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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우성 May 26. 2019

음악가 정태춘

노래 이후의 노래



정태춘은 대한민국 대중 음악사의 소중한 개척자다. 그는 더 이상 노래를 부르지 않지만, 노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다행이다. 우리 시대는 ‘정태춘’을 갖고 있다. 기념하고 기록할 위대한 자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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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안에 언어들이 있어요. 그것들이 나오는 거예요.” 정태춘이 말했다. 나는 정태춘을 잘 모른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TV에 정태춘과 박은옥이 나온 걸 봤다. 관객이 박수 치며 반가워했고, 둘은 노래를 불렀다. 사랑받는 음악가라고 생각했다. 

나는 1980년에 태어났다. 정태춘과 그의 부인 박은옥이 첫 앨범을 발표한 건 1978년이다. 40주년을 기념하는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가 4월부터 연말까지 이어진다.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나는 올해로 마흔 살이 되었다. 억울하다. 정태춘과 박은옥이 데뷔 40주년이면, 나는 38세가 되어야 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둘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노래를 불렀다.

“세상과 불화하며 살았어요. 아, 이건 아닌데, 하는 것들이 제 가슴속에 있었어요. 그것에 대해 이야기할 도구가 필요했어요.” 정태춘이 최근의 작업들을 한 장씩 넘기며 말했다. 그는 나에게 그것들을 보여주고 싶어했다. 글자들이었다. 노래가 아니라. “최근 10년 동안 한시를 썼어요. 일기처럼 썼던 것 같아요. 처음엔 한문 공부를 했고, 그다음엔 자연스럽게 시가 써졌어요.” 그가 자신이 쓴 한시의 음을 읽으며 뜻을 말해주었다. 나는 그 작업들이 꽤 근사해 보였는데, 이상하게 그는 부끄러워했다. 소년 같았다. “그런데 한시는 소통이 잘 안 돼요. 한자가 어렵잖아요. 그래서 한글로 쓰기 시작했어요.” 그는 한글로 쓴 시들을 보여주며 읽어주었다. 마찬가지로 멋졌다. 그는 그 작품들을 ‘붓글’이라고 불렀다. 올해 이 작품들을 전시한다.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 중 하나다. 

사진 위에 쓴 ‘붓글’도 있었다. 훌륭한 미술 작품이었다. “글자 작업 이전에 사진을 찍었어요. 그러다가 붓글까지 온 거죠. 사진 위에 글자를 쓰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어요.” 그는 물처럼 흘러 지금 이곳에 와 있는 사람 같았다. 정말로 그에게서 물소리가 났다, 고 적으면 추상적이겠지만, 나는 분명하게 들었다. 

“여기 ‘반상反(상… 어떤 한자인지…)’이라고 도장이 찍혀 있죠. 제가 하고 있는 시리즈예요. 상업주의에 반대한다는 의미예요.” 나는 그 단어 자체는 새롭지 않다고 생각한다. 문명의 이기를 비판하고, 자성하는 작품은 이미 많다. 그러나 그의 작품들이 나에겐 안타깝고 아련하고 소중하다. 그가 매우 진지하게 ‘반상’을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 순간 알았다. 그의 언어, 그의 글자, 그의 사진, 그의 사상(이라는 표현이 적절할지 모르겠지만!)이 왜 인상적으로 다가왔는지. 단단했기 때문이다. 책으로 배우거나, 누군가에게 받은 영향을 피상적으로 표현한 게 아니다. 그는 몸으로 얻은 것을 드러낸다. 이건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다. 수 백 편의 시를 쓰면서 나도 스스로 알게 된 것이다.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절실하게 고민한 자의 감각은, 분명히 무엇인가 다르다. 그러니 부끄러워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프게 고민한 자는 결국 주저앉으니까. 

