접속사가 필요한 순간

직장생활을 살리는 접속사

by EURA


불필요한 접속사가 없는 글이 좋은 글이라는 암묵적 규범이 존재한다. ‘하지만’, 난 접속사를 좋아한다. 그것도 아주 많이. 특히 글이 아닌 생활에서라면 접속사 없이 살아갈 수가 없다. 사건의 나열과 연속일 뿐인 일상의 토막들에 의미를 부여할 때, 한참은 먼 것 같은 마음과 머리에 다리를 놓아줄 때,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받아들이기 위해 눈을 삼 초쯤 감았다가 뜨면서, 도저히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때 스스로에게 시동을 걸기 위해, 그 상황에 가장 알맞은 접속사를 빌려온다.


이해할 수 없는 타인을 떠올릴 때 가장 먼저 불쑥 떠오르는 부사는 ‘도대체’지만, 마음을 가다듬고 그의 상황과 맥락을 헤아리려 노력하며 ‘하지만’를 가져온다. ‘도대체 저 인간은!’과 ‘하지만…’ 사이에 일어나는 무수한 마음의 진동만큼, 내가 조금 더 너른 사람이 되었기를 바라며. 천천히 숨 고르듯 접속사를 고른다.


별 것 아닌 즐거운 일이 생겼을 때면 슬며시 ‘게다가’를 떠올린다. ‘너무너무 피곤한 아침, 아이스 라테를 마신다. 게다가! 맛도 좋다. 게다가! 하늘은 파랗다. 게다가! 마들렌도 먹을 거다!’ 아주 사소한 일들에 게다가를 붙일 때마다, 콧구멍은 벌름거리고 커진 콧 평수만큼 좀 더 위풍당당해진다. 오로지 게다가 의 힘이다. 게다가를 다섯 번이나 외치며 근무를 시작하긴 했지만, 사실 '게다가'는 그렇게 감동적인 접속사는 아니다. 접속사의 시상식 같은 것이 열린다면, 아마 ‘최우수 각본상’ 혹은 ‘평화상’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씨가 가져갈 것이다. 그가 만들어내는 감동의 공식은 언제나 정확하고, 그 감동은 궁극적으로 평화를 이끄니까.


‘하지만!’, 그것이 극이 아닌 삶, 그 중에서도 직장생활이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자주 등장하는 것은 곤란하다. ‘불구하고’라는 접속사가 꺾는 기울기는 아주 가팔라서, 자주 사용하다가는 숨이 찬다. ‘불구하고’가 자주 등장하는 직장생활이 순탄할 리 없다. 만약 직장생활이 자꾸 ‘그럼에도 불구하고’를 요구한다면 진지하게 현 상황을 되짚어야 할 가능성이 크다. ‘그러나’도 안된다. 일에 자꾸 ‘그러나’ 나가 등장한다는 건 위험신호다. ‘그러므로’는 상상 속에선 자주 나올 법한 일이지만, 그것은 스타벅스 프리퀀시 같은 존재로 12번에 한 번 꼴로 찾아온다. 내가 산 음료의 잔 수만큼 쳐주는 게 아니라, 내가 결제를 긁은 만큼 별이 생기는 그 기이한 시스템처럼 드물게 찾아온다. 만일 그러므로가 자주 등장하는 직장생활을 하고 있다면, 아니 적어도 동네 카페처럼 열 잔에 한 번 꼴로만 찾아온다고 해도 그것은 아주 훌륭한 환경인 것이다.


직장생활에 가장 자주 등장하는 접속사는 직장생활의 풍경을 가장 함축적으로 묘사한다. 일을 하는 내내 가장 많이 떠올리는 접속사가 무엇인지 떠올려보자. 호락호락하지도, 미칠 듯 가파르지도 않은 나의 직장생활에서 일을 하며 가장 많이 사용하는 접속사는 ‘한편’이다. 최고의 성과를 내기 위해, 주어진 역경을 극복하고서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류의 업적을 달성하려는 노력을 수시로 하지 않는다. 누군가가 나한테 생각 없이 던지고 간 말을 곱씹으며 ‘설마…’ 하며 물고 늘어지며 길게 생각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나 스스로를 돌볼 수 있는 수준에서 건강하게 일하기 위해서는 오로지 ‘한편’이라는 장면 전환이 필요하다. 이게 말처럼 쉽게 되는 사람이었다면 참 좋았을 것이다. 아마 그런 사람이라면 ‘한편’이라는 접속사의 도움 없이도 인생을 훨씬 간결하게 살 수 있었겠지.


애석하지만, 나는 한 편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한 사람이다. 한 편의 도움 없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늪에 빠져 그게 땀인지 피인지 눈물인지도 모를 액체를 닦으며 삽질을 하거나, 남들이 쏜 독설의 독 성분을 국과수에 감정을 맡기고, 결과가 나오는 동안 초조해하며 스스로 그 독의 성분을 연구하고 있을 수도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나에겐 누구보다 ‘한편’이 필요하다.


