솔 르윗과 코헨의 차이다. 솔 르윗의 작업에서 작가의 주 관성이 사라질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작가가 조수의 창작을 완전히 지배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반면 코헨은 아론의 창작을 완전히 지배할 수 없다. 솔 르윗이 창작 과정을 알고리즘화해 제거하고자 했던 주관성을 코헨은 아론과 나눠 가졌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인간과 인공지능의 상호 매개 가능성이 열린다. 상호 매개란 창작 과정에서 인간과 기계가 연합해 결정하는 것이다. 상호 매개를 위해서는 인간과 기계가 미리 결정된 대로 작동만 잘하면 되는 게 아니라 서로 소통할 수 있는 열린 상태여야 한다. 창작을 위해 서로가 필요한 코헨과 아론이 그랬다. 하지만 솔 르윗의 조수는 알고리즘을 벗어날 수 없는 닫힌 상태의 기계에 불과했다. 프랑스의 기술 철학자 질 베르 시몽동은 닫힌 상태에 있는 기계는 피상적인 결과물을 제공하지만, 열린 상태의 기계는 기술적 앙상블을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바로 이 기술적 앙상블을 통해 인간은 기존의 한계를 넘어설 수 있다.
p.74
〈그리는 손〉은 인공지능 프로그램뿐 아니라 인간의 뇌에서 발생하는 '기호의 뒤엉킴'을 상징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생각할 때, 뇌 속의 모든 기호는 위계질서 없이 상호 작용한 다. 그리고 두 손이 서로를 그리는 상황이 담긴 에셔의 손처럼, 뒤엉킨 계층 질서 표면 아래에는 무수히 많은 뉴런과 수십 억 개의 세포, 그것을 잇는 수천억 개의 신경 돌기로 이루어진 말 그대로 엉킴이 존재한다. 우리가 그리는 손을 그린 에셔 의 존재를 잊으면, 그림 속 손들이 스스로 그려진다는 착각에 빠지게 되지만 에셔의 존재를 떠올리면 두 손의 모순적인 형태를 이해할 수 있다.
〈비현실 초상화〉에 사용된 생성자와 판별자 두 인공지능을 에셔의 〈그리는 손〉속 오른손과 왼손에 빗댈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작가인 타이카가 그림 밖에 존재하는 에셔와 같은 위치에 놓이게 되는 것일까? 물론 타이카는 인공지 능 알고리즘을 만든 핵심적 주체다. 그러나 작가도 어디까지 나 그 구조를 만든 개체일 뿐이다. 데이터가 되는 사진도 이미지 생성을 위한 중요한 부분이지만 그것만으로 보이지 않는 층위를 설명하기 부족하다. 그러므로 그림의 창작에 참여하는 주체는 작가인 타이카, 두 인공지능, 플리커의 사진 데이터, 그리고 이전에는 보이지 않았던, 스크린 너머의 관찰자, 모두라고 할 수 있다.
작품 속 얼굴들은 결코 특정한 관찰자를 똑같이 닮을 수 없다. 관찰자는 구조 밖에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 관찰자는 〈그리는 손〉을 그린 에셔의 손과 일맥상통한다. 그렇다고 관찰자와 작품의 얼굴을 완전히 분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관찰자도 이 작품이 만들어지는 환경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관찰자의 얼굴은 상상 속 인물과 완전히 다르지는 않지만, 결코 상상 속 인물이 닮지 못할 새로운 얼굴이다. 구조 밖에 있는 관찰자는 이 작품에 창의성을 더한다.
중요한 것은 네트워크다. 네트워크는 그 자체로 자기 생산성을 지닌 환경이다. 작가, 인공지능, 그리고 플리커에 자신의 사진을 올린 사람, 이미지를 보는 관찰자가 모두 네트워크로 연결된다. 이 연결은 각자의 주체성을 보장하지 않으며, 오히려 서로를 섞고 혼합한다. 그리고 이에 따라 네트워크 또한 재생성된다. 이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이 비인칭적 주체, 다시 말해 '누구라 칭할 수 없는 누군가'가 탄생한 것이다. 타이카의 〈비현실 초상화〉에서 작가, 인공지능, 관찰자는 모두 동등하게 작업에 참여했다. 인공지능은 이미 창작의 주체다.
