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쓰는 한 단어 『2010』, 김심슨님의 글
2010년 초 어느 겨울밤, 휴학 한 번 안 해보고 졸업을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충동적으로 2010학년도 1학기 휴학계를 냈다. 눈을 부라리는 엄마에게는 어학 공부에 매진하겠다는 핑계를 대고 6개월을 어떻게 보낼지를 고민하던 중 해외여행을 가기로 했다.
목적지는 일본 오사카. 당시 엔화는 고점을 때리다 못해 하늘을 뚫던 때였다. 휴학까지 해놓고 차마 부모님께 여행비용을 부탁할 수 없어 백화점 내 카페 미고의 설거지 아르바이트에 지원했다.
미고에서의 경험을 한 마디로 압축하자면, “존버”였다. 집에서 먹고 나온 설거짓거리를 유유자적하게 닦던 내 수준으로는 밀려드는 컵과 접시, 커트러리를 감당할 수 없었다. 난 손이 느리고 시도 때도 없이 컵을 깨는 사고뭉치가 됐다.
어느 날 점장의 꾸중에 눈물을 참지 못하고 직원용 화장실로 도망쳤다. 화장실에는 손님을 왕으로 응대하기 위한 각종 명언이 붙어 있었는데, 그날 내가 들어가 주저앉은 화장실 칸에는 남이 다가오길 기다리지 말고 먼저 다가가라는 문구가 있었다.
나는 그 문구를 읽고 뭔가에 홀린 듯 화장실을 뛰쳐나가 점장에게 고개 숙여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점장은 나의 저돌적인 사과에 매우 당황해 사과를 받아들이며 열심히 하라고 다독여주기까지 했다.
그날 이후로 나는 뭔가 변했다. 사고를 치면 지레 겁먹고 우물쭈물했던 예전과 달리 바로 사과하고 사고 수습을 했다. 설거지가 손에 익으면서는 컵을 깨는 빈도가 줄었으며 신속하고 깔끔하게 컵과 접시를 닦을 수 있었다.
오사카로 떠날 무렵에는 컵과 접시, 당시 개시한 빙수 그릇까지 완벽하게 닦아내는 설거지 파트의 노련한 알바생이 됐다.
미고는 오사카를 다녀오고 난 뒤 시간대를 옮겨 일하다 2학기가 시작될 즈음에 그만두었다. 엄마는 내게 휴학 기간 내내 설거지만 했냐고 다그쳤지만 그 아르바이트로 내가 얻은 건 꽤 컸다. 회피 성향이 있는 내가 책임감이라는 걸 배우고 어느 정도 버텨야 죽이든 밥이든 된다는 인내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설거지 기술까지 만렙이 됐으니 얼마나 얻은 게 많은가! 이후 나는 미고에서 얻은 기술을 발판 삼아, 2013년 대학로의 학림다방에서 신기에 가까운 설거지를 해 보이며 “인간 디시워셔(dishwasher)”라는 별명을 얻었고, 2014년 가르텐비어에서는 거지같이 생긴 1000cc 컵 세 개를 한 번에 닦아내며 우즈베키스탄 출신 아르바이트생의 감탄을 자아냈다.
그리고 그렇게 번 돈으로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녔다. 버스를 타고 북미대륙을 이동하며 오금 저렸던 일도, 대만에서 자전거를 타고 시내를 누비며 도서관을 찾아다녔던 경험도, 태국에서 밤낮없이 신나게 놀아 재꼈던 것도, 2010년 겨울밤 휴학계를 제출하고 설거지 아르바이트를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2010년 아르바이트를 시작한 이후, 난 정말이지 좋은 방향으로 많이 바뀌었다.“인생은 비가 지나가길 기다리는 게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것이다.”라 했던가. 나는 개수대로 떨어지는 물줄기 속에서 춤을 췄던 게 아닐까.
파편과 무례한 언행에 상처 입을 때도 있었지만 상처에는 금방 새살이 돋았고, 한 겹 더 단단해졌다. 뽀득하게 닦인 컵과 접시를 가지런히 정리할수록 내 추억도 층층이 쌓였다. 2020년 이젠 개수대 앞에 서서 돈을 벌지 않지만, 그때처럼 일터에서 사고도 치고, 고생도 하고, 상처도 받는다. 그러나 그 경험으로 내가 성장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기에, 난 “존버”하며 인생이라는 빗줄기 아래서 춤을 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