“상업주의는 열외를 인정하지 않아요. 모든 것이 이익의 논리로 귀결돼요. 그것은 인간을 소외시키는 거예요. 그 안에서는 제가 하고 싶은 말을 할 수가 없어요..” 정태춘은 1980년대와 1990년대를 대표하는 음악가다. 누구나 아는 얘기다. “2002년에 낸 앨범을 끝으로 사실상 음악 활동을 정리했어요. 2012년에 앨범을 발표했지만 저에게 의미 있는 작업은 아니었어요. 그런데 제 안에, 무엇인가 말해야 한다는 욕망이 있었고, 그게 자꾸 바깥으로 나왔어요.” 사진을 찍고, 한시를 쓰고, 한글로 시를 쓰게 된 이유다. 아, 그는 계속 노래를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음악가 정태춘이 걸어온 길을 짧게라도 언급해야 저 ‘노래’의 의미가 명확해질 것 같다. 내가 공부한 바에 의하면 정태춘과 박은옥은 1970년대 데뷔한 뮤지션 중 드물게 ‘전국 투어’가 가능했다고 한다. ‘음반 사전심의제도 철폐’를 위한 비합법 음반 <아, 대한민국..>, <92년 장마, 종로에서>를 발표하며 대중음악의 표현의 자유를 위해 투쟁했다. 전교조 지지 순회공연 〈송아지 송아지 누렁 송아지〉을 통해 사회운동에 동참했으며, 미군기지 확장 이전을 반대하는 ‘대추리 평화예술’ 운동을 진행하기도 했다. 정태춘과 박은옥은 노래로 할 수 있는 것을 해왔다. 아, 대한민국 현대사에 정태춘과 박은옥이 있어서 다행이네….  

정태춘 박은옥 40 프로젝트에는 음악, 미술, 학술, 공연 분야의 전문가들이 참여한다. 면면이 화려하다. 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이 정태춘과 박은옥의 역사를 기록하고 기념하고 싶어한다. 변혁과 진보의 시대였던 1980년대와 1990년대를 관통한 둘의 음악에 무엇인가 담겨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는 그 시대를 논할 자격이 없고, 또한 그것의 맥락을 잘 모른다. 그러나 짐짓 아는 체하며, 대한민국 대중음악이 어떻게 지금에 이르렀는지 알기 위해서는 저 둘이 음악으로 거둔 성취를 돌아보아야 한다고 적을 수 있다. 그것은 사실일 것이다. 

4월부터 서울, 부산 등 15개 도시에서 콘서트가 열린다. 40주년 기념 앨범, 관련 저서, 학술 대회도 마련되었다. 헌정 저서, 헌정 앨범, 헌정 공연도 이어진다. 내가 특히 주목하는 것은 10월 공개 예정인 아카이브 자료집이다. 대한민국 대중음악이 표현의 자유를 얻게 되는 과정, 그 자유를 바탕으로 음악가가 현실에 참여하는 용감한 현장을 담은 기록집이 될 것이다. 동시대 대중가요가 어느 날 갑자기 우주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기록해야 합니다. 그래야 이후를 도모할 수 있어요.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낼 수도 있고요.” 정태춘이 말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이룩한 역사를 거룩하게 받들지 않는다. “모든 것을 냉정하게 판단해야 해요. 저희가 해온 작업들이 어떤 의의를 가질지 제3자의 입장에서 보아주기를 바랍니다.” 

이 프로젝트에서 그가 가장 기대하고 있는 것은 ‘붓글’ 전시다. “제가 이 상업주의 시대에 저를 닫는다고 했는데, 붓글을 하면서 자연스럽게 다시 말을 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어떻게 봐줄지 굉장히 기대되고 궁금해요. 저는 이 작업을 오랫동안 이어가고 싶어요.” 아마 그 자신, 스스로 비판한 상업주의 안에서, 붓글을 통해 위로받지 않았을까. 나는 그에게 붓글 작품을 구입하고 싶다고 말했다. 진심이다. 정말 갖고 싶다. 보고 있으면 마음의 상처가 회복되는 것 같다. 마치 노래를 듣는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리고 나도 무엇인가 쓸 수 있을 것 같다. 그게 시가 되면 좋겠고. 

중요한 질문이 남았다. 선생님, 상업주의라는 저 거대한 흐름을 어떻게 막겠어요. 원하든 원치 않든 이제 누구나 그 안에서 살아야 하는 거잖아요, 내가 물었다. 그가 주저하지 않고 대답했다. “그것을 막을 수 있는가 없는가는 중요하지 않아요. 문제의식을 갖는가 그렇지 않는가가 중요해요.” 함께 있던 사람들이 마치 깨달음을 얻은 듯 아,라고 발음했다. 나는 그러지 않았다. 이성적으로 이 세계를 바라봐야 하니까. 그것이 작가의 소임이니까. “그렇지만 저도 이 프로젝트를 하면서 저를 상업주의에 내놓고 있어요. 그래서 제 자신이 아주 궁색하게 느껴져요.” 그는 계속 부끄러워한다. 그래서 오히려 내가 부끄러워졌다. 나는 그가 냉정하게 동시대를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한다. 실천하는 예술가로서, 여전히, 그 자신의 언어에 귀 기울이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여전히 노래를 부르고 싶어한다. 그것은 노래 이후의 노래이며, 시대 바깥의 노래다. 누군가 듣던 듣지 않던 그 노래에 담긴 절심함은 귀하다.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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