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다르게 적힐 말들, 23년 3월
개강과 맞닥뜨리고 나니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은 마음에 문득 드는 새삼스러운 의문이 있다. 계절의 순서를 논할 때 봄을 가장 앞에 두는데, 일반적으로 3월부터 5월까지를 봄이라고 한다. 즉, 계절을 기준으로 1년의 순환에서 3월이 가장 앞에 있다는 것이다. 그와 같은 맥락일까.
학교에서 매년 1학기의 첫날은 3월의 첫날이다. 학교에서도 1년의 순환에서 3월을 가장 앞에 두는 셈이다. 첫 번째도 아니고 두 번째도 아닌 세 번째 달이 되어서야 개시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어차피 이렇게 셈을 할 바에야 애당초 3월을 1월로 두는 게 맞지 않았을까. 양력 1월 1일, 음력 1월 1일, 양력 3월 2일 중 과연 언제가 1년의 첫날일까.
사실 잘 모르겠다. 절기와 역법을 전공하지 않고 있다는 비겁한 핑계를 앞세워서 슬쩍 눙칠 뿐이다. 이러나저러나 봄의 이미지를 품고 있는 3월은 액면가에 어울리지 않게 일상의 순환에서 첫머리에 놓인다. 이렇게 시작과 출발의 달로서 3월은 이미 확고한 지위를 점하고 있는데, 이제 최근 한국사회의 사정으로 시작과 출발의 맥락 한 가지가 더 3월에 얹어지지 않을까.
2022년 카타르 월드컵은 축구 역사에 남을 중요한 대회였다. 첫손 꼽히는 이유는 하나의 역사가 비로소 막을 내렸기 때문이다. 일찍이 소련의 해체를 목도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민주주의와 자유시장경제의 최종적 승리를 선포하며 마침내 역사가 끝났다고 선언한 바 있었다.
즉, 인류 역사상 최선의 정치‧경제 체제에 대한 논쟁이 마침내 끝났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동시대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화두가 되었던 하나의 역사가 가장 드라마틱한 해피 엔딩으로 마무리되었다. 2010년대를 수놓았던 두 명의 슈퍼스타가 있었다. 메시와 호날두는 세계 최고의 리그에서 역사상 손꼽히는 명문 클럽들이 각각 보유한 아이콘으로 활약하며 경이적인 경기력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20대 중반의 나이에 이들이 이미 단순히 ‘뛰어난 선수’의 퍼포먼스를 넘어서자, 사람들은 묻기 시작했다. 메시와 호날두는 펠레와 마라도나와 비견되는 수준을 넘어서 GOAT(The Greatest of All Time)가 될 수 있겠는가? 가능하다면, 그 단 한 자리는 과연 누구에게 돌아갈 것인가? 엎치락뒤치락 반전을 거듭해오며 장구한 축구 역사에 새로운 페이지를 덧붙여온 이른바 ‘메호대전’은 아르헨티나가 2021년 코파아메리카, 2022년 월드컵을 우승하며 마침내 메시의 승리로 끝맺게 되었다.
아르헨티나의 연이은 국가대항전 우승은 단순히 일개 우승에 그치지 않는다. 선수 위상을 논할 때 메시의 유일한 결점이 모두 해소됨으로써 2010년대의 ‘메호대전’을 넘어서 축구 역사상 GOAT를 둘러싼 논쟁을 불식시키는, 말하자면 최후의 대관식이었기 때문이다. 1987년생 메시에게 이번 카타르 월드컵은 마지막 기회였다. 선수 생활의 황혼기에 찾아온 마지막 기회에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퍼즐, 그야말로 화룡점정을 이루며 모든 서사가 완성된 것이다.
데뷔 이후 줄곧 최고였던 한 소년이 그려온 서사가 최고 중의 최고로 완성되었던 바로 그 순간, 이는 동시대 축구 역사의 마지막 페이지에 찍히는 마침표에 다름아니다. 누군가는 더 이상 축구라는 스포츠를 관람할 의욕을 잃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실 이 단락은 전체 글과 무관한 내용으로 통째로 삭제해야 마땅하지만 단지 메시 이야기를 주절대고 싶었을 뿐이다.)
