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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멜버른앨리스 Mar 08. 2019

죽순이하던 서점, 반디앤루니스가 나를 인터뷰하다

2018년 10월, <서점에서 만난 사람> 작가 인터뷰 전문




좋은 학교, 직장, 집 … 한정된 무엇인가를 위해 끝없이 싸워야만 하는 한국. 박가영 작가는 그 치열한 경쟁의 세계에서 벗어나 호주 멜버른으로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고,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전단지를 돌리는 알바부터 편의점 캐셔, 백화점 주차 도우미, PC방, 만화방, … 웨딩홀 도우미, 사무보조 등등. 13년이라는 시간을 알바몬으로 살아온 그는 현재 호주의 한식 비스트로 두 곳을 운영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멜버른 구석에 작은 책방을 차리는 새로운 꿈을 꾼다.


『이민을 꿈꾸는 너에게』에는 이민을 마음먹은 순간부터 이민 준비 과정, 그곳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한 생각까지 담겨 있다. 박가영 작가가 호주에서 요리를 만나 반짝이는 ‘나’를 찾았듯, 무기력을 느끼는 고단한 청춘에게 수없이 많이 시도하며 도전하고 변화하기를 간절히 바랐다. 그와 서면으로 나눈 인터뷰를 전한다.


사진 제공= 박가영 작가 ⓒ정제니(@jennyj_snap)



  



- 브런치북 프로젝트 은상 수상 축하드립니다. 첫 책을 출간하신 소감을 여쭙고 싶어요.

브런치에 글을 올리기 시작할 때는 경증 우울증이 오래 가서 무기력할 때였어요. 한국에 두고 온 것들과 정신 없이 달리기만 한 8년의 이민 과정을 늦게나마 정리를 해야할 것 같았고, 주변의 이민을 생각하는 많은 친구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들을 모아 두고 싶었거든요. 그래서 새벽에 글을 하나 하나 써서 올렸죠. 그런데 뜻하지 않게 ‘브런치북 프로젝트’라는 일종의 공모전에서 수상을 하게 되면서 많이 놀랐어요. 제가 학교생활을 거의 손 놓고 겨우 졸업만 해서 공모전 같은 것은 남의 이야기라고 생각했거든요. 살다 보니 내가 상을 받고 하는 일도 있구나, 했었는데 거기다가 출판사에서 출간 제의도 받아서 책도 내게 됐죠.


지금 생각해도 사실 실감이 잘 안 나요. 한국에서 늘 지나다니던 서점에 제 책이 전시되어 있다고 친구들이 사진 찍어 보내 주는데 저는 아무래도 멜버른에 있으니까 잘 믿기지가 않아요. 이번에 한국에 가서 서점에 있는 제 책을 만져 보면 조금 실감이 날 것 같아요.


- 이 책은 제목 그대로 이민을 생각하는 사람에게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내용도 담고 있지만, 한국에서의 노동, 교육 시스템, 두 나라의 생각의 방식의 차이 등 사회적 차원의 이야기를 하는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떤가요?

한국에서 힘이 들었어요. 학교를 다닐 때부터 고민을 참 많이 했던 것 같아요. ‘학교’라는 시스템 자체에 의문이 많았어요. 제가 늘 국어는 만점, 수학은 빵점이었거든요. 너무 못하니까 수학 선생님이 저를 매일 불러서 문제 풀라고 시키고, 손등을 때렸는데 1년 동안 그걸 하니까 아무 감각도 없이 기계적으로 하게 되더라고요. 1년을 매일 지치지도 않고 때리는 선생님께 손을 대고 멍하니 맞으면서 ‘아니, 계산기 쓰면 되지 이런걸 배워서 어디다 쓴다는 거야?’ 생각만 했어요. 배우고 싶지 않은 건 아니었는데 쓸데없는 걸 외우는 데 시간 낭비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국어 시간에도 그랬어요. 예를 들면 저희가 김소월 시인의 시를 공부하면서 ‘화자의 현재 감정은? 의도는?’ 같은 질문에 대한 답을 정해 놓고 시험을 보잖아요. 그런 것들이 너무 말이 안 된다 싶었어요. 저자가 본인 작품에 대한 해석서를 쓰고 죽은 것도 아니고, 본인한테 물어 볼 방법도 없으면서 이걸 왜 정답이라고 우기는 건가 싶었어요.


