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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델마 Dec 18. 2022

12달의 베스트 모음집

1월의 베스트

강화길 <대불호텔의 유령>



장소에 얽힌 무서운 이야기에 쉽게 매료되는 편이다. 학교, 병원, 성당 등 조금만 관점을 달리하면 무섭게 느껴지는 장소가 도처에 널렸지만 그중에서도 호텔에 관한 기억은 좀 구질구질하고 특별하다. 서울 자취방의 보일러에 이상이 생겨서 하룻밤 호스텔에 머문 적이 있다. 호스텔이지만 호텔처럼 개인 공간이 분리가 잘 되어 있고 침구가 깨끗했던 기억이 난다. 그곳에서 아메리칸 호러 스토리 시즌5, 호텔 편을 보다 잠들었다. 한동안 이글스의 호텔 캘리포니아를 엄청 듣고 다녔던 기억도 난다. 편안히 쉬기 위한 장소에서 일어난 무서운 사건들. 그것들을 소비하는 데 그쳤다면 ‘대불호텔의 유령’은 좀 다른 양상이었다.

강화길의 소설은 공포의 내력을 정확히 짚어주고 그것이 언제나 나를 납득시키는 경험이어서 좋다. 대불호텔은 왜 그런 장소가 되었나, 저 여자들은 왜 저렇게 신경질적인가, 왜 별로인가, 왜 거짓말을 했나 등등. 많은 미스테리 호러물들이 그런 순서를 밟아 나가겠지만 강화길이 특별한 건 여성, 화교, 한국이라는 식민지 국가의 정체성을 십분 활용하기 때문이라고 본다. 앞으로 나에게 누군가 현대사 소설을 추천해 달라고 묻는다면 조금 짓궂은 마음으로 이 소설을 추천하고 싶다.




2월의 베스트

빈티지 의류 활동(빅이슈 인터뷰 & 밀리언 아카이브 모델)



조금은 흠이 있고 사연이 있는 빈티지 의류를 좋아한다. 설익은 듯한 나의 모습도 사랑스럽게 볼 줄 아는 편이다. 이를테면 조금 거슬리는 말버릇, 카메라 앞에서 굳는 것 등등. 그래서 2월의 활동들이 재미있었다. 빅이슈 매거진에서 일하는 친구가 빈티지 소비러 1로 인터뷰를 요청했을 때 친구가 꾸려올 질문들이 기대됐고 나라는 사람에게 과연 ‘건질 것’이 있는지 걱정되기도 했다. 걱정이 무색하게 인터뷰는 재미있었다. 퇴근 후 진행되었음에도 피곤하지 않았고, 엄마가 물려준 버버리 머플러 이야기를 풀어놓을 땐 이것이 내가 옷에 관해 오래전부터 하고 싶었던 이야기라는 확신이 들었다. 외장하드를 뒤적여 빈티지 옷 사진을 찾아 전달하는 과정도 눈이 빠질 것 같았지만 의미있었다. 기사가 발행되고 인터뷰 사진에 있던 옷을 각각 어느 빈티지숍에서 구매했는지 인스타에 태그를 걸어 올렸다. 옷의 역사를 꽤 잘 기억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그 게시물을 보고 밀리언 아카이브에서 손님 모델을 요청하는 연락을 주었다.

봄 블라우스샵의 모델이었고 처음보는 귀여운 인상의 여성분과 같이 촬영했다. 나에게 어울리는 스타일과 사진에 임팩트 있게 나오는 스타일이 확연히 다르다는 점이 충격적이기도 하고 재미있기도 했다. 머리도 무스를 발라 올백으로 넘겼다. 예쁘다기보다 재미있는 스타일링이었고 이런 스타일을 해볼 수 있는 자리여서 좋았다. 내 얼굴의 못난 부분을 정말 하나도 보정하지 않고 그대로 업로드 하셨지만 내 단점을 단점으로만 보지 않는 연습이 된 것 같다.



