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잠자는 풍뎅이>
다시 도서관 안으로 들어와 자리에 앉았다. 기울어진 책에 매달려 잠을 자던 풍뎅이는 책상 위에 벌렁 누워있다. 아마 잠결에 굴러 떨어졌나 본데 그대로 잠을 자고 있다. 살짝 밀어 옆으로 제쳐놓았다.
태종 무열왕에 대한 글을 읽다 보니 지금의 대통령이 떠오른다. 김춘추와 김대중은 비슷한 점이 많은 것 같다. 왕이 되는 과정이나 정책들이 말이다. 엄격한 골품제도의 신라에서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선덕여왕이 자손이 없이 죽자 진골인 김춘추가 진골에서는 처음으로 왕이 되어 무열계의 왕위가 이어졌다. 김춘추는 외교정책에 관심을 많이 가졌는데 고구려에도 갔었고, 당에 가서는 국학에 가서 석존과 강론을 참관하여 깊은 감명을 받았다. 왕이 된 후에 집사부를 설치하여 관제를 정비하고 9서당 군단을 설치하여 국방안보와 국난극복에 노력했다. 그는 역사에 큰 획을 긋는 인물이 되었고, 신라는 그를 시작으로 하여 중대가 펼쳐졌다.
김대중은 야당 후보로는 처음으로 대통령이 되었고, 김춘추처럼 폭넓은 외교정책을 통해 국가의 발전을 꾀하는 대통령이다. IMF의 어려운 국난을 잘 극복했고, 적극적인 북방외교를 하여 역사적인 남북정상회담을 열었고, 그 공로로 노벨평화상까지 받는 영예를 안았다. 무열왕의 뒤를 이은 문무왕 때 삼국의 통일이 이루어졌듯 다음대의 대통령에서는 통일이 이루어지길 기대해본다. 하지만 이런 기대는 책임을 떠넘기는 위한 비겁함이다. 통일은 대통령이나 몇몇 잘 난 사람들이 하는 것이 아니고 여러 상황과 사람들이 함께 해야 하는 것이다. 나는 잠깐 내 책임을 남에게 떠넘겼다. 나도 민경이처럼 조급해진 것인가?
99년 봄, 민경이가 <토지>에 나오지 않자 난 그를 찾아갔었다. 그는 누구보다도 통일을 소망하고 같이 연구하며 기도를 하였는데 돌연 그만둔 까닭이 궁금했다.
"우리가 아무리 기도해도 그것은 공허해요."
불쑥 뱉은 그의 말에 난 의아했다.
"우리끼리 모여서 토론하고 기도해야 김정일이 꿈쩍이나 하겠어요. 아니, 이 나라의 정치인이나 경제인들, 아니 국민들이 정말 통일을 바라고 있는지 궁금해요."
이전에 민경이는 우리가 통일을 위해 오늘 무엇을 할 수 있는지를 심 목사에게 물었었다. 그때 심 목사는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바라는 맘으로 마음에 새긴 뜻을 품으며 자신의 삶에 충실하자고 얘기했던 것 같다. 당장의 행동지침을 기대했던 민경이는 실망했던 것 같다. 그 후 뭔가를 갈급하던 민경이는 그 갈급함이 채워지지 않자 더 조급해하더니 제풀에 꺾이고 말았다. <토지>에서 더 이상 어떤 것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안 그는 그 후로 나오지 않게 된 것이다.
나는 박노해의 '첫마음'이란 시를 읊었다.
"저마다 지닌 상처 깊은 곳에 맑은 빛이 숨어있다. 첫마음을 잃지 말자. 그리고 성공하자. 참혹하게 아름다운 우리, 첫마음으로."
"형, 나 성공할 거예요. 참혹하게 성공하고 싶어요."
이렇게 말하는 민경이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민경이는 가을에 미국으로 떠났고, 새 천년을 앞둔 그해 겨울에 나는 스스로 많은 질문을 했다. 과연 통일은 될까, 남북이 통일되기 전에 남한 내의 통일에 대한 생각들이 통일될까 하는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통일이 되면 우리가 지불해야 하는 통일비용이 엄청나며, 그 비용은 국민들에게 엄청난 부담이 될 거라는 여론이 삐죽삐죽 나오곤 했다.
