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여행, 대만 타이베이
"사실 그날의 일을 정확히 기억할 수는 없다. 이제 나와 같이 있는 것이 '지겹다'는 말을 했다는 것밖에는. 지금 헤어지고 인연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되면 그때 또다시 시작하자고 했다. 그 말에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다." - 아휘(양조위)
대만에서 열흘이라는 시간을 보냈다. 오늘은 떠나기 전날 밤이다.
하루 만 오천 보씩은 걷고 있다. 발이 아프다. 통증이 남의 발처럼 어색하다. 음, 발바닥에 커다란 물집이라도 잡힌 것 같다.
혼자 여행을 떠나와 할 수 있는 건 생각이 전부다. 철저하게 내 편인 시간.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간다. 문득 돌아갈 곳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넉넉해진다.
대만을 떠나기 전에 오늘 밤 해야 할 일이 하나 있다.
영화 해피투게더(춘광사설)의 마지막 장소, 랴오닝 야시장을 걷는 것.
타이베이 역 내에 있는 스시익스프레스에 들러 오늘 밤에 먹을 저녁거리부터 샀다. 이 조그만 점포가 얼마나 북적이던지. 2, 3분 기다려 차례가 왔지만 종류를 헤아려 보기도 전에 계산대 근처까지 밀렸다. 할 수 없이 팔이 닿는 곳에 있는 것들을 골라 집었다. 대부분 새우다.
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나와 랴오닝 야시장까지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손등에 비 한 방울이 똑, 하고 떨어졌다. 해피투게더의 마지막 장면과 지금 이 기분을 생각해본다면..음, 오늘 밤은 비가 오는 게 마땅하다.
듣고 있는 음악은 아이유의 이런 엔딩, 생각하고 있는 건 세 사람이다.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과 소장(장첸).
영화 해피투게더를 처음 봤을 때가..20대 초의 나이였던가. 그때는 이 영화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함께 할 수 없는 이유, 보영이 떠나야 하는 이유, 그리고 아휘가 떠난 후에 보영이 눈물을 흘려야만 하는 이유 등 모든 게 사실 납득이 어려웠었다.
관계의 깊이와 역학, 타이밍이라는 변수에 대하여 내 나름의 필요한 어떤 경험들이 부족했던 게 아닐까 한다.
함께 있으면 고통스럽지만 헤어져 있으면 죽을 것 같은 사랑이 있다.
누군가는 기다려야 하고 누군가는 떠나야만 하는 사랑도 있다.
극 중 보영(장국영)처럼
떠나야만 남기고 온 것에 대한 마음을 실감할 수 있는 사람은, 사실 얼마나 슬픈 사람인가.
발바닥 통증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늦은 밤이라 버스에서는 앉아 올 수 있었지만, 이것 참. 쉬다가 다시 또 걷기 시작하려니 발걸음이 훨씬 더 조심스러워진다. 몹시 피곤하다.
하지만, 그렇지만..
20분 정도 달려 랴오닝 야시장에 도착했다.
랴오닝 야시장은 이번이 두 번째 방문이다. 버스에서 내렸을 때는 부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는 이곳에 처음 온 그날에도 내렸다. 랴오닝 시장은 크지 않다. 타이베이의 대형 야시장만 가다가 랴오닝 야시장에 오게 되면, 조금 놀랄 수 있을 정도로 그 규모가 아담하다. 곧게 뻗은 짧지만 굵은 거리 양옆으로 점포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간판 조명이 젖은 바닥에 반사되면서 만드는 거리 특유의 분위기는 왕가위 감독의 영화들을 생각나게 한다.
"대만으로 돌아가는 날, 비행기 편 때문에 부에노스아이레스에 갔다. 아휘와 작별하고 싶었는데 아직도 그의 거처를 몰랐다. 술집을 나왔을 때는 벌써 날이 밝아 오고 있었다. 대만은 지금 밤일 텐데. 랴오닝 야시장은 열었나 모르겠다." - 소장(장첸)
아휘가 이 거리를 걸었다. 아휘는 소장의 가족이 운영하는 노포에서 국수를 먹고, 그의 사진을 한 장 들고 나왔다. 그리고 다음 날 홍콩으로 돌아갔다.