3월의 베스트

대만 드라마 <상견니>



명성은 익히 들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까지 재미있을지 몰랐다. 이 드라마는 뫼비우스의 띠처럼 반복되는 시간에 관한 이야기다, 라고 썼다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고 적어본다. 그러나 어느 것도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시간은 너무 지엽적이고 사랑은 너무 포괄적이다. 나는 그냥 이 드라마를 오랜 기다림에 관한 이야기라고 소개하고 싶다. 주인공들이 자신의 이름으로, 각자가 살아가는 시간에 머물며,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게 되기까지의 긴 여정이다.

나와 닮았지만 다른 성격을 갖고 다른 시간 속에 살아가는 사람의 몸속으로 워프하는 게 주요 소재다. 주인공은 황위쉬안과 리쯔웨이 커플인데, 나는 줄곧 황위쉬안과 도플갱어인 천윈루나 천윈루를 짝사랑하는 모쥔제에게 마음이 갔다. 언제나 그런 사람들에게 마음이 간다. 덜 건강하고 흠이 있는 쪽으로. 지금 생각해보면 이게 나의 희생자 콤플렉스와도 연결된 것 같다. 그럼에도, 천윈루와 모쥔제가 행복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엔 변함이 없다.




4월의 베스트

박완서 <나의 가장 나종 지니인 것>


박완서 작가의 80~90년대 단편 소설집이다. 박완서 작가의 방대한 소설 세계 중에서도 한국소설의 황금기라 불리던 70년대의 소설보다 이 시기의 소설이 좀 더 내 취향이다. 비교적 가까운 과거이지만 완벽한 레트로의 시대이기에 추억할 거리가 더 많기 때문이다.

내가 보는 것 입는 것 쓰는 것 전반에 걸쳐 레트로를 추구하고 과거를 그리워하는 경향이 강하지만, 최근엔 알 수 없는 이 향수에 관해 회의감이 들던 차였다. 우리는 왜 전근대적인 가치관으로 가득 차있었던 과거를 레트로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있는지, 응답하라 시리즈 속 엄마들의 롤이 정말 정감 있다는 표현으로만 얼버무릴 일인지 의문이었다. 그 의문에 박완서 작가님은 무려 30년 전부터 대답을 준비해 놓았던 것만 같다. 한편으로 내가 원한 8090또한 이런 날것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8090이 그리워질 때면 그 시절을 배경으로 한 현대의 로맨스물보다 그 시절의 가족 소설을 찾아보게 될 것 같다.



5월의 베스트

영화 <처녀들의 저녁식사>



누군가의 사망 소식을 들을 땐 그 사람이 제일 반짝반짝 빛나던 순간이 떠오른다. 강수연 배우의 사망 뉴스를 접했을 때 지난 겨울에 본 <그대안의 블루>가 떠올랐다. 92년도 영화로 내가 태어나기도 전에 상영되었지만, 그 작품에 출연했다는 이유만으로 강수연과 안성기는 영원히 젊은 사람일 것만 같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디스플레이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통통 튀는 솔직한 매력의 강수연 배우를 볼 수 있다.

<그대안의 블루> 외에도 찾아보고 싶은 작품이 많았다. 그 중에서도 <처녀들의 저녁식사>와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VOD를 구입할 수 없어 영상자료원에서 봐야 했다. 오랫동안 미루던 일을 배우가 고인이 되고서야 실행에 옮기게 됐다. <처녀들의 저녁식사>는 여성의 성을 다룬 작품인 만큼, 영화 교양과목에서 여성주의 파트에 꼭 예시로 등장한다. 90년대 작품이면서 페미니즘적인 주제를 담은 영화. 반드시 레트로마니아 페미니스트 친구(수식어가 길다)와 보러 가야 했다. 마침 딱 그런 친구가 있어서 함께 상암으로 향했다.

흡사 짱구 같은 성격을 가진 강수연 배우가 너무 재밌었고 성에 대해 찌질한 태도를 보이는 남성들의 모습이 현대의 여러 인간군상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게 웃겼다.