99년 가을, 심 목사가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면서 <토지>라는 독서모임도 해체되었다. 마지막 모임에서 심 목사는 '북극성'에 대한 얘기를 했다.
"북극성은 그 자리가 변하지 않는 별이다. 그래서 방향의 기준이 되는데, 우리는 여행할 때 자꾸 자리가 변하는 별을 보기보다는 북극성을 바라보아야 한다. 북극성이 방향의 기준이듯 우리 삶에도 기준으로 삶아야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은 때때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 변함없는 기준이어야 한다. 우리가 각각 품어야 할 소중한 뜻들, 그것이 어떤 것이든지 단단히 붙잡고 가자. 우리가 북극성을 바라보는 것은 그 별을 따기 위함이 아니라 그 별을 향해 가기 위해서다."
심 목사의 말은 밭에 뿌려지는 씨앗처럼 내 가슴에 심겼다. 나는 그날 모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꿈꾸는 통일도 어쩜 북극성인지 모른다. 우리 세대에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통일을 향한 그 첫마음은 꼭 간직하자고. 우리의 <토지> 모임은 끝났다. 그러나 그 정신을 가지고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성실하자."
삶의 자리, 우리에겐 각자의 삶의 자리가 있다. 비록 각자의 삶의 자리는 다를지라도 바라보는 곳이 한 곳이라면, 그래서 북극성을 향해 한발 두발 내딛는다면 우리는 만나게 될 것이다.
2000년 새해가 되었을 때, 자주 들르던 홈페이지 게시판에 '즈문해에 부르고 싶은 노래'라는 글을 남겼었다. 이는 토지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에게 하는 말인 것이다.
즈문해에 부르고 싶은 노래
뒤뜰에 감나무 한 그루가 고즈넉이 자라고 있습니다. 앙상한 가지에 입술처럼 불그레한 감 한 개가 매달려 있습니다. 만지면 금방이라도 단물을 쏟아낼 것 같은 홍시를 그 집의 꼬마는 어떻게든 따먹으려 하지만 만만치 않습니다. 꼬마는 높은 가지의 끄트머리에 달린 홍시를 따기 위해 갖은 방법을 사용했습니다. 그리하여 감을 딸 수 있는 요령이 점점 생기기도 하였지만, 반면에 그 마음에는 잦은 실패로 인한 주저와 포기하는 맘도 함께 생겼습니다. 담장 위에서 홍시를 향해 작은 손을 버리며 발돋움을 하는 아이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중얼거리며 바동거립니다.
난 그 꼬마가 정말 조금만 더 손을 내밀며 발돋움을 했으면 합니다. 절대 포기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여우와 신포도"라는 이솝우화의 여우처럼 '저 감은 떫을 감일 거야!'라고 자기 합리화를 하지 않았으면 합니다. 통일을 하면 '통일비용'을 우리가 부담해야 하므로 통일을 우리에게 이롭지 않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언제까지 곪은 상처를 몸에 지녀야 합니까? 오늘 당장 100의 비용이 아까워서 해마다 10의 비용을 치러야 합니까? 우리는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원숭이처럼 우둔한 판단일랑 하지 말아야 합니다. '통일비용' 운운하며 이대로가 더 좋다고 주절거리는 이들에게 솔깃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자신들이 가진 기득권을 챙기기에만 급급해하는 수전노에 불과합니다.
불과 반세기 전에 우리는 해방을 맞았었습니다. 온 백성이 감격에 겨워 태극기를 휘날리며 거리를 메울 때에도 몇몇 사람은 일본의 패전을 슬퍼했습니다. 왜냐고요? 그들은 민족의 해방보다도 자신의 기득권을 더 귀하게 여겼기 때문이죠. 지금 당장 잃을 기득권보다는 앞으로 내리 누릴 장래권이 더 중하지 않습니까?