연대로 벌 서는 것도 힘들었고, 따돌림도 자주 당했고, 선배들한테 린치, 학교 선생님들한테 성추행도 몇 번 당하면서 학교 생활을 하다가 17살 되자마자 아르바이트를 구해서 학교가 아닌 사회생활을 처음 했어요. 그런데 학교 밖에서가 훨씬 덜 부당하고 안전한 느낌이 들었어요. 훨씬 합리적이고 납득이 가는 곳이라고 해야 하나요, 한국 교육 제도에 대해서는 지금도 정말 부정적인 입장이에요.


호주가 한국보다 70배가 큰데 인구는 반이에요. (국토의 많은 부분이 척박한 땅이라 사람이 살기 어렵기 때문에 단순 비교는 불가하지만) 호주에서 1명 살고 있는 땅에 한국에서는 140명 산다는 거죠. 호주는 보면 땅덩이가 너무 넓고 자원이 넘쳐나도 개발을 못하거든요, 사람이 없으니까. 그래서 계속 이민정책으로 인구를 늘리려는 노력을 했던 거고요. 지금은 급격한 인구 증가를 사회적 인프라가 감당하지 못해서 잠시 중지한 상태지만요.


한국이나 홍콩 같이 우수한 노동력을 원동으로 단시간에 성장한 나라들은 그 압축성장에 대한 성장통을 필연적으로 겪는 거 같아요. 사람도 갑자기 쭉 늘어나면 살이 다 터지고 아프고 그러잖아요. 좁은 땅덩어리, 한정된 자원이라는 한계를 극복할만큼 우수하고 많은 인재가 있다는 게 어떻게 보면 양날의 검인 것 같아요. 세계 최고로 우수한 수많은 인재들을 뒷받침할 만큼 땅덩이와 여력이 없다 보니 미어터지고 찢어지는 느낌이죠.


한국에서 가장 피곤했던 것은 경쟁으로 단련된 너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너무나도 적은 한정된 무엇 (괜찮은 유치원, 괜찮은 학교, 괜찮은 집, 괜찮은 직업…) 을 놓고 일생을 끊임없이 싸워야 한다는 점이었어요. 몇 십 대 일, 몇 백 대 일은 예사로 듣는 확률이다 보니까 일단 무기력해지는 거죠. 중간을 따라가기도 벅찬데 저 경쟁률을 어떻게 뚫고 사람 구실하지? 싶은 생각이 계속 들었죠. 100대 1을 뚫고 공무원이 된다고 해서, 화려하고 멋있게 자아 실현하면서 사는 것도 아니고 평생 밥벌이 걱정 안 해도 되는 정도라는 점이 허망했죠.


학창시절까지는 10대답지 않게 밝고 풋풋하지 못하고 우울하다고 욕먹다가, 성인이 되어서는 되려 나잇값도 못하고 칠칠치 못하다고 욕먹는 것도 힘들었어요. 나는 변한 게 없는데 왜 자꾸 나잇값이라는 걸 대입시켜서 이건 모자라고 이건 과하다며 나라는 사람을 칼같이 재단하려는지, 이런 게 이해가 잘 안 갔죠. 원래 그런 거야, 하면 그런가 보다 하면 되는데 저는 그게 잘 안됐어요. 그래서 아마 적응을 못했던 거겠죠. (웃음)


어린 생각을 틀에 가두지 않았다면, 세상에 다양한 삶의 방식이 있다는 걸 보여줬더라면, 한 번쯤은 어떻게 살지 진지하게 고민해봤을 텐데. 어른이 되기 전에, 이렇게 힘들어지기 전에. (263쪽)



사진 제공= 박가영 작가 ⓒ정제니(@jennyj_snap)



- 첫 레스토랑 ‘수다’를 열게 된 이야기가 참 흥미로웠어요. 불공정 거래로 시작된 계약이지만, 이제는 “보기만 해도 설레는” 존재가 되었다고요. 수다에서 수없이 많은 사람을 만났을 것 같은데, 특히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가 있다면요? 

