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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Feb 19. 2020

이터널 선샤인의 몬탁에서

뉴욕 영화 여행

# 이터널 선샤인의 몬탁에 가야겠다고 생각했을 당시에는 내가 꽤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을 때였다.


홍콩 영화 여행기에도 쓴 적이 있는 이야기지만 그때는 이별 이후의 여행이었다면 뉴욕 여행은 6년의 연애가 끝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다녀온 여행이었다. 스스로 비겁하긴 하나, 마음 정리는 해두어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자신을 지켜야 했기 때문이다.  

이별 시점보다도 배로 힘들고 외로웠던 기억이다.



세월에 따라 변해야만 했던 들이 야속했다. 기억력이 이렇게도 좋아 번뇌가 많은 것조차 괴로웠다.

 

그럼에도 일말이지만 그런 마음은 있었다.


지금을 견뎌내면 언젠가는 다시 시작할 수도 있을 것이라는 좋은 마음.

끝을 경험했지만, 그건 마치 조금도 알지 못한다는 듯 태연하게 말이다.

몬탁행은 한국으로 돌아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을 무렵에 결정했다.


이곳에 머무는 동안 몬탁에 가보겠노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일정은 하루씩 야금야금 미루려고만 했었다.


영화 속 그 바다를 거닐며 이터널 선샤인을 생각하다 보면.. 그때가 아, 내 마음은 이제 정리해야만 하는 거구나 하고 비로소 실감하게 될 것 같아서 그랬다.

숙소는 보워리 역 근처에 있었다.


롱 아일랜드 기차를 타고 몬탁까지 가려면 적어도 편도로만 여유롭게 4시간은 잡는 게 좋았다.


몬탁은 당일로 다녀오는 일정이었기 때문에 가는 길에 헤매고, 가서도 헤맬 생각까지 해 아침 6시 반 정도에는 길을 나섰다.


보워리 역에 도착한 시간은 6시 50분.

그런데 시작부터 마음이 촉박하다.  

펜스테이션까지 가는 길.


새벽 지하철 안에는 나 하나 동양인이다.


누군가의 시선이 느껴진다. 아직은 어둑한 아침부터 홀로 길을 나서는 내가 궁금한지 고개를 들어보면 항상 그 누군가와 눈이 마주치고는 했다. 적대적인 건 아니었고 단지 호기심 어린 눈빛이다.


가는 길에 들은 노래는 인사이드 르윈의 Fare Thee Well이다.

그냥 이 노래의 멜로디가 귓가에 맴돌아 찾아서 들었다.

펜스테이션에 도착해 LIRR(롱 아일랜드 레일로드의 약자)이라고 쓰여 있는 표지를 보고 그대로 따라갔다. 마침 출근시간 대와 겹쳐 역 풍경이 무척이나 혼잡했다.


LIRR 웨이팅 구역에서 트랙 정보가 뜨길 기다리다가 중간 환승역인 바빌론 트랙 인포메이션이 떠서 곧바로 찾아가 탑승했다. 바빌론 역에 도착하면 몬탁행 기차로 다시 환승해야 한다.



기차에 앉아 있으면 기관사가 탑승객 사이를 돌면서 표에 구멍을 뚫어준다. 그리고 어디어디에서 환승하면 된다고 친절하게 알려주기도 한다.


바빌론 역까지 약 1시간 10분 정도가 소요됐다.

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옆 트랙에 대기 중으로 보이는 기차가 있어서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물었다. 몬탁행 기차가 맞단다. 냉큼 탑승.

드디어


Took a Train to Montauk.

자리부터 잡고 기차 내 풍경을 천천히 살폈다.


몬탁행 기차의 좌석이 영화에서 본 그 좌석들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영화에서는 빨간색과 파란색이 섞인 좌석이었는데 실제로는 그냥 초록초록한 좌석이다.


기차에는 사람이 참 없었다.


영화 속 조엘(짐 캐리)이 출근길에 급작스럽게 몬탁행을 결정했을 때의 그 풍경과 닮았던 것 같다. 한 칸에 서너 명 정도가 앉아 있었을까 말까다. 재채기를 하니 서너 좌석 떨어진 곳에 앉은 남자가 블레스 유(Bless You)라고 말해줬다.

Thank you.


