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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Feb 21. 2017

유브 갓 메일의 스타벅스에서

뉴욕 영화 여행: 영화에 담긴 스타벅스 이야기

만나기로 한 사람에겐 아직 연락이 없었다.

나와는 다른 비행기를 타고 오는 중이라 어떤 일로 늦어지고 있는지 확인할 방법도 없었다.


그러고 보니 딱히 가보고 싶은 곳이 없다. 물론 '가야 할 곳'은 많았지만 적어도 지금은 아니다. 눈이나 비가 오지 않은 데에는 하늘에 감사한다. 그런데 이왕이면 옷을 여며도 파고드는 세찬 바람까지 어떻게 손을 써주셨으면 좋겠다.


지나가는 외국인이 아직도 6시밖에 안됐어! 8시는 된 것 같은데.

라면서 놀라기에 나도 8시는 된 줄 알았다며 속으로 맞장구를 쳐줬다. 해가 유난히 이르게 지는 까닭에 저녁이 상당히 길게 느껴진다.



LOST IN NEW YORK.


나홀로 집에 2편 제목이다. 내가 지금 그짝이기도 하고. 카페라도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TKTS 뒤편 스타벅스에 가봤는데 여기는 사람들의 유동률을 높이려는 의도인지 테이블과 의자가 없었다. 구석에 몇 개 놓여있는 것 같긴 한데 당연히 빈자리는 없었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기어이 카페를 가야겠다면 유브 갓 메일의 그 스타벅스를 찾아가 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79번가 스테이션으로 이동했다. 거기는 사람이 덜하겠지. 라는 무사안일한 태도로 말이다.





79번가 79 ST STATION.


유브 갓 메일의 스타벅스가 있는 곳이다. 79번가 역에서 나오니 확실히 관광객으로 보이는 사람이 적었다. 아예 인적이 드물었다고 하는 편이 옳을지도 모르겠다.


역에서 나오자마자 이름 모를 성당이 보였다. FIRST BAPTIST CHURCH. 혹시 여기가 섹스 앤 더 시티에서 미란다와 스티브가 아들에게 세례식을 했던 곳은 아닐까? 문득 궁금해져서 검색해봤는데 역시나 아니었다. 그럼 그냥 지나가는 것으로.



유브 갓 메일 You've Got Mail


유브 갓 메일에서 죠 폭스(톰 행크스)와 캐슬린 켈리(멕 라이언)는 뉴욕에 살고 있는 뉴요커다.

두 사람은 메일을 주고받으며 호감을 쌓아간다. 그 상대방이 몇 블록 떨어지지 않은 가까운 거리에 살고 있다는 사실은 전혀 모르는 채로 말이다.


이때 톰 행크스가 멕 라이언에게 보낸 메일 중 스타벅스에 관한 단상이 있었다.


유브갓메일 (1998)


"스타벅스 같은 곳의 목적은, 결정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위한 것 같아요. 커피 한 잔을 사기 위해 여섯 가지의 결정을 해야 되니까요. 쇼트, 톨, 라이트, 다크, 카페인, 디카페인, 로우팻, 논팻. 그러니 2달러 95센트를 가지고 뭘 할지 모르는 사람들은 단순히 커피 한 잔만이 아니라 자아까지 발견하게 되는 거죠. 톨 사이즈, 디카페인, 카푸치노!


유브 갓 메일에 등장했던 79번가 스타벅스


서로의 존재를 모르는 채로, 그러니까 상대방이 어디에 사는지 어떤 직업을 가지고 있는지 하물며 이름도 모르는 사람에게 호감을 품을 수 있을까? 현재로서 나는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 제쳐두고 중요한 건 대화가 통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이유에서. 웃게 할 수 있는 사람이면 된다. 유브 갓 메일이 짚어준 맥락처럼.


톰 행크스와 멕 라이언은 메일을 주고받으며 자신의 관심사를 공유한다. 멕 라이언이 좋아하는 책에 관하여 이야기를 하면, 톰 행크스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흥미를 보이는 책이니 자신의 취향이 아니어도 굳이 읽어보려는 수고를 들인다. 그 사람과 공통된 무언가를 만들기 위해서 노력하는 것이다. 어디까지나 당신을 이해하여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마음이 있으니까. 그리고 이것은 곧 좋아한다는 마음의 증거가 되기도 하고.


