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쩡하게 생긴놈이 취직이 그리 어렵지 않은 상황인데도 일을 안 하고 있으니 주변에서는 나를 많이 의아하게 생각했다. 왜 일을 그만뒀냐는 말도 참 많이 들었고, 앞으로 계획은 있는지, 준비하는 일이 있는지 등등. FAQ를 만들어도 될 만큼 겹치는 질문들을 많이 받았다. 그만둔 이유는 있지만 계획과 준비는 없다. 계획적인 자기주도적 장기백수가 있다면 소개해 주시면 고맙겠다. 만나 뵙고 삶의 지혜를 경청하고 싶다.
잡소리가 길었다. 원체 잡소리가 많은 타입이라. 아무튼. 1년 가까이 일을 안 하고 있다보니 오해를 받고는 한다. 코인으로 돈을 벌어서 그렇다느니, 주식으로 돈 좀 벌었냐느니, 말로만 듣던 Young & Rich가 너였다느니등등. 실망스럽겠지만 나는 어디에도 해당이 안 된다. 그래서 나 역시 무척이나 아쉽다. 매우 아쉽다. (코인은 했었다. 단돈 삼천원. 그마저도 2019년 12월 현재 -56%다)
생각해보면 스무 살 이후로 벌이가 끊긴 적은 처음인 것 같다. 대학 입학 첫 학기와 수의사 국가고시를 앞둔 마지막 학기 말고는 계속 경제활동을 했던 것 같다. 그것도 가열차게 했었다. (이것으로 금수저 논란도 해명하겠다) 돌이켜보면 쉽지 않은 대학생활이었다. 매일 8시간 이상의 수업과 실습, 매주 3-4개의 크고 작은 시험과 4-5개의 과제 제출. 편도 1시간 50분의 통학거리.... 수업 끝나면 과외하고, 짬 내서 과제하고, 밤새서 시험공부하고,,,, 그러면 어느덧 토요일 오후. 일요일 아침부터 다시 과외의 반복.. (물론, 과장은 좀 됐다)
한 푼이라도 아껴야 했기에 최저 소비를 해야 했던 그 시절의 소비패턴은 이런 식이 었다.
1. 고정비용을 우선 제외한다. ex) 통신비, 월세
2. 하루를 30일로 계산한다.
3. 수입에 따라 1일 가용지출을 따져본다. 예를 들어 이번 달은 30만원을 써도 될 것 같으면 하루 1만원이다.
4. 1일 비용보다 안 쓴 날은 다음날로 이월한다. 주말 약속이 있으면 약속 전에 만원보다 적게 쓴 날을 늘리는 식.
5. 그렇게 주말 약속에 3-4만원씩을 쓴다. 주중에 만원도 안 쓴 날에서 빼놓은 비용 덕분.
한 달에 얼만큼 정해놓고 쓴 거랑 뭐가 다르냐고 물어볼 수 있겠다. 음,,, 이것은 순전히 개인차다. 나의 경우, 한 달 단위로 계산하면 월초에 많이 쓰고, 월말에 쪼들렸다. 그리고 사실 한 달에 사용하려고 마음먹은 돈이 30만원이었다면, 실제로는 여유돈이 더 있었기 때문에 낭비하는 성향이 뚜렷했다.
통장 쪼개기도 해 봤는데 잘 안됐다. 예금을 들만큼 수입이 일정했던 것은 아니었고, 다른 통장에 돈을 모아놓고 남는 돈은 없는 셈 치려고 해도 잘 안됐다. 멍청한건지 똑똑한건지 다른 통장에 남아있는 돈이 잊혀지지 않아서 자꾸만 쓰게 됐다.
그래서 어쨌든 '하루 비용 정해놓기'방법으로 지출관리를 꽤 잘했던 것 같다. 약속 없는 평범한 날의 지출은 아끼는 대신 약속이 있으면 맛있는 것도 먹고, 좋은 곳에서 데이트도 하고 그랬었다. 덕분에 평소 지출을 줄이는데 동기부여도 잘 됐다. 학식이 2500원이던 시절이라 돈 아끼기도 쉬웠다.
뜬금없이 대학시절의 소비패턴을 말하는 이유는 지금의 생활비 역시 그와 같은 방식으로 충당하기 때문이다. 백수생활 역시 마찬가지다. 고정비용을 제외하고 하루에 쓸 예산을 정해둔다. 약속이 있으면 약속 전까지 정해놓은 하루 비용보다 적게 쓴다. 지출을 최소로 아끼는 상황이 대학생때와 지금의 공통점이라면, 많든 적든 간에 소득이 있고 없고는 차이점이 되겠다. 지금은 소득없이 그저 모아놓은 돈을 까먹고 있으니까.
궁금할까 봐 까먹고 있는 자금의 출처도 적어본다. 수의대를 졸업하면 3년간 군복무를 하는데 복무기간 동안 마이너스 통장도 개설할 수 있다. 직업군인처럼 월급도 따박따박 나오기 때문에 보통 이때들 많이 논다. 정말 많이 논다. 말 그대로 빚내서 논다. 차를 마련하는 친구들도 많다. 어쨌든 나도 많이 놀긴 했지만 차를 사지는 않았고, 마통을 이용해 큰 사치를 해본 적은 없다. 그렇게 모은 돈과 제대할 때 받은 퇴직금, 제대 후 일하면서 받은 월급 등등이 모여 지금의 생활비가 되었다.
남아있는 돈과 예상 지출로 가늠하고 있는 백수기간은 앞으로 최대 1년. 그 사이에 변수는 얼마든 생길 수 있겠지만 최대한 버텨볼 생각이다. (그만큼 일을 쉬고 싶은 이유는 다음에 차차 썰을 풀어나가 보겠다) 미래의 시간을 끌어다 현재를 벌충하는 것 같은 괴로운 마음을 지울 수 없지만 조금 더 목적 없이 쉬어 보려 한다.
연차가 쌓일수록 생기는 경험과 높아질 소득의 기회비용을 생각하면 지금도 마음이 많이 아리고, 포기하고 있는 청춘의 마땅한 기쁨들을 생각하면 번뇌가 하루에도 수십 번 뇌리를 스친다. '뭐라도 할까, 일이 하기 싫으면 자기계발이라도 해야 될 것 같은데, 공부가 하기 싫으면 영상편집이나 포토샵, 바리스타 자격증이런거라도 따볼까' 하는 생각들도 마구마구 든다.
원체 걱정이 많고, 무엇하나 마음 편히 즐기지 못하는 성격이기 때문에 '그래도 괜찮아'를 의식적으로 되뇌이고 있다. 몰아치는 전공 공부와 실습, 과제, 시험에 치이면서도 잠 줄여가며 쉬지 않고 일했던 대학생활. 주변에 휩쓸리지 않고 뚝심있게 미래를 그려왔던 졸업 후의 시간들. 당분간은 그때 '젊은 날의 내'가 '지금의 나'에게 벌어준 시간에 감사하며 마음껏 이 혼란을 만끽해 볼 생각이다. 그래, 인생 이때 아니면 언제 이렇게 있을 수 있겠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