‘한편’은 마법 같다. Alt-tab으로 화면 전환을 슉 해버리는 것처럼, 유튜브를 보다가 갑자기 게임을 하러 가는 것처럼, 인스타를 보다가 뜬금없이 메모장을 켜고 떠오르는 생각을 적는 것처럼 내 주의를 빠르게 전환시키고, 새로운 환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 도저히 답이 안 나오는 일이 지속될 때, 이제 나는 ‘한편’을 불러온다. 그 일에 매몰되어 몇 시간이나 잡고 있다가 야근을 하던 과거의 나와는 달리, 해야 할 다른 일들을 먼저 불러와 그 일을 먼저 해결해버릴 수 있는 여유를 가지게 되었다.


내가 ‘한편’의 매력을 재발견하게 된 데에는 최동훈 감독의 인터뷰의 공이 크다. 그는 영화평론가 이동진 씨와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다. ‘타짜’는 ‘자 한편!’이라고 말하면서 또 다른 이야기를 비추는 식의 영화입니다. 제 여자 친구가 그건 ‘섹스 앤 더 시티’의 스타일이라고 하더군요. 그 영화가 ‘한편(meanwhile) 이러면서 진행되는 작품이잖아요. 그런 게 기본적으로 작품에 경쾌함을 불어넣는 것 같아요’. 이 인터뷰를 읽고 있는 내 머릿속에서 대뜸 캐리의 목소리로 ‘미인~와-일’ 이 자동 재생되었다. 섹스 앤 더 시티의 매력은 바로 이 ‘미인-와-일’에 있다. 모든 에피소드마다, 각기 다른 네 명의 여성이 자신의 일과 삶에서 겪는 경험들을 오로지 이 ‘한편!’으로 이어 붙일 뿐인데, 에피소드의 마지막이 되면 그 네 명이 겪은 크고 작은 사건들이 하나의 맥락을 지니며 주인공 캐리의 칼럼 소재가 된다.


직장생활도 마찬가지다. 내게 주어진 여러 가지 업무들에 (거기엔 인간관계도 포함이다.) 지나치게 과몰입하지 않더라도, 막힐 때마 넘어가며 ‘완성되지 않았더라도’, 여러 일을 아주 조금이라도 진전시키는 것 자체가 주는 경쾌함이 있고, 그 일과 일들 사이에 그들만의 리듬과 맥락이 생긴다. 맥락으로 이어진 일들의 연속은 기대치도 않던 ‘옴니버스극’으로 재탄생하기까지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가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아도, 그 자체로 꽤 괜찮은 이야기. 아마 이 극은 ‘최우수 각본상’이나 ‘평화상’은 받지 못하겠지만, 뭐 어떤가. 그래 봤자 직장생활인데.


답 없는 보고서를 잡고 있는 날, 아무리 찾아도 나오지 않는 조사를 하고 있는 날, 누군가의 말에 체한 것처럼 얹힌 기분이 드는 날, 나는 계속 주문을 외친다. ‘한편!’. 그리고 한편으로 가득 채운 오전 근무의 끝, 점심시간이 찾아오면 신나게 게다가를 불러들이며 작은 행복을 만끽할 준비를 한다. 오늘 우리가 좋아하는 백반집 메뉴는 계란말이야! 게다가! 쏘야도 있어!! 게다가!!! 미역국이야!!!! 게다가 세 번이면 화병도 멈출 수 있으리라.


물론, ‘한편’으로만 때울 수 있는 직장생활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 까꿍 하며, 한 번쯤은 나와줘야 할 것이고, 아주 큰 따옴표로 “하지만”을 써야 할 날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그럼에도, 하여튼, 대신에 어떤 접속사를 동원하던, 중요한 것은 그것을 불러옴으로서 스스로를 다독이고자 하는 태도다. 나를 격려할 접속사를 활용하면, 갑갑한 사무실 공기가 환기되듯 우리의 직장 생활에 새로운 호흡이 생긴다. 쉼 호흡이 필요할 때마다 꺼내 쓸 상비용 접속사가 우리를 지켜 줄 것이다.


우리의 생활엔 접속사가 필요하다. 직장 생활뿐만 아니라, 사건과 사건 사이에 최적의 접속사를 궁리하는 일은, 의미를 부여하고 그를 소중히여기는 인간의 고유함일 것이다. 반전과 인과로, 은유와 비유로 자신이 처한 상황에 새로운 서사를 부여하는 것. 최악의 사건과 평범한 사건을 엮어, 불행의 온도를 낮추기 위해서. 최고로 기쁜 순간과, 최고로 힘든 순간을 모아 나의 고행에 빛을 밝혀주는 마음의 의미 작용이 접속사를 만들어내는 최적의 함수라고 믿는다. 상황과 감정, 사건과 논리를 납득시키며 태어나는 접속사의 귀한 탄생의 순간들을 마음껏 축복하며.








작가의 이전글'혼자'가 태도가 될 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