유브 갓 메일 (1998)


스타벅스에 대한 톰 행크스의 단상도 마찬가지였다.

자신이 생각하는 스타벅스를 그녀에게 이야기해주고, 마침 같은 스타벅스를 찾은 멕 라이언은 톰 행크스의 지난 말을 떠올리며 웃음을 짓는다. 일상의 별것 아닌 장소도 그 사람으로 인해서 다시 생각하고 느끼게 되는 것이다. 유브 갓 메일이 말하는 사랑의 힘이란 것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나저나. 여기는 골목 모퉁이에 있는 스타벅스이니 자리가 적어도 한두 개는 남아돌아야 정상 아니야?

스타벅스의 고향은 미국인데 왜 이렇게 사람이 많지?


이상한 기준인데, 그 나라의 것이면 그 나라보다는 해외의 인기가 더 높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스타벅스든 맥도날드든. 자국에서는 웬만하면 현지인들도 다른 카페를 더 이용하겠지, 뭐 이런 엉뚱한 생각. 막상 쓰고 보니 출처를 모르는 편견은 맞는 것 같지만. 그래도 그렇지 모든 자리가 채워져 있는 데다가 테이크아웃을 위해 사람들이 줄을 서 있기까지 한 풍경이라니. 뉴욕 한복판에 이제는 정말 갈 곳이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자리 하나가 났는데 옆에서 대기 중이던 또 다른 사람이 기가 막힌 속도로 그 자리를 차지한다.

이런 광경까지 목격한 이상 여기에 머무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라고 판단. 결국 아이스 모카 한 잔만 사서 반강제로 테이크아웃을 했다. 흥, 어차피 영화에서도 두 주인공 모두 테이크아웃을 했으니까 괜찮아, 라고 스스로 합리화를 시작했다.


이 추운 날 아이스를 시킨 건 또 어쩌자는 건지.




79st station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드에서만 봤던 트리 판매 지를 봤다.

나무들이 일렬로 놓여있고 그 앞에는 조명이 들어간 산타가 우뚝 서 있었다. 시트콤 프렌즈에서 조이가 아르바이트를 하던 풍경과 비슷하다. 비록 피비가 나무들이 불쌍하다며 조이의 영업을 방해하고는 했지만. 트리용 나무를 고르고 있는 사람들까지 보았다면 더 완벽했을 텐데. 미국의 크리스마스 풍경이란 이토록 따뜻했다.





프렌즈 위드 베네핏 Friends With Benefits


다시 타임스퀘어로 돌아왔다.

한 시간 전보다도 사람이 배로 불어나 있었다. 공간 없이 빼곡하고 생생한 풍경을 보면서 문득 영화 한 편이 떠올랐다. 바로 저스틴 팀버레이크와 밀라 쿠니스의 프렌즈 위드 베네핏.



남자와 여자 사이에도 우정이라는 것이 존재할까?

전에는 있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있을 수 없다는 쪽으로 돌아서는 중이다. 그리고 이 영화는 한참 그런 생각으로 골똘할 때 작위적인 쐐기를 척척 박아준 작품이다.


프렌즈 위드 베네핏은 비록 뻔한 설정에 클리셰는 다분할지라도 뉴욕을 담은 풍경만큼은 생기로운 영화다.

LA의 잘 나가는 아트 디렉터 딜런(저스틴 팀버레이크)과 뉴욕의 헤드헌터 제이미(밀라 쿠니스)가 보여주는 사랑과 우정 사이를 그리고 있다. 제목 그대로 육체 관계를 가지면서 친구 사이 유지가 가능한 것인가, 라는 택도 없는 질문을 던지는 유쾌한 로맨스.



제이미는 직업 제안을 받아들이기 전, LA를 떠나는데 대해서 고민하던 딜런을 타임스퀘어로 끌고 온다. 이 흔한 관광지에 데리고 온 이유에 관해 궁금해하던 딜런 앞으로 광장에 모여있던 수많은 사람들은 갑자기 플래시 몹을 시작한다. 한 장소에 모여 하나의 행동을 취한 후 끝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제 갈 길로 흩어지는 짤막한 깜짝 공연. 전 세계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서 하나의 춤을 추며 순간을 즐기고 있는 모습에 감동한 딜런은 그 자리에서 뉴욕의 GQ 아트 디렉터 직을 수락한다.



