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 츠지 히토나리 [냉정과 열정사이 - Blu]
p.22
그리고 제 3기. 너무 오래 살아 버린, 그래서 과거의 영광도 사라지고 사멸해 가는 명화를 현대의 복원사들이 혼을 불어넣어 다시 살려 내는 단계.
내 일은 이 제 3기에 위치해 있다. 사라져 가는 명화들을 어떻게 하면 제 1기에 가까운 상태로 되살려 내는가 하는 것이다. 나의 의식을 과거로 돌려, 화가가 어떤 생각으로 그 그림을 그렸는지 상상하는 데서 모든 것이 시작된다. 화가에 대해 철저히 조사한다. 때로 그 인물 자신이 되어 그림을 그리듯이 복원해 간다.
그것은 마치 사자를 되살리는 듯한 작업과도 같다. 화가가 캔버스를 빌려 생명의 숨결을 되살려야 한다는 것을 가슴에 새기면서.
내가 복원한 작품이 천 년 후에도 또 다른 누군가의 손에 의해 복원될 것이라는 상상을 하면, 가슴이 뜨거워진다. 천 년 후의 사람들에게, 나는 배턴을 건네 줄 임무를 맡고 있다. 내 이름은 후세에 남지 않지만, 내가 품었던 뜻은 확실히 남겨질 것이다. 내가 되살려 낸 명화의 생명이 또다시 후대 사람의 손에 의해 더 먼 미래로 이어져 가는 것을 꿈꾸어 본다. 그것이 지금 내 삶의 의미이다.
p.50
"자아, 이 거리를 잘 봐. 이 곳은 과거로 역행하는 거리야. 누구든 과거를 살아가고 있어. 근대적인 고층 빌딩은 눈을 씻고도 찾아볼 수 없잖니. 일본의 교토만 해도 새로운 빌딩이 있잖니. 파리도 그래. 그렇지만 이 곳은 중세 시대부터 시간이 멈춰 버린 거리야. 역사를 지키기 위해 미래를 희생한 거리."
나는 광장을 휙 둘러보았다. 확실히, 여기에는 새로 지은 건물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낡은 건물의 외관을 그냥 그대로 남겨 두고 있다. 역사적인 미관을 손상하지 않도록 도시 전체가 보호받고 있다.
"거리 뿐만이 아냐. 여기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좀 과장해서 말하면, 이 거리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해야만 해. 젊은이들에게 새로운 일거리가 없어. 우리처럼 문화재를 지키는 일이라든지, 관광업뿐이지. 게다가 터무니없이 비싼 세금 대부분이 이 거리의 복원에 충당되고 있어. 거리는 세월이 갈수록 노화되어가지. 복원해도 여전히 무너져 내려. 겨울은 춥고, 여름은 덥고. 그래도 이 곳 사람들은 과거에서 살기를 원해. 적어도 미래 따위는 없으니까, 희망 제로가 아닌 미래라도 있으니 쥰세이는 행복한 거야."
p.119
"아직 정해진 건 아냐. 그렇지만 그것도 하나의 방법일 게야. 일단 도쿄로 돌아가서 태세를 다시 갖추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지. 마음이 흔들릴 때는 한번 방향을 바꿔 보는 것도 괜찮아. 그 얼굴, 나는 흔들리고 있습니다, 라고 적혀 있어. 그런 얼굴로는 절대 일을 못해. 네 방은 옛날 그대로 있으니까, 언제든 돌아와."
할아버지는 그런 말을 남기고 떠났다.
p.132
그녀가 한꺼번에 밀려가는 학생들 틈에서 내 모습을 찾으려고 애쓰면, 난 일부러 나무 그늘 뒤에 숨어 가만 지켜 보곤 했다. 아오이는 고개를 옆으로 갸웃하고 눈을 돟그랗게 뜨고 나를 찾고 있었다. 평소 그렇게 차갑게 보이는 아오이가 목을 길게 빼고 나를 기다려 주는 것이 너무 기뻤다. 아아!, 하고 내가 나무 뒤에서 얼굴을 내밀면, 나도 금방 왔어,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앞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었다. 그녀는 그런 사람이었다. 냉정 속에 열정을 숨기고 걸아가는 듯한...
p.185
세정은 일종의 카타르시스 상태로 복원사를 이끌고 간다. 작업 과정 가운데서도 가장 꼼꼼한 일이지만, 나는 그 때 마음이 정화되어 가는 듯한 느낌을 받을 때가 많다. 그림이 덮어쓰고 있는 시간이적이며 정치적, 종료적 오물을 일단 씻어 냄으로써, 그림의 원래적인, 그림이 그려질 때의 순수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다.
p.240
만나지 못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만나지 못하면 포기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8년이란 세월에 결착을 지을 각오로 두오모 위에 서 있었으므로. 그러나 그녀가 나타남으로써 잊혀져 가던 가슴에 새로운 불길이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그 화염은 상상도 못할 만큼 크게 부풀어올라, 나는 착각에 빠져들었다. 행복이 돌아왔다고.
p.242
오지 않을 사람이 온 의미를 찾고 있었다. 그러면서 당연히 아직 두 사람이 사이에는 사랑이 남아 있다고 믿어 버리는 것이었다. 8년 따위 10분이나 다름없다고 오해하고 마는 그런 흥분 속에 빠져 있었다.
우리는 세월의 어둠 속을 손으로 더듬어 서로의 윤곽을 확인하려 했다. 만남이라는 기세를 타고 우리의 열정에는 불이 붙고, 냉정에는 물이 뿌려졌다.
p.243
남자란 과거를 질질 끌며 살아가는 동물이라고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겠지만, 마음의 스위치를 전환하는 데는 여자보다 훨씬 서툰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