멜버른 시내의 작은 한식 비스트로로서 수다라는 공간을 저희가 얼마나 운영할지 모르잖아요. 그래서 저희는 되도록 다양한 시도를 하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요. 음식점으로 기능을 떠나서 복합적으로 - 한인 내 커뮤니티에서나, 한국과 호주 문화를 연결할 수 있는 - 문화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곳이기를 바랐거든요.


한 번은 멜버른 대학교 의대에 다니는 여학생들이 아프리카로 의료봉사를 간다고 해서 그걸 지원하려고 한인 여성분들과 함께 벼룩시장을 연적이 있었어요. 그 수익금으로 천과 반짇고리 등을 사서 생리대를 만드는 법을 가르치고, 콘돔을 배포하고 에이즈 및 성병, 여성에 관련된 위생을 교육하는 취지였는데 크게 성공적이진 않았지만 뿌듯했어요.


저번 달에는 멜버른에 〈쇼미더머니 6〉의 넉살 씨가 공연을 오셨거든요. 멜버른의 특징 중 하나가 ‘예술과 다문화’인데 한국의 힙합 문화를 이 도시에 알리는 게 굉장히 의미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호주 현지 프로덕션팀과 제휴해서 마케팅도 함께 하고 공연을 잘 마무리하고 가실 수 있게 전반적인 지원을 했어요. 그 덕에 저희 직원 전부가 공연에 초청받아서 좋은 시간도 보냈고요. 넉살 씨도 멜버른에 대해서 따뜻하고 좋은 기억을 가지고 가신다고 하더라고요. 멜버른 주재 한국 영사관과 함께 주요 대학교에서 매년 하는 “K-POP FESTIVAL”에도 음식을 도맡아 하기도 하고 이런저런 문화 행사에 많이 참여해요.


그 외에도 레스토랑이니까 이런저런 행사도 많이 해요. 기억에 남는 걸 몇 개 꼽아 보자면 한번은 한국음식을 한번도 안 드셔 본 호주 70세 할아버지의 칠순 잔치를 의뢰 받은 적이 있어요. 다 시골 분들이셨는데, 호주 각지에서 오셨는데도 너무 잘 드시는 거예요. 세상에 이런 음식도 있었냐고 하시면서요. 어떤 분은 하루를 꼬박 운전해서 왔다고 하시더라고요. 함께 전쟁에 나가서 싸웠던 전우들을 죽기 전에 한자리에서 볼 수 있어서 이 기쁨에 눈물이 난다고 하시면서 젊은 시절처럼 우리가 웃고 떠들고 새로운 음식을 먹어 보는 지금, 다시 ‘Young’해진 것 같아서 너무 행복하다고 하시는데 저도 눈물이 막 났어요.


그리고 제 친구이면서 전 직장동료인 조지의 약혼파티도 기획부터 기억이 나요. 그리스와 호주와 한국을 버무려서 최고의 약혼 파티를 만들어 보자는 이상한 결의를 했었는데 굉장히 성공적이었어요. 정말 ‘멜버른스러운’ 파티였던 것 같아요. 상세 정보는 다음 링크를 참고해주세요! :-) https://brunch.co.kr/@alicemelbourne/88


