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겐 장애인 친구가 없다.
날씨가 좋은 주말. 집에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목적지를 말하고 기사님을 바라보니 기사님을 말 대신 조수석 뒤를 가리켰다. 시선을 옮긴 곳엔 태블릿 피씨가 있었다. 화면에는 마이크 버튼과 ‘목적지를 말해주세요’라는 문구가 쓰여있었다.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척하며 버튼을 누르고 목적지를 또박또박 얘기했다. 목적지를 확인한 기사님은 바로 출발하셨고 당황한 나는 처음 만나보는 청각장애인 기사님이 반가우면서도 당황했던 내 모습이 부끄러워 괜히 죄송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최대한 자연스럽게 행동한다고 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창밖에 풍경들이 빠르게 지나가고 눈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온통 신경이 택시 안으로 집중돼있어 내 행동이 부자연스럽게만 느껴졌다. 반대로 택시 안은 고요했다. 잔뜩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에 긴장을 풀고 천천히 주위를 둘러봤다. 창문에는 스티커가 붙어있었는데 그곳에 ‘고요한 택시’라고 쓰여있었다. 난 바로 ‘고요’와 ‘택시’의 상관관계를 생각했다. 동시에 태블릿 PC 안 영상이 눈에 들어왔다. 고요 택시에 대한 매뉴얼 영상이었다. 청각장애인 기사님이 운영하는 고요한 택시는 대화가 없어도 손님이 고요함 속에서 쉼과 편안함을 느끼고 목적지까지 안전하게 운전해 주는 택시라는 설명이 담겨있었다. 메뉴를 천천히 들여다보니 ‘음성지원’, ‘키보드’, ‘기사님에게 말하기’, ‘여기서 내릴게요’ 등 기사님과 의사소통하는데 문제가 없도록 시스템이 잘 갖춰져 있었다. 그저 듣는 대화가 어려울 뿐이지 목적지를 가는데 문제가 생기거나, 택시를 이용하는데 문제 될 만한 일은 없어 보였다. 우리가 이용하던 택시와 똑같은 모습이었다.
그제야 장애인 분들의 직업적 선택이나 환경이 조금은 나아지고 있는 것 같아 기쁜 마음이 들었다. 그러면서도 마음 한편으로는 택시를 탔을 때 당황했던 내 모습이 계속 떠올라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몇 년 우연히 세바시 정혜영 강사님의 ‘당신에게 장애인 친구가 없는 이유’라는 강연을 본 적이 있다. 강연을 보는 내내 큰 충격을 받았다. 내 주변에도 장애인 친구가 없다는 것과 그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못했다는 점이 그동안에 우리가 얼마나 장애인이 없는 삶에 익숙해져 있었는지 알 수 있었다.
학교에서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고 힘든 친구를 도와야 한다고 가르쳤지만 정작 우리가 도와야 할 장애인은 주변에 없었다. 그리고 사회에서 장애인을 볼 수 없었던 이유는 우리가 사는 환경은 오롯이 몸이 불편하지 않은 비장애인에게 맞춰져 있는 환경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장애인이 없는 사회에서 장애인에 대해 배웠다. 간혹 장애인 친구와 같은 반이 되어도 ‘특수반’으로 격리되거나, 학교 운동장에서 찍은 친구들 속에서 어색하게 합성된 친구의 얼굴을 졸업앨범에서 확인하는 것이 전부였다. 단 한마디도 나눠보지 않은 친구와 같은 학교, 같은 반을 졸업을 했다. 그것 외에도 우리에게 장애인 친구가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다.
이 사실을 깨닫고 장애인 복지관으로 봉사를 간 적이 있다. 직접 부딪혀서 낯선 것들을 익숙한 것으로 만들고 싶다는 도전과 같았다. 용기 내서 복지관에 찾아갔던 날 우리와 다르지 않다며 태연한 척했지만 다양한 장애를 가진 아이들에게 얼마큼 친절을 베풀어야 하는지, 어디까지 도와야 하는지 가늠하지 못해 쩔쩔맸던 기억이 있다. 계속해서 무언가를 해줘야지만 내 마음이 편해질 것만 같아 어설프게 그들을 도왔다. 그러면서도 스스로 하는 장애인 아이들을 보며 흠칫 놀랐다. 필요 이상으로 돕고 있는 내가 너무 부끄러워서 그 이후로 선뜻 나서지 못했다. 봉사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아이들을 평등하게 바라보지 못했다. 아이들이 하원 차에서 내려 자신의 집을 발견하곤 달려가는 모습에서 내 모습을 투영하고 나서야 그들과 우리가 다르지 않다는 걸 조금은 깨달을 수 있었다.