6월의 베스트

넷플릭스 <기묘한 이야기 시즌4>


이 시리즈는 나에게 애증의 존재였다. 80년대의 하이틴 무드와 스티븐 킹 스타일의 호러 공식을 좋아하지만 바로 그 부분 때문에 이 시리즈가 싫기도 했다. 말하자면 시리즈의 핵심 설정 자체가 나에겐 양날의 검으로 느껴졌다. 시즌1은 그럭저럭 레이건 시대의 매카시즘을 반영하는 듯했으나 시즌2부터는 정체성을 알 수 없는 상태가 됐다. 하이틴 무드라는 것도, 또래 아이들보다 엄청난 상처를 받은 일레븐을 찌질이 남자애들 사이에 끼워 넣는 수준이라 찝찝했고(이게 바로 스티븐 킹 스타일이기도 하다) 백래시를 미화하는 것만 같아서 불편했다. 체호프의 총처럼, 80년대가 배경으로 등장했다면 그 배경 자체가 총알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시즌4는 일레븐의 캐릭터성 자체를 히어로의 조건으로 삼았다는 것만으로 그간의 단점을 눈감아줄 수 있는 시즌이었다. 어딘가 미숙하고 인간관계에 어려움을 겪는 일레븐이, 모든 것의 출발이고 근원이 되는 인간의 마음 가운데서 살아남는다. 그리고 그게 시즌4의 메시지가 된다. 기묘한 이야기는 크리처물로 알려졌지만 이번 시즌에서는 크리쳐 자체보다 사람의 마음이 더 중요하다. 외로움이나 증오가 스스로를 갉아먹어 신체가 파괴되는 현상을 주요 소재로 하니 스스로가 단단하지 못한 상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권하고 싶다.



7월의 베스트

영화 <인형의 집으로 오세요>



세상 사람들을 두 부류로 나누는 것에는 이골이 날 만큼 다양한 분류법이 있지만, 이 영화를 보고 굳이 한 가지를 더 보태고 싶어졌다. 어린 시절을 좋았던 시절로 기억하는 사람과 고난으로 기억하는 사람. 나는 후자였고 상처뿐인 사춘기를 그린 이 영화도 후자에 속하겠지. ott 사이트에서 위시리스트를 뒤적거리다 95년도에 개봉한 정사각형 사이즈의 화면을 가진 이 영화를 보게 됐다. 화면 비율상 극장 상영용이 아닌 텔레비전 방영용이었던 것 같다.

살짝 비껴 나간 듯한 하이틴 무비를 좋아하는 편이다. 방방 뜨는 듯한 분위기도 좋지만, 어딘가 차분하고 주류에서 벗어난 듯한 십대의 이야기에 더 많이 공감하기 때문이다. 사람을 두 부류로 나누는 나만의 분류법에 따르면 나는 꽤나 우울한 십대 시절을 보냈기 때문에, 끊임없이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사람이 되려고 하는 주인공의 행동이 이해됐고 이해 됐으면서도 창피했다. 쟤는 도대체 저런 상황에서 저런 말을 왜 하지? 싶지만 그 마음을 아예 모르는 게 아니라 더욱 감정 소모를 할 수 있었던 영화였다.



8월의 베스트

태국 루프탑 바



친구와 여행을 가기로 계획했을 때 처음 생각한 국가는 대만과 일본이었다. 우리가 슬슬 비행기 표를 예약해야 할 시기까지도 두 나라는 입국제한을 풀지 않았고 플랜B였던 태국으로 향하게 됐다. 친구와 나는 둘 다 mbti마지막 자리가 p로, 노는데 딱히 계획씩이나 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4박 5일의 일정 중 친구가 가고 싶은 곳으로 오로지 ‘루프탑 바’를 얘기했을 때 나는 j로 전향한 사람처럼 계획을 열심히 세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도대체 루프탑 바가 뭐라고, 도대체 얼마나 의미 있는 공간이길래 5일간의 계획 전부로 루프탑 바 하나를 내밀었을까 궁금했다.

태국은 서울만큼, 아니 서울보다 더 화려한 도시로 보였고 온갖 고층빌딩에 루프탑 바가 있었다. 태국의 루프탑 바가 생각나서 서울에 돌아온 후에 서울에도 비슷한 곳이 있나 찾아봤지만 그렇게까지 높은 건물의 옥상에 시끄러운 음악과 술을 허용해 놓은 곳을 찾을 수 없었다. 기본적으로 상대방의 말 소리가 잘 들리지 않는 장소에서 뭘 마시고 얘기하는 걸 싫어하는데 이런 느낌이라면 용서가 되는 것 같았다. 디제잉 소리가 시끄럽게 들리지만 꼭 춤을 출 필요는 없어서, 술을 파는 곳이지만 진탕 취하겠다고 마시기보다 캐주얼하게 한 잔 마시기 좋은 분위기여서, 가끔 대화 중간의 침묵에 일일이 지루함을 느끼지 않아도 돼서 더 매력을 느꼈다고 생각한다.