창밖 풍경을 보다가 스륵 잠이 들었는데,

맞은편에 앉은 아주머니가 나를 흔들어 깨우더니, 화장실에 가는데 짐 좀 봐달라고 했다. 애매하게 깨버렸다. 잠은 결국 다시 오지 않았다. 남은 시간에는 이터널 선샤인 사운드트랙을 들으며 영화를 생각하고 그 영화에 빗댄 내 상황을 생각했다. 꼬리를 문 생각을 따라가다 보면 항상 같은 지점에서 생각이 멈췄다.


나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약 3시간 반 만에 몬탁 역에 도착했다.

영화 속 풍경 그대로다.


이 역에서는 클레멘타인이 조엘에게 손 인사를 건넸고 조엘이 수줍게 그 인사를 받았다.

역에 도착해 사방을 둘러보는데 보이는 사람이 몇 안됐다.

미국 소도시의 풍경이다. 쓸쓸한데 어딘지 모르게 푸근한 공기.


영화에서 그린 풍경이 현실에도 남아있어 반가운 마음이 들면서도 묘한 감정이 일었다.


영화를 생각하고 생각하다 보니,

내가 기어이 그 영화 속 장면으로 걸어 들어와 버보다.

빌리지가 보이는 방향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곳에서는 뭘 해야겠다고 생각해 둔 계획이란 게 없었다. 그저 오랜 팬으로서 영화와 나의 내밀한 추억을 만들고 싶어 찾아왔을 뿐이니까.

20분 정도 황량한 도로변을 걷다 보니 마을이 나왔다.


길이 끊긴 듯한 곳에 허술한 나무 계단이 하나 보였다.


계단 너머 왠지 바다가 있을 것 같았다. 누구도 쉽게 접근하지 못할 것 같은 허름한 길을 따라 계단을 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회색빛 광활한 바다가 펼쳐졌다.


아, 영화에서 나온 그 바다다.  


이날은 클레멘타인보다는 조엘의 마음으로 해변을 걸었다.


조엘은 상상 속 클레멘타인의 메시지를 들었고, 그 기억에 남은 상상의 흔적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 몬탁의 바다를 걸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다시 클레멘타인을 만났다.

나는 몬탁에서 봐(Meet me in Montauk), 라는 영화의 그 메시지를 좇아 이 장소에 찾아왔다.



이곳에서라면 외면하고 싶어 한 온갖 감정에 영화의 힘을 빌려서라도 직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어디까지나 조엘과 클레멘타인을 구실 삼아 마음껏 슬퍼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한 30분 정도 나무 계단에 앉아있었다. 들이치고 물러나기를 반복하는 파도의 하얀색 포말만을 바라보았다. 영화 사운드트랙 중 Everybody's Gotta Learn Sometime을 들었다. 그러다 마음이 동해 갈색 모래 위에 영화의 제목도 적어봤다. 해안선을 따라 걷다가 부드럽게 다듬어진 검은색 바다 돌멩이 발견.


의미가 있는 듯 없는 몇 가지 행동들의 반복.


  

몬탁의 쓸쓸한 겨울 바다를 보고 가장 먼저 떠오른 장면은


조엘이 클레멘타인과의 기억이 지워지는 것을 거부하기 시작하면서 그녀가 없는 기억 속으로 그녀를 데리고 다니던 장면들이다.


이 바닷가 한가운데에 침대 하나가 놓였다. 그리고 두 사람은 그 위에서 느닷없이 나타난 바다 풍경을 보 신기해하고 즐거워했다.   

겨울을 배경으로 영화이지만, 따뜻한 영화.


사랑의 끝을 겨울이라고 한다면 이 영화는 다가올 봄이라는 계절을 말해주고 싶었던 영화가 아닐까 생각했다. 니, 그냥 계절처럼 돌아오고 다시 돌아오는 어떤 순리를 말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조엘과 클레멘타인은 서로의 끝을 알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시작하는 것에 대해 어깨 한 번 으쓱하는 걸로 대답을 대신한다.


주르르르 세워져 있는 나무 막대기들까지 영화 속 장면 그대로다. 어쩜.


마지막 장면, 눈이 하얗게 쌓인 해변에서 두 사람이 서로 장난을 치며 뒹굴던 장면이 떠올랐다.


긴 시간을 걸었다.


