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에게 다르게 적힐 말들, 23년 4월
「씁쓸한 3월」 , 김심슨
누군가 그랬다. 조깅이 원래 중국에서 유래한 한자어라고. 아침 조(朝)에 뛸 깅(?)을 써서 조깅이라는 한자어라는 것이다. 그럴싸한 소리면 무식이 탄로날까봐 주워들은 것을 얼른 엮어서 아는 체라도 하지, 아예 듣도보도 못한 허무맹랑한 소리는 차라리 모른다고 하는 편이 속 편하다. “조깅이 한자어라고? 그건 또 몰랐네.” 그렇다. 애초에 알 도리가 없다. 조깅은 한자어가 아니라 “jogging”이라는 영어 단어이다.
옛말에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하였던가. 조깅이 “jogging”이면 혹시 산책도 “sancheck”이려나. 자라니까 놀랐겠지, 솥뚜껑 따위에 놀랄 수는 없다. 산책은 “散策”이라고 쓴다. 의외의 한자가 나와서 어원을 찾아봤는데 누군가 또한 비슷한 궁금증을 가졌었다. 2021년 8월 21일 “종종”이라는 사람이 국립국어원에 산책의 어원에 대해 물었다.
그러자 “온라인 가나다”는 이번에도 비겁하게 가명 뒤에 숨어서, “안타깝게도, 우리말샘에 '산책'의 역사 정보가 남아 있지 않아 그 말의 어원을 알고 안내해 드릴 수가 없습니다. 질의해 주셨지만 도움을 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라고 답변하였다. 짐작건대, 散을 흩뜨리다, 한가하다 정도로 풀고, 策을 지팡이로 좁히면 산책은 현실의 번민을 내려놓고 지팡이에 기대어 천천히 걷는 일 정도로 생각할 수 있겠다.
사전적 의미로 보면 일상에서의 휴식 정도로 볼 수 있겠지만, 몇 명의 ‘산책자(Flâneur)’가 얹어지며 산책이 가진 의미와 기능이 더욱 심오해졌다. 일상 속 산책을 통해 자신을 둘러싼 세계와 만나고 그 즐거움을 밑거름 삼아 내면을 위로하고 의식을 살찌운 위대한 선각자들이 있었다. 이들에게 산책이란, 고독이라는 표현으로 응축되는 혼자만의 시공간에 들어갈 때 애용하는 지름길이었다.
여러 산책자 중에 가장 앞에 놓일 사람이라면 아무래도 루소가 꼽히지 않을까. 평탄하지 않은 일생을 살아왔던 루소는 만년에 이르러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자연 속에서 명상하면서 자신의 굴곡진 평생을 반추한 내용을 담은 글을 남긴 바 있다. '고독한 산책자의 몽상' 속 열 번의 산책에서 루소는 자신에게 모질었던 인간 군상들의 행태, 나아가 인간의 본질과 사회의 속성에 대해서 진솔함을 담아 말하고 있다.
루소 외에도 파리 거리를 거닐면서 즉흥적으로 시상을 얻곤 했던 보들레르나, 도시의 이곳저것을 직접 걸어다니면서 모더니티의 근원에 대해서 성찰했던 벤야민도 언급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한국의 공교육을 받은 이라면 대표적인 모더니즘 소설가 박태원의 자전적 인물 ‘구보’를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소설 속 묘사되는 ‘구보’는 서울 거리, 특히 청계천변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며 마주치는 것들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하고 나름의 감상을 덧붙인다. 근대 도시에서 일상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온갖 것, 그리고 그에 대한 소회를 풀어내며 지적으로 성찰하는 인물이라는 점에서 ‘구보’ 역시 보들레르나 벤야민과 흡사하다.
‘구보’, 보들레르, 벤야민, 이들이 겹쳐지는 교집합이 근대 도시를 배회하는 산책자의 전형적인 모습 아닐까. 이들 산책자들은 걸음을 옮기는 가운데 모든 감각을 벼려서 외부 세계에 집중하는 동시에 내면의 심연에 침잠해 들어갔다. 이 고요 속에서 일상에서 던져진 생각과 감정으로 얽힌 타래를 섬세하게 매만지며 그 안에 묻힌 의미를 찾곤 했다.
“그는 어딜 갈까, 생각해본다. 모두가 그의 갈 곳이었다. 한 군데라 그가 갈 곳은 없었다.”
“갑자기 걸음을 걷기로 한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도 갖지 않는다.”
‘구보’의 산책을 묘사하는 박태원의 말마따나, 산책자들은 자신만의 세계를 노닐며 목적없이 거리를 걷는다. 목적지는 없고 귀환지만 있는 여정이다. 이들에게 시계와 지도는 필요하지 않다. 기록 단축이나 목적지 도달 같은 목표보다는 걸음 하나하나로 이루어지는 과정을 위하여 걷기 때문이다.