9월의 베스트

테라오 아키라 <reflection>


함께 레트로를 덕질하는 ‘레트로 마니아’ 친구가 있다. 친구는 레트로에 관한 글을 연재하고 오래된 잡지와 드라마를 보는 취미가 있다. 그날의 만남은 내가 친구에게 도프레코드의 존재를 소개한 적이 있어서, 그곳에 Lp디깅을 하러 가기로 했었기에 가능한 번개였다.

도프레코드를 마지막으로 간 게 2020년, 지금의 가게로 이전하기 직전이었는데 재고처분 수준의 할인을 했던 시기라 남아있는 앨범이 몇 없었던 기억이 난다. 친구와 다시 방문했을 땐 너무나 다양한 장르의 앨범이 빼곡히, 예쁘게 놓여 있어서 보기만 해도 배불렀던 기억이 난다. 그래도 물욕이란 보는 것만으로 충족되는 건 아니라 구매할 앨범이 있나 돌아보는데, 테라오 아키라의 reflection을 1만 3천원에 내놓은 걸 보고 얼른 집어들었던 기억이 난다.

수록곡인 ‘루비 반지’는 너무나 유명한 시티팝으로 평가받고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81년도에 골든디스크를 수상한 명반이다. 그때마다 세련됐다는 표현을 하고 싶지만 그렇게 말하기에 뭔가 아깝다는 생각도 든다. 현대적인 것과는 별개로 세련됐고 쿨하다고 하기에 이 음악은 충분히 올드하며 그 올드함이 매력적이기 때문이다. 도쿄의 깊고 어두운 골목 어느 심야식당에서 술 한 잔을 해야할 것 같은, 그런 계열의 고독을 노래한다. 소박한 꿈이 있다면 일본의 심야식당st가게에서 끝내주는 저녁과 술을 먹고 나오는 길에 루비 반지를 듣는 것이다.



10월의 베스트

차의 계절<가을 미감>



첫 직장을 그만두고 그 해에 중국과 일본 여행을 했다. 중국에선 보이차를, 일본에선 녹차와 홍차를 마시며 지친 여행길을 달래곤 했는데, 이런 걸 매일 즐길 수 있는 사람의 삶을 상상하며 부러워했던 기억이 난다. 그 기억을 갖고 한국에서의 삶을 살아내는데, 눈 오는 날 충동적으로 행선지를 바꿔 차의 계절로 향한 적이 있다. 그냥 날이 이렇게 추우니 차를 마셔야 겠다고 생각했다. 차 그렇게 많이 마시지도 않았으면서.

그날 차의 계절에서 마신 차가 동방미인. 우롱차 중에서 농향우롱 계열에 속한다. 뭣 모르고 그냥 동방미인이 고급 우롱차라는 생각에 주문했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날의 날씨와 너무 잘 어울렸던 것 같다. 우롱차에 청향과 농향이 있다면 비가 오거나 쌀쌀한 날씨엔 농향이 어울리고 청향이 비교적 맑고 청량한 날씨에 어울린다는 건, 차의 계절에서 티코디네이터 과정을 수강하고 난 이후였다. 동방미인을 마신 바로 그날 이곳에선 수강 같은걸 하지 않냐고 여쭤봤고 바로 그 자리에서 티코디네이터 과정 신청을 하고 돌아갔던 기억이 난다.

서울에 살면서 차의 계절을 찾는 횟수는 줄어들었지만 종종 이렇게 방문하곤 한다. 10월엔 ‘가을미감’이라는 제목으로 티코스를 운영하셨는데 서울에 사는 친구와 함께 갔다. 티코스는 차와 음식을 페어링해 코스 형식으로 내주는, 일종의 오마카세 같은 개념이다. 가을미감의 미 자는 아름다울 미이기도 하지만 맛 미로도 바꿔 쓴다. 이날 가장 인상깊었단 코스는 차나물 주먹밥과 치쿠와 튀김. 전날 친구가 오차즈케 이야기를 했던 터라 오차즈케와 비슷한 이 음식이 더 맛있게 느껴졌다. 차는 이 음식과 곁들인 차보다 후에 나온 화과향 홍차가 더 맛있게 느껴졌다.