그 후로 장애인 복지관에는 가지 않았다. 무언가 두려워 선뜻 다시 찾아가지 못했다. 그러고 몇 년이 지난 후에야 고요한 택시 안에서 청각장애인 기사님을 만났다. 그리고 아직도 변하지 못한 나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나는 여전히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어렵지만 마음 깊숙이 장애인이라는 단어가 불편하지 않은 사회를 꿈꾼다. 어렵고 불편한 단어가 아닌 길에서 장애인을 마주쳐도 자연스럽게 그 옆을 지나갈 수 있는, 장애인에 대한 에티켓이 일상 속에 자연스럽고 당연한 그런 사회를 진심으로 바란다.
전철에서 간혹 전동 휠체어를 타시는 장애인 분들을 만날 때가 있다. 하지만 전철 속 전동 휠체어의 기억은 대부분 민망한 장면들을 목격하는 일이 많다. 무거운 휠체어가 전철 안으로 들어오면 사람들의 부담스러운 시선을 어렵지 않게 목격할 수 있다. 간혹 퇴근시간에 큰 휠체어는 민폐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실제로 사람이 많은 시간대에 지체장애인분이 전동 휠체어를 타고 전철에 탑승한 적이 있다. 몸을 제대로 가누시지 못하는 지체장애인분이었는데 전철에 턱이 있어 평소처럼 누른다고 누른 휠체어가 급발진하면서 앞에 있는 사람들이 전동 휠체어에 크게 부딪혔다. 부딪힌 분이 자기 몸을 살피고 있을 때 장애인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철 안 무거운 침묵이 흐르고 한참 뒤에야 어렵게 입을 떼신 장애인분은 큰소리로 “죄송합니다”라는 말을 내뱉으시곤 미안하고 무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셨다(말을 하시는데 어려움이 있어 보이셨다). 그날은 장애인이 대중교통을 이용하는데 얼마나 큰 불편함이 있는지 내 눈으로 직접 목격한 날이었다. 사과를 받으신 분은 크게 다치신 것 같았지만 진심 어린 사과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셨다. 전철을 타고 가는 내내 우리가 매일 밟던 그 턱이 누군가에게는 높고 불편한 장애물이었는지 알고 나니까 배려 없는 그 문 턱이 너무나도 미웠다. 그날 전철 안은 조용했다. 우리의 시선은 말없이 휠체어를 따라 움직였다. 전철이 움직이는 소리만 요란하게 울려댔다.
환승을 하려고 바쁘게 계단을 오르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도 눈에 확 들어오는 생명체가 있었다. 바로 노란 조끼를 입은 안내견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7호선 퇴근길에 올랐을 때였다. 발 디딜 틈 없이 빽빽한 전철 안에서 처음으로 안내견을 만났다. 다리에 무언가 낮고 묵직한 게 느껴져 아래를 보니 묵묵히 자리를 지키고 있는 안내견을 보았다. 순간 너무 놀랐지만 사람들로 가득 찬 공간에서 혹여나 안내견에 발이 밟힐까 최대한 공간을 확보한 뒤 누군가 양보해 주거나 발견하지 못한 빈자리가 있는지 눈에 불을 켜고 둘러봤다. 다행히 몇 역 안가 금방 내리셨지만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이 그 불편한 공간에 있다고 생각하니 온 신경이 그쪽으로 쏠렸다. 사람들이 점차 빠지고 자리에 앉아 긴장했던 몇 분 전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제야 보이는 전철 안 구조가 오늘만큼은 불친절하게 느껴졌다. 전철 안을 따듯하게 데워주는 다리 밑 히터가 그동안 안내견에게는 정말 뜨거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드니 오늘 마주한 시각장애인과 안내견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시설, 환경이 장애인들에게 불편하다는 걸 알게 된 건 책이 아닌 직접 내 눈으로 마주한 현실을 보고 깨달은 것이다. 그들이 단절된 생활이 당연한 사회가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쩌면 우리에게 그들이 익숙하지 않은 게 아니라 내 맘속 불편한 편견들이 가득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