저는 이 시대를 사는 젊은 우리들에게 감성적인 접근을 권하고 싶습니다. 너무 계산적으로만 통일을 바라보지 않았으면 합니다. 농업의 가치가 수치적인 가치 외에 보이지 않은 어마어마한 가치가 있듯이, 통일 역시 단순히 계산되는 수치상의 비교우위 너머의 더 크고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헤어진 두 형제가 다시 만나는 것에 무슨 계산이 필요합니까! 지난번 전 국민을 울린 '이산가족 찾기'를 보지 않았습니까? 세상에 가족이 떨어져 있는 것만큼 더 큰 슬픔이 있습니까? 우리가 통일을 하는 것은 헤어진 식구를 다시 만나는 겁니다. 누가 뭐래도 북한의 동포는 우리의 동포입니다.
내가 왜 이렇게 안절부절못하는지 아십니까? 우리가 당연하게 여기는 것이 점점 당연하지 않은 쪽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이제껏 우리는 통일은 꼭 이루어야 한다고 여겼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점점 그 생각이 줄어듭니다. 아무리 경제외교, 스포츠 외교, 문화외교를 해야 뭐합니까. 우리의 생각이 통일을 부담스럽게 여기거나 꺼린다면 말입니다. 불과 10년 전에만 해도 '통일을 해야 합니까?'라고 질문하면 이상하게 여겼었죠. 왜 당연한 질문을 하는가 하고 말입니다. 그러나 요즘의 통계를 보니 이대로 가다가는 통일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작년의 여론 조사에서 '꼭 통일을 해야 합니까?'에서 '꼭 해야 된다'라고 응답한 사람은 절반도 되지 못했습니다. 통일의 당연성을 주장하던 사람들이 점점 줄어들다가 급기야는 절반도 못 되는 수준까지 이르렀습니다. 올해는 더 낮아지고 내년에는 더 낮아질지도 모릅니다.
난 정치적인 것은 잘 모릅니다. 경제적으로 통일비용에 대해서도 잘 모릅니다. 즈문해의 소망을 묻는다면 김구 선생의 '세 가지 소원'을 말할 것이며, 즈문해에 부르고 싶은 노래를 말하라면 '우리의 소원을 통일'이란 노래를 다 함께 부르고 싶습니다. 그리고 헤어진 형제는 꼭 만나야만 한다고 여깁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은 우리 세대에 꼭 이루어야 한다고 고함을 치고 싶습니다.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고, 그런 막무가내가 어디 있냐고 탓할지라도 난 생떼를 쓰고 싶습니다.
위기는 기회라고 했던가요. 지금 우리 앞에는 '기회의 신'(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기회의 신은 앞머리엔 머리털이 덥수룩하지만 뒷머리는 대머리이다. 그러므로 앞에서 다가올 때 머리카락을 움켜 줘야지 이미 지나친 후엔 붙잡을 수가 없다)이 저벅저벅 다가오고 있습니다. 지금이 기회이자 위기입니다. 뒷짐 지고 구경하기엔 우리의 의지는 너무 밋밋합니다.
풍뎅이는 쿨쿨 잘도 잔다. 언제 깨려나! 다시 밖으로 나왔다. 별을 보는데 별이 흐려진다. 눈을 깜박이니 별이 또렷해진다. 흐린 건 별이 아니라 내 눈이었다. 맑은 눈물도 시야를 가리는데 서로 총부리를 겨누며 보낸 반세기 동안 우리의 마음에는 이념의 때가 덕지덕지 끼었을 것이다. 지금은 이념 말고도 자기의 것을 조금이라도 버리지 않으려는 이기심이라는 또 다른 때가 엉긴 것 같아.
삼국을 통일한 것은 김춘추만의 힘이 아니듯 남북한을 통일할 사람도 김대중만이 아니다. 그럼 누구인가? 심 목사님의 말이 떠오른다. 이제는 통일의 가능성이 없던 시대를 지나 가능성의 시대가 되었다는 그 말. 깊은 숲 속에선 소쩍새가 울고, 그 소리는 더욱 숲 속으로 깊어진다. 새벽은 그만큼 다가오고, 그러면 풍뎅이도 다시 날갯짓을 하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