11월의 베스트

숙소 <모티프원>



연차 소진 겸 힐링 겸 친구와 파주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장소가 파주인 이유는 대부분 출판단지와 헤이리 마을 때문이지만 우린 둘 다 아니었다. 그냥 모티프원이 파주에 있기 때문이었다.

모티프원은 북스테이를 할 수 있는 게스트하우스다. 북스테이라고 하니까 친구들이 템플스테이를 생각하며 엄숙하게 책 읽는 모습을 상상했다고 하는데 여긴 그냥 책이 잔뜩 있는 인테리어가 멋진 숙소다. 책을 자유롭게 읽어도 좋고 그저 잠만 자고 앉아 있어도 상관없다는 얘기다. 방은 화이트룸과 블루룸, 우드룸으로 나뉘어져 있고 각각의 이름에 걸맞게 인테리어가 되어 있다. 우리가 묵은 곳은 블루룸인데 내 평생 가장 구현하고 싶은 모습의 방이 거기 있었다. 책이 많으면 인테리어를 헤치고 집의 쾌적함이 망가진다고만 생각했는데, 책과 함께 자연스럽게 아름다운 공간이 가능하다는 점 때문에 언제고 다시 찾아가고 싶은 장소다.

밤에는 리추얼 노트와 책, 헤드셋을 가지고 나와 공용공간에 앉아 있었다. 인생의 아름다운 순간은 그리 많지 않아서 그 순간이 회화 작품처럼 남을 때가 있다. 현실성을 덜어내고 미화를 거듭하기 때문에 사진이 아닌 그림으로 남는다고 생각한다. 나한텐 그 밤 질 좋은 책상과 의자에 앉아 음악을 듣고 유리창 너머의 파주 밤길을 보며 글을 썼던 순간이 그렇게 남았다.



12월의 베스트

티룸&바 을지루이스



퇴근 후에 누굴 만나러 가는  엄청난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이제 슬슬 주말에 만나는 것도 버거워지고 있지만 어쨌든 업무 후에 약속을 잡고 약속을 수행하는 일은 체력적으로 점점 힘들다. 그러니 내가 퇴근 후에 누군가를 만난다면 그를 굉장히 아낀다는 얘기가  것이다. 이날은 친구와 맛집을 가고 사이드 프로젝트 얘기를 하기 위해 만났다. 일하고 나서   얘기라니! 자칫 체력소진의 시간으로만 남을 수도 있는 저녁을 아주 아름답게 만들어준 장소가 있다.

을지루이스는 친구가 여러  방문했던 곳이라고 해서 되도록 가지 않으려고 했으나 을지로에서 밤늦게까지 영업하는 카페가 아주 귀하기 때문에,  검색해 보니 이곳이 너무  마음에 들어서, 자연스럽게 2 장소로 정해졌다. 낮에는 티룸으로, 밤에는 바로 운영되는 곳이다. 나는 얼그레이 마티니를 주문했는데 마티니에서 진한 베르가못 향이 나는  아주 마음에 들었다. 나는 근본주의자라 차는 클래식 그대로 마셔야  맛을   있다는 주의인데 그날 처름으로 티칵테일을 배워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주는 조금 뜨악스럽게도 스콘과 푸딩을 시켜 먹었는데  달콤함과 얼그레이 마티니의 느낌이 아주  어우러졌다. 술의 쌉쌀함과 얼그레이의 고급스런 향과 디저트의 달콤함이 입안에서 퍼지는데 무언가 현실감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테이블에 앉아있는 사람들도 지금이 퇴근  시간이라는  무색하게 너무 에너지 넘치고 즐거워 보였고 음악과 빈티지한 인테리어도 아름다워서, 지금 사이드 프로젝트를 얘기하고 있는 우리가 되게 멋진 삶을 살고 있다는 착각까지 들었다. 일본의 버블경제 시기를 살아가는 샐러리맨이  기분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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