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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클베리 Sep 12. 2022

디자인을 바꾼 날

#인생 #방어기제 #합리화 #효용 #디자인 #개발자 수필

 최근 수 일간 유튜브가 내게 추천한 영상 대부분은 태풍 '힌남노'와 '무이파'와 관련된 것이었다. 물론 아파트 가격 하락과 관련된 영상도 상당수 있었지만 부동산 투자가 소프트웨어 개발보다 몇 배는 골치 아프고 힘들다는 막연한 편견을 갖고 사는지라 큰 관심이 가진 않았다. 여하튼 '물난리'와 관련어로 분류되었던 걸까? 우리나라가 건조 중이라는 잠수함에 관한 영상도 있었는데 원자력을 이용한 핵잠수함이 아닌 수소기술을 이용한 잠수함이라나 하는 내용이었다. '와 대단하네' 하면서 그 영상을 보고 나자 또 다른 잠수함 관련 영상이 오른쪽 리스트에 보였다. 톰 행크스 주연의 '그레이하운드(Greyhound)'라는 영화였다. 


 그렇게 헌터킬러(2018, 게리 올드만 주연), 붉은 10월(1990, 숀 코네리 주연), 유령(1999, 정우성 주연) 등 잠수함 관련 영화의 영상들을 보다가 전함과 관련된 영상을 보게 되고 그러다 결국 우주전함까지 왔다. 




 우주전함.


 어렸을 적 전투기와 전함에 꽂혀있던 난 용돈이 생기는 족족 프라모델을 사 가지고는 몇 시간이고 방 안 가득 본드 냄새를 풍겨대곤 했다. 머스탱 같은 세계대전 당시 활약했던 기종들부터 F-4나 F-14, F-15, F-16, F-18 같은(F는 Fighter, 즉 전투기를 나타낸다) 비교적 현대에 활약한 미군 전투기들 뿐 아니라 미그 15, 17, 수호이 같은 소련 전투기, 미라쥬, 라팔 같은 프랑스 전투기 등 침대 밑은 늘 전쟁터였다. 비스마르크 전함이나 엔터프라이즈호 같은 항공모함도 자리 한편을 차지했다. 물론 탱크나 건담류 같은 프라모델도 찬장을 가득 메웠지만 가장 애착을 갖고 있던 건 전투기와 전함이었다. 


 그러나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좋아했던 건 영화 스타워즈에 나왔던 X-wing 우주전투기와 야마토 우주전함, 그리고 하록선장의 전함 아르카디아호 였던 거 같다. 늘 갖고 싶었지만 시골 문방구에선 대형 프라모델로는 좀처럼 구하기 힘들었던 것들이었다. 지금 와서 든 생각이지만 라이선스라든가 뭐 그런 것들 때문에 가격도 상당히 비쌌을 터였다. 찾아보니 지금도 가격이 만만찮다. 역시 이대로 살다 간 어릴 적 가졌던 소망이라는 핑계로 책장 한편에 진열이라도 해보는 일은 소원한 듯 느껴진다. 


 나는 '합리화'라는 방어기제가 고도로 발달한 사람이기에 또다시 그 이유를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X-wing과 아르카디아호에 매료되었던 원인이 '어릴 적에나 최고로 멋지게 느껴졌을 그 디자인 때문'이었다고 '합리화'했다. 




 DBMS 같은 기반 소프트웨어를 개발하는 일을 하면서 '디자인(design)'이란 심미적, 시각적이기보단 뭔가 아키텍처의 설계 같은 구조적 정합성과 무결성, 그리고 효율성을 위한 개념인 것처럼 여기고 사용해왔다. 그래서 코딩보다 설계가 훨씬 더 중요하고 설계를 잘 해내려면 해당 시스템에 대한 깊이 있는 통찰과 인사이트가 필요하다며 그 지경을 넓히고자 애써왔다. 그렇게 점점 밑으로 밑으로 파 들어가다가 결국 '효용'이라는 단어에 부딪혔다. 엄밀히는 '내 효용'이라고 해야 맞을 듯싶다.


 내 삽은 효용이란 커다란 암석을 부드럽게 파낼 정도로 강하지 못했다. 챙 하고 부딪히면 팔과 손목이 저려 앞으로도 이대로 계속 삽질을 할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몰려왔고 어찌어찌 주변의 흙을 전부 파낸다 하더라도 그 암석을 굴 밖으로 옮겨내긴 힘들어 보였다. 굴 밖을 나와 암석을 손쉽게 부서뜨릴 만큼 강한 삽을 구해볼까 하는 생각도 해 봤지만 굴 입구를 올려다본 순간 내 의지는 이내 사라졌다. 무엇보다 나와 함께 파기 시작했던 사람들이 삽질하는 소리도 이젠 별로 들리지 않았다. 애초 삽 한 자루 들고 굴을 파내려 가는 설계를 멋지다 생각한 것 자체가 이제 와선 무모한 발상처럼 생각되었지만 인정하고 싶진 않았다. 최근 몇 년 동안 애써 무시하며 보지 않으려 했던 것들이 되려 고갤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경제학을 공부하던 시절 내 머리에 들어와 미분식으로만 존재하던 '효용의 극대화'가 의사결정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큰 지를 이제야 알게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이젠 스스로에게 주장해왔던 '디자인'이 갖는 의미를 바꿔야 할 때가 온 것이다. 디자인의 의미가 바뀌면 디자인도 바뀐다. 아니 어쩌면 삽질이 예전만큼 재밌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 이미 바꿨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걸 지속해 온 이유가 관성이든 안락함이든 그 어떤 사정이었든 간에 효용의 총합을 구성하는 내용도 수준도 모두 바뀌었는데 말이다. 




 오랜만에 아르카디아호를 찾아봤다. 애니메이션 작화부터 조립과 도색을 완성한 프라모델을 찍은 사진 등 수많은 아르카디아호를 봤다. 어릴 적 길모퉁이 '오주 문방구' 유리창 앞을 한참이나 서성이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손에 쥐고 있는 300원이면 길 건너 '뿅뿅 오락실'에서 '엑스리온'을 여섯 판 할 수 있는데 빨간색 바탕에 하얀색으로 '아카데미'라 적혀있는 상자들이 천장까지 쌓여있던 유리창 밖에서 상자들을 구경하다 오락실 한번 쳐다봤다 다시 상자들을 훑어보다간 집으로 들어와 전지에 아르카디아호를 그리곤 했던 꼬마가.


 역시 최고로 멋지다. 분명 어릴적에나 최고로 멋지게 느껴졌을 그 디자인인데 이것보다 멋진 우주전함이 떠오르질 않는다. 내 방어기제는 이제 '합리화'로는 안 될 것 같다며 방향을 바꿨다. 환경을 바꾸는 쪽으로.

새로운 디자인을 해야할 때가 온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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