- 책의 마지막 문장을 끝마치는 날이 조국을 향한 짝사랑을 끝마치는 날이 될 것이라고 하셨지요. 한국을 향한 그리움, 사랑하지만 미워하는 마음…. 출간 이후 한 달여의 시간이 흘렀는데 어떠신지 궁금해요.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사실 저는 한국이 미운 거지 싫은 건 아니었거든요. 보통 싫은 건 진짜 싫은 거지만 밉다는 건 감정은 사실 실망이나, 서운함에 가까운 것 같아요. 애정이 기본으로 깔려 있기 때문에 형성되는 감정이라고 생각해요.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작은 책상 자리 하나 내어 주지 않는 인색함, 조금 다르다고 해서 비주류라고 가차없이 선을 그어 버리는 무정함, 대열에 발맞추어 못 따라가는 나 같은 건 댕강 꼬리 자르듯 잘라버리는 냉혹함 같은 게 밉고 서운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호주로 와서는 계속 한편으로는 한국을 그리워하고, 한편으로는 다시는 가고 싶지 않았어요. 진저리 치게 싫고 상처받은 기억만큼 따듯하고 좋았던 기억들도 많으니까요. 지지리 지지고 볶고 싸우던 연인과 헤어진 후 비슷한 감정인 것 같아요.


그때는 싫고 떠나고 싶다는 생각뿐, 근본적으로 왜 미웠고,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는 생각해 본 적이 없었거든요. 그런데 책을 쓰며 뒤늦게 되짚어 보는 시간 속에서 제 자신과 한국 사회를 더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어요. 이런 저런 환경에서 내가 이런 사람으로 자랄 수밖에 없었듯이 한국도 이런 저런 환경을 겪으면서 그런 특성을 지니게 됐던 거구나, 하고 이해를 하게 되더라고요. 글을 쓰고 소통하면서 저와 비슷한 사람들이 참 많다는 걸 알게 된 것도 큰 위로가 됐고 같은 언어를 쓰고 문화를 공유하는 한국인들 간의 따뜻한 연대가 얼마나 소중한지 깨달았죠.


그런 긍정적인 부분이 있는가 하면 솔직히 말하면 다시 학을 뗀 부분도 있었어요. 제 책이 기사화되어서 네이버 메인에 여러 번 떴었는데 악플이 어마어마한 거예요. 각종 외모 품평부터, 입에 담지 못할 수준의 악플까지……. 엄청 다양하더라고요.


해외에서 막강한 경제력과 자금력으로 현지를 씹어 먹는(?) 중국인들은 보면 본국에서도 이민자 동포들에게 우호적이거든요. 어디에 살던, 피가 섞여 있다면 뿌리는 중국이다, 라는 자긍심을 심어 주는 거죠. 그들이 잘되면 국가 이미지와 발전에 도움도 주고 다음 세대가 해외에서 더 뻗어 나갈 수 있도록 튼튼한 발판이 되면서 전체적으로 무시할 수 없는 입지를 다지게 되니까 중국 현지 경제에도 큰 도움이 되거든요. 선순환이 이루어지는 거죠. 그런 것들을 보면 좀 부러워요. 한국이 싫다고 외국 나갔으면 그냥 그 나라 사람으로 살아라, 한국 덕 보려고 하지 말고! 한국에서 책 내고 돈 벌지 마라! 한국도 너 같은 건 싫어한다! 같은 이야기를 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놀랐어요. 한국이 싫어서 떠났는데 왜 한국 음식으로 돈 버냐고 욕하는 사람들도 많았고요. 여전히 흑백 논리와 폐쇄성이 짙은 사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전 세계적으로 국경의 울타리는 점점 낮아지고 있잖아요. 국가와 민족이라는 개념은 약해지고 인류라는 개념은 강해지고 있죠. 각국의 경제와 문화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근접하게 교류하고 발전하고 있고요. 이 와중에 ‘한국인은 한국에서만, 한국 돈은 한국에서만, 아니면 매국노!’ 라는 논리가 얼마나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어요. 먼 곳에서 열심히 살고 있는 다양한 한국인들, 2세들, 이민자 교포들도 같은 뿌리를 가진 사람들로서 포용하고 응원하고 더 함께 잘되면 안 되는 걸까? 하는 생각이 많이 들었던 것 같아요. 좀 씁쓸했죠.



