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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센토 Oct 12. 2022

불꽃놀이

@아사쿠사


그녀의 손을 놓쳤다. 아니, 그녀가 내가 잡은 손을 빼고 저만치 앞서갔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곧 불꽃놀이가 시작될 도심의 거리는 혼잡했다. 사람들은 조금이라도 불꽃놀이를 보기 좋은 자리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움직이고 있었고, 지정된 관람 장소는 이미 가득차 경찰에 의해 통제되고 있었다. 그녀는 군중 틈으로 사라졌고, 내 몸은 습도 높은 한 여름의 열기로 땀범벅이 되어 흥건히 젖었다. 그 때, 저 멀리서 두둥, 하는 폭음과 함께 낮은 저녁 하늘 위로 작은 불꽃 하나가 피어 올랐다. 


여름밤의 꿈인 양 가을의 예감인 듯 불꽃놀이는 시작되었고, 여기저기서 사람들의 탄성이 흘러나왔다. 뒷사람들에게 어딘가로 끝없이 떠밀려가느라, 밤하늘을 끊임없이 수놓는 불꽃은 나무와 사람들에 가려 보이다 보이지 않다 했다. 혼잡한 군중의 어깨 너머로 그녀를 찾느라, 또 가끔 사람들의 함성에 이따금씩 하늘을 올려다보느라 정신을 못차리고 있을 때 누군가 내 손을 잡았다. 그녀가 키득, 웃음지었다. 허탈함과 안도감이 교차하는 혼란스러운 여름 밤, 또 다른 불꽃이 하늘을 수놓았다. 다행히 아직 불꽃놀이는 끝나지 않았다.




뜬금없는 시작이지만 서양 철학을 공부하는 데에는 2가지 방법이 있다. '부정의 방식'과 '긍정의 방식'이다. 부정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우선 서양 철학에 대해 알려면 철학자들이 무슨 주장을 하는지부터 알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서양 철학사의 주요 흐름에 대해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각각의 철학자가 기존의 철학적 견해에 대해 왜 그런 주장을 폈는지 윤곽을 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철학에서 사용되는 각종 개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아야 한다. 그러한 개념을 모르면 철학자들의 주장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뿐만이 아니다. 그리스어, 라틴어 등 고전 언어에서부터 독일어, 불어 등에 이르기까지 외국어도 숙달해야 한다. 그렇게 개념의 어원을 통해 접근함으로써 좀더 정확한 의미를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계속 나가다보면 서양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아주 많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고, 결국에는 얼마 가지 않아 지쳐 포기하기 십상이다. “철학이란 너무도 어려운 학문”이라는 사실만 확인하게 될 따름이다. 이러한 접근 방식은 자신의 무지와 무능을 끝없이 확인하는 ‘부정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


긍정의 방식은 다음과 같다. 


"평소 자신이 공부해보고 싶었던 철학자로부터 출발한다. 물론 처음부터 쉽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이전부터 관심을 갖던 철학자이므로 흥미를 잃지 않고 공부를 해나갈수 있다. 또한 자신이 궁금해하던 내용을 배울 수 있고, 이렇게 하다보면 새로운 궁금증을 풀고자 다른 철학자에게까지 관심사를 넓힐 수 있다. 다른 철학자를 더 알아보는 데 있어 이미 공부한 내용을 바탕으로 접근하게 되므로 아예 모르던 철학자보다는 훨씬 더 수월하게 공부할 수 있다. 철학에서 사용하는 여러 개념을 이해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자신이 처음에 공부한 철학자가 사용하는 주요 개념을 이해하면 이를 바탕으로 다른 철학자가 사용하는 주요 개념에 대해서 좀더 수월하게 이해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자신이 가진 욕망과 능력에서 출발하여 점차 더 많은 욕망과 능력을 갖는 방식으로 나아간다." **


지금까지 내가 했던 것은 첫번째 방법이다. 서양 철학을 공부하기 위해선 모든 철학자의 모든 주장을 알아야 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우선 철학사와 철학개론서부터 사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나 세상에는 철학자들만큼의 무수한 철학과 개념과 담론이 존재하고, 그것들을 다 이해하기에 나의 이해력은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니 제 풀에 지쳐 나가떨어지는 수 밖에.


모든 것을 다 할 필요 없이, 모든 이들을 다 이해할 필요도 없이, 그저 자신이 좋아하는 바로 그것에서 출발하면 된다. 나의 경우에는 스피노자에서 시작하면 되는 것이다. 스피노자를 읽다보면 아마도 스피노자를 좋아했던 니체와 들뢰즈를 읽게 될 것이고, 그들과 함께 우연성과 필연성이란 철학사의 두 개의 커다란 흐름도 만나게 될 것이다.


어떤 시작은 그리 어려운 게 아니다. 그리 거창한 것도 아니다. 멋지게 시작하는 방법은 작게 시작하는 것. 처음부터 크고 위대한 것을 하려 들지 말 것.  어느 아메리카 인디언 소년이 입문식에서 얻었던 조언처럼 “삶의 길을 가다 보면 커다란 구렁을 보게 될 것이다. 뛰어넘어라.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넓진 않으리라.” 그렇게 작고 소소한 것을 하다보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유유히 흐르는 어느 강 하구에 이르러 바다를 만나게 될게다.

 

완벽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 할 수 있는 것,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서 시작하는 것, 이것이 바로 시작의 비결이다. 지금 당장 내가 해야 하는 시작은 아주 작은 것들이다.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읽는 일. 무언가를 읽고 생각하고 쓰는 일. 매일의 일상과 낯선 곳에서 사진을 찍는 것. 그것들을 연결하고 편집하여 형상을 부여하는 일. 무엇보다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들을 묶어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


 


*, ** 손기태,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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