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살, 백수록을 써봅니다
32살 백수, 그 찌질한 기록의 시작
뜬금없지만 친구와 했던 연애상담을 시작으로 연재의 첫 글을 열어볼까 한다.
백수인생에 대해 썰을 풀 것처럼 하더니 왠 갑자기 연애이야기인가 할 수 있겠지만, 이 일화야 말로 내가 백수썰을 풀려는 이유와 가장 가까운 것 같다. 그러니 계속해서 썰을 좀 풀어보겠다.
때는 바야흐로 몇 년전(나이가 먹어서 그런가... 정확히 기억나는 법이 없다). 친구에게 뜬금없이 카톡이 왔다. 근처로 오겠다고, 오늘 좀 볼 수 있겠냐고… 당시 나는 상암동 근처에서 군복무 중이었고, 친구는 수원에서 근무 중이었다. 두시간이 넘는 거리를 퇴근길을 뚫고 오겠다고 하길래, 그럴 필요없이 중간쯤에서 만나자고 했다.
원래 그렇게 뜬금없이 만나던 사이라 무슨 일이 있을거라고 생각지 못했었다. 우리 사이는 조금 특별한데, 보통 연락없이 만나고 주말에는 잘 만나지 않는다. 평일에 번개처럼 만나 번개처럼 헤어지는, 일년에 몇 번 집중적으로 만나 한껏 풀어놓고, 한참동안 잠잠한 그런 사이다.
그 날도 그런 줄 알았다. 만나서 서로의 근황을 이야기하고 실없는 수다를 떨다가 헤어지는 여느 보통의 만남. 친구를 만나 듣게 된 근황은 충격적이라면 충격적이고, 흔하다면 흔하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덤덤히 적어 옮기자면 다음과 같다.
1. 몇 달전 친구 소개로 소개팅을 했다. 그리고 사귀었다.
2. 며칠 전 , 우연찮은 기회로 여자친구의 핸드폰을 보게 되었다.
3. 본인 외에도 많은 남자와 육체적 관계를 맺고 있었던 것을 알게 됐다.
여자친구의 이중생활을 알게 된 날, 친구의 오피스텔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당장 나가줬으면 좋겠다는 친구의 말에 그 여자친구는 미안하다면서 무릎꿇고 빌면서 버텼고, 강제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실랑이를 하게 되었다고 했다. 살면서 누구를 억지로 잡아끌어본 적도 처음이고, 주변에서 말로만 듣던 일의 당사자가 된 것도 처음이었다고 친구는 말했다.
그 이후에 이런저런 일들이 있었다고 하면서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모습이 참 괴로워 보였다. 믿었던 사랑에 배신당한 기분과 절망감, 분노, 짜증이 한데 뒤섞여 혼란스러운 모습이었다. 당시 친구가 일적으로도 힘든 상황이었기 때문에 그 먹먹함이 더 크게 다가오는 것처럼 보였다.
친구는 내게 ‘왜 이런 사람에게 마음을 줬을까, 그리고 난 왜 이렇게 사람 보는 눈이 없었던 걸까’ 하는 자책을 하면서 계속해서 술잔을 건넸다. 마음이 너무 아프고 어떻게 다시 사람을 만날 수 있을지 모르겠다고 하면서, 오피스텔에서 실랑이를 했던 그 순간이 잊혀지지 않는다고 했다. 내가 그런일을 겪게 될 줄을 몰랐다고….
서로 얼만큼 취기가 올라오고, 친구의 이야기도 어느정도 정리되어 보였다. 조용히 친구의 이야기를 들어주다가 조심히 입을 뗏다.
“나도 그런 적 있어…”
친구는 많이 놀란 표정이었다. 같을 수는 없지만 비슷한 이야기가 이번에는 내 입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당시 겪었던 일들과 경험들 그리고 그때의 감정들을 덤덤하게 말했던 기억이 난다. 그렇게 서로 이야기를 나누고 슬슬 일어날 시간이 다가오자 친구가 내게 이런 말을 건넸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냥 위로가 돼. 너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게.”
내가 쓰고 싶은 백수인생이란 솔직히 말해 ‘인생 실패록’이다.
32살, 주변은 한창 앞으로 나아가는 인생들 뿐이다. 오래 공부하던 친구들도 어느새 공부가 다 끝났고, 결혼한 친구들도 많다. 차를 사고, 부모님께서 집을 마련해준 친구도 꽤 있다. 금수저는 아니어도 다들 여행도 많이 다니고, 연애도 많이 한다. 인스타그램에는 온통 즐거운 모습들 밖에 없다.
내 주변에서 방구석에 틀어앉아 있는 건 나뿐이다. 뭘 준비하는것도 아니고 딱히 하는 일도 없이 찌그러져 있다. 말그대로 백수인생이다. 당연한 소리겠지만, 내 평생에 32살에 방구석에 찌그러져 있는 백수인생을 계획 해 본적은 없다. 솔직히 말하자면 내 32살은 조금 더 멋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뭐 어쩌겠나. 이렇게 되버린 것을.
그러다 문득 지금의 방구석 풍경과 감정들을 덤덤히 남겨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도 좀 쓰다보면 내 맘이 풀릴까 싶기도 하고, 인생 루져의 방구석 뻘소리도 나름 재밌을 것 같기도 했다. 평생 백수는 아닐테니까, 나중에 이 글들을 보면 감회가 새롭겠지 싶기도 하고, 무엇보다 이렇게 작지만 몰입할 일이 있으면 좋으니까...
그래서 마구잡이로 생각나는대로 지금의 소회들을 적어볼 생각이다. 그 와중에 조그만 욕심이 있다면, 이 뻘글들이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 특히, 나처럼 주변은 나아가고 있는데 내 삶은 주저 앉아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말이다.
“왠지 모르겠지만…. 그냥 위로가 돼. 너한테도 그런 일이 있었다는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