사진 제공= 박가영 작가 ⓒ정제니(@jennyj_snap)


- 다양한 이야기를 소재로 브런치에서 글을 쓰고 계시지요. 특히 인종차별, 성차별을 바라보는 관점, 대처 방법 등을 적어 두셨어요. 그런 환경에 처했을 때 목소리를 내는 것, ‘프로불편러’로 살아가는 것이 중요한 까닭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시는지요?

갑질, 차별, 혐오는 ‘바퀴벌레’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요. 어쩌다가 집에서 바퀴벌레가 한 마리 보이면 어떤 사람은 ‘어쩌다가 한 마리가 나왔네? 그럴 수도 있지. 한 마리가 나왔다고 해서 큰 일은 아니야’ 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런데 또 다른 사람은 바퀴벌레 한 마리가 우리 눈에 보일 정도로 기어 나왔다는 건 이미 어딘가에 다 숨어서 알 까놓고 열심히 서식 중일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잖아요. 저는 이럴 때 후자에 가까운 것 같아요. 어떤 혐오와 차별이 눈에 뜨인다는 건, 어쩌다가 운 때가 맞아서 보게 된 게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음지에서 쉬쉬하면서 다 숨어 있다가 은연 중에 튀어 나온 거라고 봐요. 세상에 까발려져서 눈에 보이고 냄새 날 정도면 음지에서부터 곪아 터졌을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작은 문제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보통 차별하는 사람들이 악의를 가지고 그런 행동을 하는 경우는 드물어요. 여태까지 괜찮았으니까, 쾌활한 농담처럼 했을 때 다들 웃어 줬으니까 그냥 하는 거거든요. 서툰 영어를 따라한다든지, 중국 특유의 말소리를 흉내낸다든지, ‘넌 한국인 치고 00하다’, 등의 말을 할 때 웃으면서 ‘오, 인종 차별주의자다!’ 하는 식으로 놀리면 본인들이 더 흠칫 놀라요. 아니라고 웃어넘기지만 그 후로는 눈에 띄게 조심하는 게 느껴져요.


중요한 건 피해자로서 저의 감각을 예민하게 만드는 것만큼, 제가 무의식 중으로 하는 차별에 대해서의 민감성을 키우는 일 같다고 생각해요. 내가 불편한 걸 집어 내는 건 쉽지만 남이 내가 아무 생각 없이 한 말을 지적했을 때 수긍하고 사과하는 건 정말 어렵거든요.


예를 들면 저는 누가 저한테 다짜고짜 “니하오” 하면 기분 나쁜데 저도 백인들한테는 대부분 국적을 묻지 않고 “헬로”라고 하거든요. 한번은 백배커에서 저한테 “니하오” 하는 친구한테 정색하면서 “야, 나 한국인이야” 했는데 그 친구가 “그래? 나는 프랑스인인데 네가 나한테 헬로! 할 때 그냥 이해했어. 나쁜 의도가 아니니까.”라고 하더라고요. 제가 백인의 대부분은 영어를 한다고 생각하는 만큼 이 친구도 동양인의 대부분은 중국어를 할 줄 알았다고 하더라고요. 상대방은 나와 다른 사람이니까 내가 해석하는 의도와 다른 의도를 가지고 있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상대를 대하는 자세도 중요한 것 같아요.



사진 제공= 박가영 작가 ⓒ정제니(@jennyj_snap)


- 개인적으로도 작가님의 아프고 어두운 일들을 읽으며 함께 분노하고, 작가님과 닮아 있던 지난 날을 돌아보면서 그때의 감정을 다시 도닥일 수 있었습니다. 작가님께서 생각하시는 글의 힘은 무엇인가요?