정처없이 거리를 거닌다는 점에서 산책자들과 나란히 놓일 수 있는 사람들이 바로 부랑자들이다. 19세기 유럽에서는 도보 여행 유행이 절정에 이르며, 교외의 자연이든 도시의 거리든 걷기를 일삼는 사람들이 급증했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 �레미제라블�이나 �올리버 트위스트�에 보이듯, 산업혁명의 그림자로서 도시 하층 빈민들 역시 거리에 내몰려 범람하고 있었다. 이 시기 도로 교통이 점차 보급되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를 배회하는 이들은 길 위의 골칫거리이기도 했다.
그래서 당국에서는 이들을 부랑자로 여겨 단속하기도 하였다. 이에 산책자들은 개를 끌고 다님으로써 본인이 부랑자가 아님을 보이려고 했다는데, 아무튼 산책자든 부랑자든 거리의 사람이라는 점에서는 매한가지이다. 거리라는 공간이 배경으로 입혀짐으로써 이들의 행위, 즉 명상과 구걸이 비로소 완성된다.
이 거리의 사람들은 거리와 거리가 만나는 광장에 시나브로 고인다. 광장은 모두에게나 너그러운 공간이다. 독점적 소유로부터 애초 차단되어 있고 잠시간의 점유에 대해서도 어떠한 대가를 치르지 않아도 되는 열린 장소이다. 명상이든 구걸이든 거리를 경유해와 차곡차곡 쌓여 광장의 요소를 이룬다.
골똘히 생각하며 광장을 거니는 산책자의 시선에서 부랑자는 그곳을 채우는 ‘배경’의 일부에 불과하다.
“어려운 사람들이 모여 사는 곳이란 으레들 그러하듯이, 그 골목 안도 한 걸음 발을 들여놓기가 무섭게 홱 끼치는 냄새가 코에 아름답지 않았다. 썩은 널쪽으로나마 덮지 않은 시궁창에는 사철 똥오줌이 흐르고, 아홉 가구에 도무지 네 개밖에 없는 쓰레기통 속에서는 언제든지 구더기가 들끓었다.”
말하자면, 박태원이 묘사하는 ‘천변풍경’에 부랑자를 갖다붙여도 별다른 위화감이 없이 본디 그 자리에 있었던 것만 같다. 그런데 부랑자를 포함한 이 자연스러운 경관은 역시나 꺼림칙하다. 즉각적으로 불쾌한 감각을 불러일으키고 고요한 명상을 깨뜨리며 소란스럽게 한다. 특히 부랑자의 볼썽사나운 모양새는 때가 지고 악취를 풍기는 것, 불결하게 오염된 것, 몹쓸 질병을 유발하게 하는 위험한 것이라는 본능적인 거부감을 자극한다. 그에 대한 경계와 기피, 나아가 경멸은 어쩌면 자연스럽다.
도시적 생활양식에 걸맞지 않은 비위생적인 존재, 즉 결격한 존재를 조우한 것이다. 오줌자국과 가래침, 담배꽁초와 어울려 경관의 자연스러운 일부로 존재하던 부랑자가 불쾌한 감각을 매개로 마침내 결격한 존재로 불현듯 인지되는 순간 중대한 변화가 발생한다. 부랑자가 배경에서 걸어나와 하나의 인격으로 ‘의식’되는 것이다.
산책자는 이제 그에게 어떠한 서사를 부여할 필요를 직면한다. 그러한 가운데 자신도 모르게 그에게 연민의 감정을 품게 된다. 그는 어떠한 사연이 있길래 저러한 차림으로 거리에 나앉아 있는 것인가. 그가 오늘을 살아내기에 구걸로 얻은 것으로 과연 충분한가. 매일이 ‘오늘’이라면 그에게 과연 ‘내일’이라는 것이 존재하는가. 그가 가진 조건을 가지고 미래를 계획할 수 있는가.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위에서 자신을 계획하고 실현해가는 과정을 박탈당한 자를 과연 인간이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러한 권리를 박탈당한 사람에게 연명은 오히려 잔인한 것 아닌가. 생존 가능 여부를 두고 순진한 호기심을 갖는 단계를 넘어서 동등한 인간으로서 그에 이입하여 실존의 본질에 대해 의구심을 품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이제 부랑자는 도시민으로서의 자격을 잃은 낙오자가 아니라 도시민으로서의 권리를 잃은 구제의 대상으로 다시 상상된다. 산책자는 그를 다시 의식하며 어떠한 사회적 감각을 더듬는다. 사회라는 상상된 공동체 안에 부랑자 또한 시민권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는 점을 새삼스럽게 상기하고, 그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자신이 가지는 어떠한 책무를 어슴푸레 감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감각이 악세사리같은 싸구려 연민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이 사회가 나아질 수 있는 단초를 제공할 수도 있음을 스스로 납득시키려고 한다.
