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ungpodae
서해를 향했다. 바다는 땅의 끝이다. 땅은 바다의 끝이다. 그런데 서해에서는 땅과 바다가 한데 섞여 있다. 어릴때 늘 보았던 남해와는 달리 서해에서는 모든 것이 뒤섞여 있고, 경계가 흐릿했다. 여기부터는 바다!라고 당당히 선언하는 동해와도 다르게 흙과 물, 선과 면, 견고한 것과 질퍽한 것이 한데 뒤섞여 있는 접경 지역이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히거나 혹은 어딘가 모르게 들뜨게 만들었다.
그 아득한 접경 지대를 서성이며 일몰과 일출을 보았다. 당연하게도 서해에서는 해가 바다로 졌고, 산 위로 떠올랐다. 일몰과 일출 또한 낮과 밤이 서로 뒤섞여 있는 것일테니 서해에 썩 잘 어울렸다. 그렇게 하루가 저물고, 또 하루가 시작되었다.
때로 어떤 이야기는 끝에서 시작된다. 모든 것이 끝난 시점, 더 이상 어찌해볼 수도 없는 그 지점에서 마치 기지개를 켜듯, 불현듯 이야기는 시작된다. 그러니까 피터팬처럼 마음껏 하늘을 나는 꿈을 꾸던 아이가 이제는 자신이 어떤 누구도 아닌 그저 - 자신을 도와주는 팅커벨도 없고, 마법가루 따위는 사용하지 못하는 - 평범한 어른이 되었음을 알게 되었을 때, 그때서야 비로서 진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작가 김훈은 대부도의 일몰을 지켜보며 ‘생성과 소멸의 종합으로서 함몰’하는 것이라 묘사했다.
일몰의 서해에서 소멸하는 것들은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하늘과 바다와 개펄에 가득 찬 빛의 미립자들은 제가끔 하나의 단독자로서 반짝이고 스러지지만, 그것들은 그 소멸의 순간순간마다 다른 단독자들과의 경계를 허물어, 경험되지 않은 새로운 빛의 생성을 이루면서 큰 어둠을 향하여 함몰되어간다. 떼지어 소멸하는 빛의 미립자들은 시공(時空) 속에 아무런 근거도 거점도 없이 생멸했고, 다만 앞선 것들의 소멸 위에서만 생성되었고, 앞선 것들의 생성 위에서 소멸되었으며, 생성과 소멸의 종합으로서 함몰하였다. *
우리의 삶 또한 그렇게 ‘함몰’하는 그런 것이리라. 해가 지는 것을 지켜보는 일은 꽤나 쓸쓸한 일일테지만, 변하지 않으면서도 늘 변화하는 자연 현상을 바라보는 것은 위안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삶의 어떤 경계를 지나면서부터 세상에는 더 이상 해가 뜨고 지는 것처럼 당연한 것은 없다는 것을 알게 되는 때가 온다. 나이가 들어 잇몸 속에서 어찌해볼 요량도 없이 이 뿌리가 흔들리기 시작하듯 어릴 적 그토록 당연하게 여겼던, 선명했던 꿈과 이상과 정의는 기반이 약한 모래 위의 건물처럼 마구 요동친다. 아차, 방심하는 순간 쌓아올린 모래성은 통째로 무너져 내린다. 그렇게 청춘은 느닷없이 막을 내리고, 젊음은 한창 때를 지나, 중년을 향해 달려 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여기에서 다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건 무엇일까. 굳이 이름 붙인다면 사랑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아직 남은 인생에 대한 사랑. 그리워했던 누군가에 대한 사랑. 아무것도 아닌 것들에 대한 사랑. 버려진 것들에 대한 사랑. 미처 가지지 못한 것에 대한 사랑.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없을지 모른다는 사실을, 우리는 예감하고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사랑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어이” 불러보는 어떤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진 팍팍한 일상만이 유일한 현실의 가능성일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꿈은 또 다른 현실이 될 수 있다고 “기어이" 믿고 싶은 것이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을 배우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어른이 된다는 것은 끝끝내 버릴 수 없는 그 무언가를 지켜내는 일이기도 하다.
우리가 지금도 헤매는 까닭은 아직 무언가를 사랑하고 있기 때문이리라. 막다른 길의 끝에서 아직은 끝이 아니라고 되뇌일 때 삶은 다시 시작된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우리가 사랑***이라고 부르는 그 무엇일게다.
* 김훈, <풍경과 상처>
** 김훈, <바다의 기별>
***
“사랑은 무엇보다 사랑의 대상이 포기되는 저편에만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 왜냐하면 그것은 법의 한계들을 넘어서 있기 때문이지요. 사랑이 살 수 있는 곳은 그곳 뿐입니다.” - 자크 라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