없는 집에서도 엄마가 책을 많이 빌려다 줬어요. 몸이 약해서 밖에서 잘 못 노니까 집에만 있었거든요. 친구가 별로 없고 관계를 맺는데 서툴었기 때문에 책에 많이 빠져 살았던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글 쓰는 것도 좋아했죠. 생각을 말보다 글로 표현하는 게 더 편했어요. 그러다가 중학생이 되면서 소위 ‘노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또래 집단에 어울리게 됐는데, 그때부터는 책은 혼자 읽어도 글은 안 쓰게 되더라고요. 제가 생긴 게 진짜 책 안 읽고 말 안 듣게 생기다 보니까 안 어울린다는 소리를 많이 듣기도 했고. 찐따(?)나 ‘덕후’같은 이미지가 될까봐 싫었던 것 같아요. 또래들 사이에서 ‘쿨하고 잘 나가는’ 친구처럼 보이고 싶은 마음이 글을 쓰고 싶다는 마음을 누른 거예요. 그렇게 성인이 되고 나서는SNS에 올리는 글조차도 혹시나 ‘오글거리는 흑역사’가 될까봐 망설였고요.


결국에는 남들이 어떻게 나를 볼까 하는 것때문에 내가 제일 좋아하던 일을 굉장히 오랜 시간 못했던 건데 지금은 정말 많이 후회가 돼요. 가장 힘든 시기에 글을 썼다면, 내가 진짜 어떤 생각을 하고 있고 어떤 감정인지 정리를 해서 옆에 있는 사람에게 보여 줄 수 있었다면 내 20대가 그렇게까지 바닥을 치지 않았을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많이 들거든요. 저한테는 ‘글’이 가장 정확하게 제 감정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인 것 같아요. 가장 소통하기 편한 방식이기도 하고요. 사실 저는 전화통화보다는 모바일 메신저가 훨씬 편하고, 회의보다는 이메일로 주고받기가 훨씬 일하기 좋거든요. 예전에는 그게 너무 ‘아웃싸이더, 덕후, 찐따’ 같다고 생각해서 싫었는데 지금은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어요. 제 자신이 ‘활자’라는 소통 방식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사람이라는 걸요.


- 젊은 세대가 좋아할 한식을 위해 긴 시간과 노력을 들여 고민하고, 연구하셨을 것 같은데 그때 도움 받은 책이 있는지 궁금합니다. 소개해주실 수 있을까요?

책은 안 봤어요. 한국 요리책은 사실 ‘가정에서 해 먹기 좋은 요리’, 아니면 ‘대박집 비법!’ 혹은 ‘자취생을 위한 요리’ 등으로 천편일률적이에요. 아이디어 얻을 만한 건 별로 없어요. 굳이 꼽자면 제일 공부할 만 했던 건 ‘사찰 음식’ 요리책들이었어요. 없는 자원으로 맛있는 음식을 해먹어야 하는 환경이 밑바탕이 되다 보니까 재료 선정에 한계도 없고 레시피도 자유롭거든요. 사찰 음식이라는 게 기본적으로 채식이고 건강식이다 보니까 베지테리언이 많은 멜버른에서 굉장히 경쟁력이 있어서 도움이 되었어요.


- 특히 좋아하는 작가가 있는지, 또는 독서 습관은 무엇인지 궁금합니다.

장강명 작가를 정말 정말 좋아해요. 제 책을 읽고 쓰신 리뷰 중 가장 좋았던 게 『이민을 꿈꾸는 너에게』를 『한국이 싫어서』 에세이 버전이라고 했던 이야기였어요. 과찬인 건 알지만, 그래도 기쁘더라고요.


  






장강명 작가의 책은 다 좋아하는데 우열을 떠나서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5년 만에 신혼여행』이었어요. 타고난 글쟁이, 작가라는 건 이런 거구나. 흉내 낼 수도 없겠다 싶더라고요. 책 한 권 쓰려고 세계일주를 몇 년 하는 사람들도 있잖아요. 아무리 많이 보고 경험을 해도 본인이 소화해서 책에 녹여낼 수 있는지, 완성도 있는 재미있는 책을 쓸 수 있는지는 다른 문제잖아요. 그런데 이 『5년만의 신혼여행』은 제가 본 여행에세이 중 손꼽히게 재미있었는데 3박 5일 여행사 상품으로 보라카이 다녀오고 쓴 책이에요. 3박 5일! 충격적이었어요. 장강명 작가의 책이 독자로서 제일 잘 맞아요.