메시의 월드컵이었다는 점 외에도 카타르 월드컵이 역사적이었던 또 다른 이유는 사상 초유의 겨울 월드컵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카타르 월드컵을 이야기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월드컵은 원래 여름에 열린다. 축구계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유럽 각국의 리그들이 휴식기를 갖는 기간이 여름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여곡절 끝에 카타르가 월드컵 유치에 성공하고 중동의 더운 날씨를 감안하여 이번에는 월드컵이 겨울에 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추춘제로 운영되고 있던 리그에서는 월드컵 휴식기를 갖게 되는가 하면, 가을에 수여되는 발롱도르에 월드컵 성적이 반영되지 못했다. 그리고 한국의 대학생들은 1학기 기말고사 대신 2학기 기말고사를 망치게 되었다. 하지만 현재 유럽 축구계로 전세계의 자본과 재능이 죄다 모이고 있는 이상, 유럽 리그 운영에 무리를 주는 겨울 월드컵은 아마 카타르 월드컵이 마지막이 될 것 같다. 즉, 축구 역사에서 카타르 월드컵은 처음이자 마지막 겨울 월드컵이 될 공산이 크다는 것이다.
겨울은 월드컵의 계절이 아니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엇갈린 계절에 월드컵이 열리게 되었다. 3월은 전국 단위 선거와 무관한 달이었다. 그런데 어쩌다보니 3월 초에 중요한 선거가 열리게 되었다. 알다시피, 5년마다 한국의 12월은 대통령선거로 활활 불타올랐다. 1987년 6월 항쟁의 결과 대통령직선제를 포함하여 개헌이 이루어졌고, 그 해 12월 16일에 대선이 있었다.
그 이후 한국의 대선은 12월 중순에 열려왔다. 그런데 박근혜 대통령이 2017년 3월 10일 파면된 데 이어서, 5월 9일 제19대 대선이 열렸다. 그리고 2022년 3월 9일 제20대 대선이 열렸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제21대 대선은 2027년 3월 3일, 제22대 대선은 3월 3일에 열릴 예정이다. 대학생들은 종강 즈음에 시험공부에 쫓기며 곁눈질로 개표방송을 힐끔힐끔 보지 않고, 개강의 와중에 떠들썩하게 둘러앉아 술마시며 개표방송을 볼 것이다.
개강 첫 주는 출석을 부르지도 않으니 참으로 적절한 위치선정이 아닐 수 없다. 대선이 12월에서 3월로 옮겨 옴에 따라 바야흐로 3월은 새 정부가 사실상 출범하는 획기적인 달이 되었다. 즉, 계절의 시작이었으며, 학기의 시작이었던 3월에 체제의 시작이라는 의미가 하나 더 덧씌워지게 되었다. 앞으로 한국 정치에 어떠한 격변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별일 없다면 3월은 선거의 달이 될 것이다.
겨울의 복판으로 돌진해가는 광경 안에 정몽준이 있었다면, 겨울의 칼바람이 가시고 이따금 봄기운이 문득 느껴지는 광경 안에 안철수가 있었다. 이제 우리는 대선을 떠올릴 때 꽃샘추위 탓인지 갓잡아온 듯 싱싱한 포로마냥 안철수가 초점없이 우두커니 서있었던 그 날의 날씨를 떠올리는 것에 더 익숙해질 것이다.
새 정부의 출범을 봄의 속성과 연결지어 보도하는 문장도 자주 만나게 될 것이다. 범람하는 말잔치 속에서 낭만적이고 싱그러웠던 3월의 이미지에 현실적이고 추접스러운 행태도 덧씌워질 것이다. 그렇게 3월의 이미지는 풍부해져 갈 것이며, 그만큼 씁쓸해져 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