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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마루 May 07. 2020

해피투게더의 랴오닝 야시장에서

영화 여행, 대만 타이베이

"사실 그날의 일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다. 이제 나와 같이 있는 것이 '지겹다'는 말을 했다는 것밖에는. 지금 헤어지고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또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그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 아휘(양조위)

대만에서 열흘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떠나기 전날 밤이다.

하루 만 오천 보씩은 걷고 있다. 발이 아프다. 통증이 남의 발처럼 어색하다. 음, 발바닥에 커다란 물집이라도 잡힌 것 같다.


혼자 여행을 떠나와 할 수 있는 건 생각이 전부다. 철저하게 내 편인 시간.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문득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넉넉해진다.


대만을 떠나기 전에 오늘 밤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영화 해피투게더(춘광사설)의 마지막 장소, 랴오닝 야시장을 걷는 것.

타이베이 역 내에 있는 스시익스프레스에 들러 오늘 밤에 먹을 저녁거리부터 샀다. 이 조그만 점포가 얼마나 북적이던지. 2, 3분 기다려 차례가 왔지만 종류를 헤아려 보기도 전에 계산대 근처까지 밀렸다. 할 수 없이 팔이 닿는 곳에 있는 것들을 골라 집었다. 대부분 새우다.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나와 랴오닝 야시장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손등에 비 한 방울이 똑, 하고 떨어졌다. 해피투게더의 마지막 장면과 지금 이 기분을 생각해본다면..음, 오늘 밤은 비가 오는 게 마땅하다.


듣고 있는 음악은 아이유의 이런 엔딩, 생각하고 있는 건 세 사람이다.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과 소장(장첸).

영화 해피투게더를 처음 봤을 때가..20대 초의 나이였던가. 그때는 이 영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없는 이유, 보영이 떠나야 하는 이유, 그리고 아휘가 떠난 후에 보영이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이유 등 모든 게 사실 납득이 어려웠었다.


관계의 깊이와 역학, 타이밍이라는 변수에 대하여 내 나름의 필요한 어떤 경험들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한다.

함께 있으면 고통스럽지만 헤어져 있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랑이 있다.

누군가는 기다려야 하고 누군가는 떠나야만 하는 사랑도 다.


극 중 보영(장국영)처럼

떠나야만 남기고 온 것에 대한 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얼마나 슬픈 사람인가.

발바닥 통증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늦은 밤이라 버스에서는 앉아   있었지만, 이것 . 쉬다가 다시  걷기 시작하려니 발걸음이 훨씬  조심스러워진다. 몹시 피곤하다.


하지만, 그렇지만..


20분 정도 달려 랴오닝 야시장에 도착했다.

랴오닝 야시장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이곳에 처음 온 그날에도 내렸다. 랴오닝 시장은 크지 않다. 타이베이의 대형 야시장만 가다가 랴오닝 야시장에 오게 되면, 조금 놀랄 수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아담하다. 곧게 뻗은 짧지만 굵은 거리 양옆으로 점포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간판 조명이 젖은 바닥에 반사되면서 만드는 거리 특유의 분위기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생각나게 한다.

4년 전 처음 랴오닝 야시장을 방문한 날
그리고 지금
"대만으로 돌아가는 날, 비행기 편 때문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다. 아휘와 작별하고 싶었는데 아직도 그의 거처를 몰랐다. 술집을 나왔을 때는 벌써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대만은 지금 밤일 텐데. 랴오닝 야시장은 열었나 모르겠다." - 소장(장첸)

아휘가 이 거리를 걸었다. 아휘는 소장의 가족이 운영하는 노포에서 국수를 먹고, 그의 사진을 한 장 들고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홍콩으로 돌아갔다.


카메라를 꺼내 영화 속에 등장한 장소와 점포를 찾아다녔다. 영화와 같은 인파를 볼 수 없었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두 번의 방문 모두 이곳에서 그런 인파는 보지 못했다. 영화와 현실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사람의 많고 적음,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아휘를 붙잡는 거부할 수 없는 호객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야시장은 그저 한가롭고 평온했다.  


"대만에서 눈을 뜨니 벌써 오후였다. 1997년 2월 20일, 지구 반대편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잠들었다가 일어난 기분이다." - 아휘(양조위)


Danny Chung의 해피투게더(Happy Together)를 들으며 야시장 한 바퀴를 돌았다. 내 시간을 영화적 시간으로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곳을 걷는 아휘를 볼 수 있고, 소장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그러니까, 아휘가) 떠나온 보영 또한 마찬가지다.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 대만에서 하루 묵었는데 랴오닝 야시장에 가봤다. 시장은 매우 붐볐다. 소장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 그가 왜 항상 행복한 표정으로 여행을 다니는지 알았다. 그에겐 아무 때나 돌아와도 환영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진 어떠실까?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 아휘(양조위)

소장(장첸)은 젊은 시절의 보영(장국영)이다. 다만 보영과 그 사이의 다른 점이 있다면, 소장에게는 언제든 그를 따뜻하게 맞아줄 그를 기다리는 누군가(가족)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의 품은 넉넉하다. 누군가의 다친 감정을 헤아려 슬픔을 안아줄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있다. 아휘는 소장과의 우정을 통해 이별의 고통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간다. 아휘가 식당에서 소장의 사진을 가지고 나오면서 하는 어떤 말은, 그래서 내게는 무언가를 리셋,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갖게 한다. 언제나 보영을 기다리기만 했던 아휘에게도, 소장이라는 마음의 집이 한 칸 생긴 셈이기 때문이다.  

"장의 사진 한 장을 몰래 가지고 나왔다. 언제 다시 만날진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보고 싶을 때면 어디에서 그를 찾아야 하는지 안다는 거다." - 아휘(양조위)

영화에서 랴오닝 야시장의 설정 쇼트가 나올 때

스치듯이 보였던 몇몇 점포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대로, 그 자리에서 정말 기뻤다.


간판 리뉴얼은 한 상태였지만 점포 이름이 그대로였다. 주인은 바뀌었으려나,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이럴 때 영화 속 장소를 찾아다니는 쾌감 같은 게 인다. 내가 정말 이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또는 이 영화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뭐 이런 환상적 감정이 든달까.


이건 처음 왔을 때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이었다.

역시 세상에는 다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오늘 이 영화는 끝났다.


영화 여행만 몇 년째인데 끝에만 이르면 발길이 이리도 더뎌진다. 현실에서 떠남의 미련이 없는 경우는 사실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므로. 극 중 랴오닝 시장에서 소장의 기억을 간직한 채 미소로 돌아설 수 있었던 아휘의 작별이 그토록 각별하게 남는 까닭도 내게 그런 영화로운 끝이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거다.


인간에게 매혹적인 이야기는, 가장 바라면서도 먼 이야기라고 하지 않나.

까르푸에서 장 본 것들만 양손 가득이다.

주로 달고 짠 과자들과 맥주, 요구르트 음료수, 과일 등등이다.

온몸이 퉁퉁 부은 느낌이다.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 밤인데 이 많은 먹거리로 속을 채워도 지금의 허한 느낌은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온통 아휘 생각뿐이다.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갈 때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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