원래 앉아 있던 나무 계단으로 돌아왔을 즈음

빼곡한 흰구름 사이로 푸른색 하늘이 보이기 시작했다. 출출했다. 치즈크림에 베이글이 먹고 싶어 계단에 쪼그리고 앉아 주변 카페를 검색했다. 잠깐 자리를 잡은 김에 돌아가는 기차 시간까지도 체크.

물에는 무서운 힘이 있다.


잡념은 지우고 오로지 그것만을 바라보게 만드는 그런 힘.

나무 계단 하나로 영화와 현실을 오가는 느낌이 들었다.


계단을 따라 바다를 향해 내려오면 떨어져 걷는 조엘과 클레멘타인이 보이는데,

그 계단을 타고 마을을 향해 올라오면 온갖 문제가 산적한 나의 현실이 눈에 들어온다.



끝날 수밖에 없는 영화,

돌아올 수밖에 없는 현실.

마을이 정겨웠다.

내가 잠시 살았던 그 마을도 이곳 몬탁처럼 겨울이 길게 머무는 작은 마을이었다.

마을 한 바퀴를 돌다가 문을 연 커피하우스가 보였다.

역시나 손님은 나 하나다.


아이스 블랙과 플레인 베이글, 그리고 크림치즈를 주문했다. 6.79달러.


크림치즈를 위해 베이글을 먹는다고 보아도 좋을 정도로 크림치즈를 좋아해서 이것부터 다 먹은 다음

혹시 크림치즈 더 줄 수 있는지, 아님 추가로 돈을 더 지불해야 하는지를 물었는데 인심 좋은 이 마을 사람은 미소를 보이며 충분한 크림치즈를 더 얹어주었다. 아, 따뜻하다.

블리스 키친(Bliss kitchen)


브런치 한 끼를 마치고 다시 기차역으로 돌아가는 길.

돌아가는 기차에 탑승하려는데 한국인 여학생을 마주쳤다.


내가 기차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는데 갑자기 다가와 한국인인지를 묻고는 타야 하는 입구를 알려주고 떠났다. 고맙다고 인사했다.  


오늘 하루 이터널 선샤인을 살았던 사람이 나 혼자만은 아니었던 모양이다.

기차에 타 출발을 기다리고 있는데

바다가 있는 곳에만 맑은 구름에 해가 나 있는 풍경이 언뜻 보였다.


이곳에 언제 다시 오게 될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은 홀가분하다. 몬탁에 나의 지난 기억을 묻어두고 떠나는 느낌이랄까.


이제 난 과거가 그리워지면 이곳을 떠올리면 된다.

아니면 이터널 선샤인을 다시 보거나.

돌아오는 기차에서 분홍빛 석양을 보았다.



표 검사를 하던 기관사가 이번엔 자메이카 역에서 환승하라고 알려주었다.


그런데 그렇게 알려주었음에도..

난 아무 생각 없이 바빌론에서 내리고 말았다. 내리자마자 잘못 내린 걸 깨닫고 자메이카 역으로 가는 기차에 탑승하려고 부랴부랴 찾아가고 있는데 가는 곳마다 다른 여행자들이 나를 붙잡고 길을 물었다. 이 환승 시스템이 내게만 어려운 것은 아닌 모양이다.  

자메이카 역에서 펜스테이션 역으로 가는 기차에서는

표를 검사하던 직원이 내 표를 걷어가 버렸다. 이 표만큼은 기념으로 간직하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하게 됐다.


펜스테이션 역에는 도착 예정 시간이었던 오후 6시 22분에 정확히 도착했다. 오와.

다시 펜스테이션 역에서 블루라인을 타고 업타운 행으로 42st 역으로 왔다.



공격적 태세로 바삐 걸어 다니는 뉴요커들과 쉬지 않고 울려대는 경적 소리 사이로 빌딩 사이를 헤집고 걸어다니자니 오늘 하루 몬탁에서 가졌던 조용한 시간이 꿈처럼 아득하다.

저녁은 제대로 된 밥을 좀 먹고 싶어서 판다 익스프레스에 들렀다.

얼마 만에 먹는 밥인지 모르겠다.


원플레이트에 프라이드 라이스, 오렌지 치킨, 베이징 비프를 추가했다.


이제 탑오브더락에 갈 시간.

하루가 참으로 굴곡지다. 오전에는 뉴욕에서 가장 한적한 곳을 걷다가 오후에는 가장 화려한 야경을 보러 가려니, 내 여행이 곧 영화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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