예컨대, 위태로운 처지에 내몰린 부랑자들은 비가시적인 배경으로 존재하다가 우발적인 nuisance로 비로소 모습을 드러내곤 하는데, 이를 예방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우리 사회’를 더욱 안전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서 주목해야 하는 지점은 어디인가. 이에 대한 해답은 무엇보다도 사회의 가장 취약한 지점, 언제라도 하나의 사태로 번질 수도 있는 잠재적인 위험 요소에서 찾아야 한다. 이에 산책자는 사회에 대한 고민의 일환으로서 부랑자들을 새삼스럽게 의식하고, 그들의 위태로운 처지를 직시하려 한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친 산책자는 더욱 도발적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진다. 부랑자의 구걸은 분명 미관상, 위생상 해롭다. 구걸이 가진 해악은 사회 안에서 어떻게 관리되어야 하는가. 구걸은 전적으로 해로운 것이어서 전적으로 박멸되어야 하는 것인가. 구걸을 법적으로 금지하는 조치는 과연 합당한가. 구걸의 근절이라는 목표는 애초 달성 가능한가. 설령 가능하다면 이를 통해서 구현되는 표백된 광장은 그만큼 ‘완전한’ ‘진보된’ 사회로 이끌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이 아니라면, 부랑자의 구걸이 없는 광장은 오히려 사회 안 어떠한 요소의 결락을 드러내는 증거가 아니겠는가. 부랑자의 구걸이 근절됨으로써 이 사회가 도리어 놓치게 되는 것은 무엇인가. 부랑자의 구걸이 담당하고 있던 사회 안의 어떠한 기능이 무엇이었던가. 우리는 구걸에서 어떠한 ‘감화’를 얻어 왔던 것인가. 이제 산책자는 자신을 돌이켜보며 구걸의 어떠한 사회적 기능, 나아가 공익적 효과를 되짚어본다.
기본적으로 구걸에는 상대가 존재해야 한다. 바로 그 상대에게 자신의 곤궁이나 필요를 표현하고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다. 자신이 어떠한 한계지점에 도달해있음을 표현하는 것인 동시에 상대에게 어떠한 행동을 직접적으로 요구하는 사회적 표현이다. 부랑자는 한 사회가 안고 있는 빈곤이라는 문제를 자신의 존재로써 사회 구성원에게 드러내 보인다. 거리의 뭇사람들에게 이는 어떠한 불편함이다. 껄끄러운 소음과도 같다. 그러나 이를 통해 무엇이 문제인지 직시하고 그로 인한 해악을 경감할 계기를 마련할 수 있다.
이제 사람들은 질문을 던지고 토론을 요구한다. 이는 비단 부랑자 개인의 편의를 위함이 아니다. 부랑자를 포함함은 물론, 자신을 비롯한 이 사회 구성원 전반을 이롭게 할 수 있는 사소한 소통이다. 그렇다면 결국 구걸이라는 것은 사회 안에서 어떠한 공익적 기능을 수행하는 셈이다.
가령 아름다운 꿈을 품고서 사회에 어떻게 이바지할지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가 그야말로 ‘정답’을 찾는다면, 밀실 안에 틀어 박혀 활자가 새겨놓은 세계, 노랫말이 들려주는 세계에 몰두할 것이다. 너무도 뜨거운 말들, 너무도 달콤한 말들에 둘러싸여 희망에 가득차 있을 것이다.
비유컨대, 신원호 피디가 연출하는 그런 장밋빛 사회의 낭만적인 도래를 낙관할 것이다. 때때로 술에 취해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아직 세상에 없는 말로 떠벌릴 것이다. 세상에 이미 있는 말로 지어내기에 그곳은 너무도 아름답기 때문이다.
언설에 그칠 것이 아니라 진정 사회에 선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싶어하는 사람이라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광장으로 향해야 한다. 거리를 지나 광장에 나가 부랑자를 만나야 한다. 땅을 딛고 걸으며 세상을 마주하고 사람에 대해서 궁리해야 한다. 오감을 불쾌하게 하는 꼬락서니들을 보며 환멸을 느끼겠지만 참아내고 직시해야 한다. 지겹고 지겹더라도 문득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설령 다시 해이해지더라도 아랑곳할 필요 없다, 그것이 자연스러우니까.
자신의 비위를 계속 담금질하고 의식을 더욱 날카롭게 벼리면서 이 ‘이질적인’ 것들에 대한 면역력을 갖춰야 한다. 이것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떻게 대하고 어떻게 표현할지 연습이 되어 있어야 한다. 진정 아름다운 사회를 꿈꾼다면 부랑자들이 ‘선을 넘어’ 자기 일상에 들어오는 것을 거부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그러한 ‘사태’를 기꺼이 사회의 조건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구걸하는 부랑자와 조우하면서 그는 그렇게 사회화가 된다. 처음에는 조우였던 것이 점차 일상이 되면서 그는 점차 사회와 접속하고 그 안에서 자신의 위치를 감각하게 된다.
요컨대, 산책은 어떠한 마음을 일깨우고 자라게 한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동네 한 바퀴를 산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