p.81
기억한다는 건 그 자체로 내가 나일 수 있는 이유다. 하지만 인간은 자기 자신의 바깥에도 기억을 저장해 왔다. 역사상 등장한 거의 모든 기술 매체는 기억을 외부에 저장하고 드러내는 외재화externalization 작업을 수행한다. 동굴 벽화, 붓과 종이, 사진술, 영상, 컴퓨터 메모리가 대표적인 예다. 지금 까지의 외재화는 한 가지 범위에만 국한됐다. 사진은 한순간의 기억을 외재화한 것이다. 영상도 기억 전체를 기록하고 표현할 수는 없다. 인공지능은 단순 저장을 넘어 새로운 기억을 재구성한다. 그렇다면 인공지능은 기억의 주체인가? 스스로의 기억을 만드는 인공지능과 나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을까? <i_Remember>는 기억이라는 개념 자체를 인간의 외부로 확장해야 할 시기가 왔음을 시사한다.
p.87
그들의 능력
우리의 능력 구글 브레인의 컴퓨터 과학자이자 미디어 아티스트인 수파손 수와자나콘의 신서사이징 오바마〈Synthesizing Obama: Learning Lip Sync from Audio〉는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의 연설 장면을 담은 영상이다. 그런데 이 영상은 인공 신경망 기 술로 오바마의 연설 장면에서 입술과 턱의 움직임, 치아의 세 밀한 부분까지 분석해 합성한 가짜다. 제작 과정이 담긴 공개 영상으로 이 작품이 가짜 동영상이라는 사실을 확인한 뒤에 보아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진짜 같다. 흥미로운 작품이라고 생각하기 이전에, 기술에 대한 두려움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인공지능이 인간을 지배하는 공상 과학 소설 같은 미래보다 더 경계해야 할 것은 가짜 뉴스가 판을 치고, 무엇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알 수 없는 코앞의 미래다.
수와자나콘이 가짜 영상을 만든 것은 인공지능의 위험성을 공론화하기 위함이었다. 나아가 그는 가짜 콘텐츠를 구 별하는 플러그인을 개발하고 있다고 밝혔다. 포토샵으로 손쉽게 가짜 사진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다. 이제는 영상, 그리고 목소리까지 가짜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다. 그래서 작가는 인공지능이 어디까지 가능한지 아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한다. 알아야만 올바르게 사고하고 비판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다.
인공지능과 예술의 만남이 초래할 세상이 유토피아일 지 디스토피아일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인공지 능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발전하지 않도록 제어하는 일은 몇 명의 컴퓨터 과학자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예술은 발전된 기술 자체를 보여 주는 것뿐 아니라 발전하는 기술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는 비판적 시각을 키우는 역할을 한다. 새로운 예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야 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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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인류가 지구의 모습을 본 순 간부터 지구가 무엇인지 정의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거울 단계는 프랑스 철학자 라캉이 정의한 개념으로 생후 6개월에서 18개월 사이의 어린아이가 거울에 비친 모습을 자신이라고 믿기 시작하는 단계를 말한다. 엄마와 자신을 하나라고 생각해 왔던 아이는 거울을 보면서 '아, 나는 엄마와는 다르게 생겼 구나' 하고 처음으로 자신을 인지한다. 한 사람의 세계는 자신 과 자신이 아닌 것을 구분할 수 있을 때 마침내 시작된다. 거울 단계는 곧 성장의 증거다. 그렇다면 인류의 거울은 무엇일까?
이 책은 위 질문에서 출발했다. 거창한 질문에 답을 내리는 일이 가능할지 모르겠다. 분명한 건, 인간은 끊임없이 자신의 모습을 확인하고 정의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기술 에 비추려는 노력은 오래전부터 있었다. 그러나 인공지능은 다른 기술 매체와는 달리 최초로 인간 지능을 벗어나고 있다. 현재 인공지능 연구는 인간의 뇌를 다각도로 연구해 최근에는 감정이나 자의식의 발현 원인까지 찾아내려 하고 있다.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기 위해서다. 이 과정에는 기술적 접근 외에 도 철학, 인문학 등 다채로운 사유가 요구될 것이다. 인공지능 개발자가 아니더라도 인공지능 연구를 주목해야 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