그리고 저는 세태소설을 좋아해서 젊은 작가님들, 구병모 작가, 정아은 작가, 최은영 작가 책들 너무 사랑하고요. 일본 작가 중에는 온다 리쿠가 제일 좋아요.


저는 술을 좋아해서 맥주나 싼 와인을 홀짝홀짝 혼술 하면서 새벽에 책 많이 보는데…… 이것도 습관이라면 습관인가요?(웃음)


- 셰프로서, 또 작가로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도 여쭙고 싶어요.

올해로 셰프생활이 10년차예요. 요식업은 18년째고 제 사업을 한지도 5년차네요. 출간으로 갑자기 저라는 사람이 주목을 받았지만 사실 제가 잘나서 혼자 이룬 건 아니고 같이 고생한 파트너, 인테리어팀 동업자, 저를 믿고 따라와 준 저희 팀들이 뒤에서 받쳐 줬기 때문에 이렇게 오래 버틸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고생했던 우리 모두가 충분히 나눠 먹고 각자 행복할 수 있도록 파이를 좀 더 키워 보려는 게 단기적인 목표예요. 다른 팀들과 합작으로 올해는 새로운 레스토랑도 하나 더 오픈하려고 준비 중이고 멜버른 코트라와 함께 한식을 멜버른에 알리는 프로젝트도 준비 중이에요. 저는 이제는 셰프 자리에서는 한 발자국 물러나서 전반적인 기획과 교육에 전념할 생각이고, 제 자리는 동생들이 맡겠죠.


몇 년 안에 이루고 싶은 건 멜버른 구석에 아주 작은 책방을 차리는 거예요. 아주 작은 공간을 양측으로 나눠서 한쪽에는 제가 직접 읽어 보고 추천하는 한국 책을 소개하고 판매하고, 다른 쪽에는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말을 배우고 싶어하는 현지 친구들에게 필요한 교재와 자료들을 판매하고 싶어요. 종종 한국어 무료 강좌도 열고요. 한쪽에는 아주 작게 제가 노트북 놓고 글 쓰고 ‘혼술’할 수 있는 공간도 마련하고 싶어요. 그게 지금은 제일 하고 싶은 일이에요.


- 독자 분들께 자유롭게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출간 3주안에 2쇄를 찍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책이 생각보다 많은 사랑을 받아서 기쁘면서도 한편으로는 기분이 이상했어요. 그 때의 나처럼 ‘이민을 꿈꾸는 너’ 가 아직도 많구나. 아니 오히려 더 많아졌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책이 잘 팔린다고 기뻐해야 할지 아니면 10년간 변한 게 없는 현실에 우울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제 생각에, 저희 20~30대 청년층은 분노하고 투쟁하고 현 세태를 변화시켜 보려다가 우리 세대에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 같아요. 일본의 사토리 세대와 비슷한 면이 있죠. 지금은 내가 나름대로 ‘숨구멍’ 뚫고 알아서 생존하면 그만. 집을 사고 애를 낳을 수 있는 환경을 위해 노력하고 투쟁하다가 그게 의미 없다 싶어진 거죠. ‘그렇게 힘들단 말이야? 그럼 집 안 사면 되지. 애 안 낳으면 되지, 나만 잘살다 죽으면 되지’ 라고 생각하게 되는 거예요.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여행과 경험으로 만들어 가는 개인의 취향 등에 집중하게 된 건, 이렇게라도 청춘을 낭비하지 않으려는 몸부림이거든요. 저도 그랬고 사실 지금도 그래요.


