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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Oct 12. 2022

소년

@ 통영


딸깍. 치이, 치이, 칙.


낡은 테이프가 돌아간다. 누군가의 노래 소리가 흘러 나온다. 낯익은 목소리다. 내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젊은 엄마의 목소리다. 그리고 옆에 아기가 가끔 옹알거리다 까르르, 웃곤 한다. 엄마가 아기에게 다정하게 이야기를 해주곤 한다.


사춘기의 어느 날, 낡은 녹음 테이프를 발견했다. 호기심에 플레이시켜 본 테이프에는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아주 어린 시절이 담겨있었다. 햇살 따뜻한 창가 아래서 엄마와 아기가 놀고 있다. 엄마는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고, 나는 무얼 하고 있었을까. 창 밖에는 그 날도 바다가 하얗게 부서지고 있었을 게다.


그런 순간이 있다. 생각해보면 아릿하고 아름답지만 다시 돌아갈 수는 없는 순간들. 그 테이프는 어디로 사라졌을까. 잃어버린 것들이 나를 뒤돌아보게 한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떠난다. 햇살을 닮은 흥얼거림과 함께.




통영을 다녀왔어. 그 곳에 머물던 어린 시절에는 미처 몰랐던, 아릿하고 향긋하고 짭쪼름한 바다 냄새와 함께 집 나간 여행자를 맞이해주었지. 십대 소년이 벗어나고 싶어 하던 작은 동네가 이제는 사십대 남자가 돌아오고 싶은 곳이 되었더군. 조금 지쳤던 탓일까. 잠깐 고향의 품으로 돌아오니 마치 한동안 집을 나갔던 고양이 마냥, 바쁜 일상에서 무심코 지나쳤던 여기 저기 헤어진 구석이 눈에 띄었어.


해가 서서히 기울어가는 오후, 아내와 함께 바다가 보이는 산을 올랐지. 저 멀리 흐릿한 산등성이 너머 9월의 햇살을 가득 머금은 남해 바다가 붉게 빛나고 있었어. 그 환한 풍경을 바라보고 있노라니, 영혼 속에 잠들어 있던 오랜 기억의 일부가 아지랑이처럼 소록소록 되살아났어.


동네 앞 좁은 운하를 쉴 새 없이 파고들며 뒤척이던 새파란 물살, 평화롭게 반짝이던 오전의 은빛 바다, 햇살이 노곤한 어느 봄날의 유채 꽃밭, 가끔 창문을 덜컹거리며 울리던 요란한 뱃고동 소리들. 그 모든 것들이 내 안 어딘가 피가 되어 흐르고 있는 영혼의 풍경임을 어렴풋이 알 것 같았어. 어른이 되려고 애써보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늙어 버리고 싶지는 않은 소년이 그 곳에 서 있었어.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여행을 시작하지. 알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찾아 떠나고, 갖지 못한 것들과 놓쳐 보린 것들에 가슴 아파하고, 뼈아픈 실수를 되새기며 밤새 뒤척이던 날들을 보내며, 그렇게 어린 시절의 꿈과 선뜻한 현실 사이의 괴리를 느끼며 어른이 되어가. 그러다 보면 어느새 그나마 넘어져도 덜 아플 것 같은, 비교적 익숙한 길로만 다니고 있는 좁디 좁은 상자 속의 자신을 발견하게 되지.


시인 웬델 베리는 이런 말을 했어. "두 종류의 뮤즈가 있다. 하나는 영감을 속삭이는 뮤즈이고 다른 하나는 잊을만하면 나타나 ‘네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어려운 일이야'라고 일깨우는 현실적 뮤즈다. 이는 형태의 뮤즈이기도 하다. 형태라는 것은 우리를 가로막는 방해 요인이 되고 의도한 길을 가지 못하도록 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진정한 작업을 시작한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모를 때 비로소 진정한 여행이 열리는 것이다. 좌절하지 않았다면 몰두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냇물은 장애물에 부딪쳐야 노래한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자신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를 알아가는 과정일지도 몰라. 깊은 의문을 품고, 갖가지 장애물에 부딪히면서 자신의 껍질을 벗어나가는 과정. 그렇게 다른 이들과는 다른 오롯한 나만의 형태을 찾아나가는 길고도 짧은 여정 같은 것. 마치 연어가 거꾸로 강을 거슬러 올라 자신이 태어난 곳으로 돌아오듯이, 언젠가 이 길의 끝에 다다르면 내가 여기에 온 이유를 알게 되는 걸까? 


오랜만에 고향을 다녀왔는데 그 곳에서 소년을 한 명 만났어. 창 밖 너머로 부서지는 바다를 보며 한 소년이 서 있었지. 저 서산 너머에 따스한 오후 햇살이 가득 차오를 무렵이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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