카메라를 꺼내 영화 속에 등장한 장소와 점포를 찾아다녔다. 영화와 같은 인파를 볼 수 없었다는 건 참 아쉬운 일이다. 두 번의 방문 모두 이곳에서 그런 인파는 보지 못했다. 영화와 현실의 분위기가 사뭇 다르게 느껴지는 까닭은 사람의 많고 적음, 어쩌면 그 때문일지도 모른다. 지나가는 아휘를 붙잡는 거부할 수 없는 호객 소리도 들리지 않았고, 야시장은 그저 한가롭고 평온했다.
"대만에서 눈을 뜨니 벌써 오후였다. 1997년 2월 20일, 지구 반대편에 도착했다. 오랫동안 잠들었다가 일어난 기분이다." - 아휘(양조위)
Danny Chung의 해피투게더(Happy Together)를 들으며 야시장 한 바퀴를 돌았다. 내 시간을 영화적 시간으로 맞추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래야 이곳을 걷는 아휘를 볼 수 있고, 소장을 생각할 수 있다. 내가(그러니까, 아휘가) 떠나온 보영 또한 마찬가지다.
"홍콩으로 돌아가기 전 대만에서 하루 묵었는데 랴오닝 야시장에 가봤다. 시장은 매우 붐볐다. 소장을 만나진 못했지만 그의 가족들을 만났다. 그가 왜 항상 행복한 표정으로 여행을 다니는지 알았다. 그에겐 아무 때나 돌아와도 환영하는 곳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 아버진 어떠실까?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 아휘(양조위)
소장(장첸)은 젊은 시절의 보영(장국영)이다. 다만 보영과 그 사이의 다른 점이 있다면, 소장에게는 언제든 그를 따뜻하게 맞아줄 그를 기다리는 누군가(가족)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처럼 돌아갈 곳이 있는 사람의 품은 넉넉하다. 누군가의 다친 감정을 헤아려 슬픔을 안아줄 수 있을 만한 여유가 있다. 아휘는 소장과의 우정을 통해 이별의 고통을 조금씩 극복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되찾아간다. 아휘가 식당에서 소장의 사진을 가지고 나오면서 하는 어떤 말은, 그래서 내게는 무언가를 리셋,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만 같은 희망을 갖게 한다. 언제나 보영을 기다리기만 했던 아휘에게도, 소장이라는 마음의 집이 한 칸 생긴 셈이기 때문이다.
"장의 사진 한 장을 몰래 가지고 나왔다. 언제 다시 만날진 모르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그가 보고 싶을 때면 어디에서 그를 찾아야 하는지 안다는 거다." - 아휘(양조위)
영화에서 랴오닝 야시장의 설정 쇼트가 나올 때
스치듯이 보였던 몇몇 점포들이 아직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그대로, 그 자리에서 정말 기뻤다.
간판 리뉴얼은 한 상태였지만 점포 이름이 그대로였다. 주인은 바뀌었으려나, 그것까지는 모르겠다. 이럴 때 영화 속 장소를 찾아다니는 쾌감 같은 게 인다. 내가 정말 이 영화의 한 장면 속으로 들어와 버렸다, 또는 이 영화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뭐 이런 환상적 감정이 든달까.
이건 처음 왔을 때 보지 못하고 지나친 것들이었다.
역시 세상에는 다시 보아야 보이는 것들이 있다.
이제 숙소로 돌아가야겠다.
오늘 이 영화는 끝났다.
영화 여행만 몇 년째인데 끝에만 이르면 발길이 이리도 더뎌진다. 현실에서 떠남의 미련이 없는 경우는 사실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현실은 영화가 아니므로. 극 중 랴오닝 시장에서 소장의 기억을 간직한 채 미소로 돌아설 수 있었던 아휘의 작별이 그토록 각별하게 남는 까닭도 내게 그런 영화로운 끝이란 일어날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일 거다.
인간에게 매혹적인 이야기는, 가장 바라면서도 먼 이야기라고 하지 않나.
까르푸에서 장 본 것들만 양손 가득이다.
주로 달고 짠 과자들과 맥주, 요구르트 음료수, 과일 등등이다.
온몸이 퉁퉁 부은 느낌이다. 오늘이 여행 마지막 날 밤인데 이 많은 먹거리로 속을 채워도 지금의 허한 느낌은 그대로일지도 모르겠다. 온통 아휘 생각뿐이다. 아휘는 홍콩으로 돌아갈 때 대체 어떤 마음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