죽도록 ‘노오력’하지 않는다는 기성세대의 말이 안 통하는 건 지금 세대들이 똑똑해서라고 생각해요. 수지타산이 안 맞거든요. ‘무한 노력으로 내 청춘을 쥐어짜서 죽도록 저축한다’는 인컴을 집어넣었을 때 받아 볼 수 있는 아웃컴이 너무 초라해요. 노후가 보장되고 중산층으로 내 자식 잘 키우고 안락하게 살 수 있다는 게 어느 정도 보장만 된다면 긴 인생에 청춘 정도는 담보 잡아 볼만 하겠죠. 평생을 위해서라면. 그런데 아니잖아요. 청춘은 다 가고 나이만 먹고 보장된 건 아무 것도 없는 것 보다는 청춘이라도 즐기는 게 남는 거죠. 제 생각은 그래요. 청춘의 값으로 살 수 있는 ‘안정’이라는 게 예전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터무니없이 싸졌다는 걸 기억해 주셨으면 좋겠어요. 저축하지 않고 죽도록 노력하지 않고 한국 사회를 비난하고 ‘이민을 꿈꾸는’ 청년들을 비난하기 전에요.


책의 주 독자층인 20대, 30대 동생 친구분들께 제가 감히 드리고 싶은 말은요.

아까 말씀드렸던 저희 세대가 답답한 일상에서 숨쉬기 위해 뚫는 ‘숨구멍’ 있잖아요. 이 숨구멍은 뭐든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소확행, 새로운 세계로의 여행, 취미, 새로운 취향 찾기, 새로운 걸 배워 보기 등등. 사실 뭐든지 될 수 있는 것 같아요. 많은 숨구멍을 시도해 보셨으면 좋겠어요. 저한테는 호주행, 요리라는 새로운 길, 그리고 이민 결정이 가장 큰 숨구멍이었어요. 환경을 바꾸면서 내가 가진 나도 몰랐던 성격들을 취향을 찾듯이 발견하고 조금씩 나를 위한 결정들을 해 나가는 게 저한테는 큰 도움이 되었던 것 같아요.


소확행, 작은 여행, 독서 등등의 작은 숨구멍부터 이직, 새로운 배움, 이사, 심지어 이민처럼 큰 숨구멍까지 최대한 많이 뚫어 보다 보면 분명히 숨이 탁 트이고 편안해지는 지점을 찾을 거라고 믿어요. 이민까지 갈 필요는 없어요. 저는 가장 극단적인 형태인 이민을 택했지만 사실 서울만 벗어났어도 살만했을 수도 있어요. 요리만큼 저한테 맞는 일들이 있었을 수도 있죠. 한국에서의 저는 새로운 숨구멍을 시도할 만큼의 여유도 없었던 것 같아요. 시도를 많이 해보지 않고 지레 ‘내가 잘하는 일은 없어. 내 자리는 없어’라고 스스로 한계선을 그려 버렸던 것이 지금도 후회가 많이 돼요. 실패했던 것, 거절당하고 상처받았던 기억에는 지금도 후회가 전혀 없는데, 도전해 보려다가 포기하고 시도하지 않았던 일들은 후회가 많이 되더라고요.

크고 작은, 본인을 위한 수많은 시도들을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박가영은…

1983년생, 스물다섯 개의 알바를 전전하던 천덕꾸러기, 모태 미스핏. 현재는 호주 멜버른에서 한식 비스트로인 수다SUDA와 네모NEMO를 운영하고 있는 어엿한 오너 셰프. 호주로 도피성 워킹 홀리데이를 떠났다가 그곳에 아예 눌러앉게 되었다. 멜버른에 자리 잡기까지의 과정과 고민들, 머나먼 멜버른에서 한국을 바라보며 하는 생각들을 책에 담았다. 브런치에서도 때론 언니처럼, 때론 친구처럼 이민과 호주 이야기를 솔직하게 털어놓고 있다. 브런치 필명 멜버른앨리스. https://brunch.co.kr/@alicemelbour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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