버드맨 Birdman


영화니까 가능한 설정?


아니다. 적어도 타임스퀘어라면 가능한 일이다. 군중 속에서 화보를 촬영하든 프렌즈 위드 베네핏처럼 단체로 플래시 몹을 하든. 시위자들이 알몸으로 거리를 행진하든. 그런 내 맘대로의 분위기가 공기 중을 떠다니는 자유로운 장소다. 우스꽝스러운 행위를 하는 사람도 그것으로 관심을 받고 사진이 찍히며 순식간에 유튜브 스타가 될 수 있는 하나의 무대와도 같다고 할까. 왜, 영화 버드맨에서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도 속옷 바람으로 타임스퀘어를 행진(?)하지 않았나.


리건 톰슨은 한때 슈퍼히어로 '버드맨'으로 톱스타였지만 현재는 한물간 배우로 전락하여 연극 '사랑을 말할 때 우리가 이야기하는 것'으로 재기를 꿈꾸는 인물로 등장한다.


영화에는 그가 연극 중 잠시 담배를 피우러 나온 사이 문이 닫혀버려서 속옷 바람으로 바깥을 빙 돌아 다시 극장 정문으로 향하는 웃지 못 할 짠한 에피소드가 담겨 있는데, 이때 지나가는 곳이 전 세계 관광객이 다 모여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타임스퀘어였다.


버드맨 (2014) / 속옷 바람으로 타임스퀘어를 지나가는 리건 톰슨(마이클 키튼) 

화보는 아니지만 어떤 사진 촬영이 진행 중이었다.




밤의 타임스퀘어를 터덜터덜 돌았다.

인공 태양처럼 빛을 발산하는 휘황한 전광판 사이를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하며 잔뜩 상기된 채로 사진을 찍고 있는 사람들을 하나하나 살폈다. 엄밀히 말하면 나도 여행자야. 그들의 얼굴에서 이 사실을 굳이 확인이라도 해보고 싶은 것처럼.



빨간 계단 끝으로 올라와 잠시 앉아 있었다.


안락한 품을 찾아 기어이 패딩까지 비집고 들어오는 칼바람에 속수무책으로 당하고만 있었다. 세상에서 가장 처연한 모양새다. 날씨가 매서워 나려는 흥도 죽어 버렸다. 결국 한 손에 테이크아웃한 커피만 들고 TKTS 뒤편의 스타벅스로 도망치듯 피신했다.



이게 다 시차 부적응 때문이다.

노곤함을 느끼며 뉴욕이고 뭐고 길바닥에 드러눕고 싶다는 생각이 절절한 나 자신에 갑자기 짜증이 치솟았다. 많은 걸 내던지고 달려온 뉴욕인데 이렇게 무력감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도 서서히 힘이 부치기 시작했다. 공식적으로는 여행 기사 취재라는 명목하에 왔지만 사실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인생에서 한 번 뿐인 영화 같은 순간을 만들려고 왔다. 그 순간과 그 사람을 붙잡으려고. 그리고 뉴욕을 혜성처럼 반짝이는 추억의 장소로 만들려고.



제대로 된 의자나 테이블이 없어서 추위를 피해 들어온 다른 여행자들과 함께 나란히 벽에 기댔다.

갑작스럽게 따뜻해졌기 때문인지 졸음이 쏟아졌다. 언제 눈을 감았나 기억도 나지 않는 상황에서 깨어나기만을 반복했다. 나는 지금 뉴욕 타임스퀘어의 스타벅스에서 졸고 있다.



안되겠다 싶어 다시 TKTS 계단으로 왔다.

내가 있는 스타벅스로 오겠다는 일행을 굳이 빨간 계단으로 불렀다. 그래야만 했다.


커피를 들고 빨간 계단에 앉았다. 아는 사람 하나 없던 군중 사이로 드디어 나를 보러 오는 사람이 있다. 왜 그렇게 격해지던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그 순간을 머릿속에서 되감고 또 되감아 본다. 벌써 그립다.


록펠러 센터 인부들의 사진을 기념한 조각상이 타임스퀘어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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