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무게 #딸의 중력 #딸과 아빠 #오해 #개발자 수필
오늘 아침 첫째가 일어나자마자 내 방으로 와선 물었다.
"아빠! 지구의 무게는 얼마야?"
가끔 생뚱 맞거나 도대체 갑자기 그런 게 궁금한 이유가 더 궁금한 질문들을 하곤 하는 어린 딸에게 그럴듯한 답을 해 있어 보이는 척을 하고 싶은 난 이때가 제일 가슴 졸이는 시간이다.
"어.. 지구의 무게?"
일단 답을 알고 있지만 잠시 문장을 다듬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듯 시간을 끄는 와중 난 머릿속 어딘가에 있을지 모를 답을 열심히 찾아 헤맸다.
'아, 이젠 주어진 시간이 곧 끝날 거 같은데 어 그래 그거!'
난 꽤 괜찮은 대답의 실마릴 찾았다는 생각에 말로 변환한 그걸 입으로 밀어쳐내며 딸의 눈빛을 살폈다. 혹시라도 너무 늦어 아빠의 대답을 기다리길 그만두거나 수긍이 가지 않는 대답에 실망한 채 엄마에게 달려가는 모습을 볼까 봐서였다.
초등학교 2학년인 딸에게 아빠는 여러 모습을 한 존재이겠지만, 오늘 아침과 같은 경우의 아빠는 뭔가, 아는 것도 많고 이것도 잘하고 저것도 잘하고 책도 쓰고 간간히 컴퓨터 앞에 앉아 일하는 모습을 보면 뭔가 휘황 찬란 어려워 보이는 것도 어렵지 않게 해내는 그런 존재인 듯하다.
누구나 성인이 되면 수월하게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는 모습만으로도 이렇게 멋진 아빠가 될 수 있으니 너무 감사한 일이지만 몇 년이 지난 뒤엔 그런 사소한 것들로 아빠가 대단해 보였다는 걸 딸이 잊길 바랄 뿐이다.
아무튼 그런 걸 떠나 적어도 이런 질문을 가장 먼저 해야 할 대상이 아직까진 나라는 게 자랑스럽다.
"지구의 무게는 아마 잴 수 없을 걸. 왜냐면 지구 밖 우주엔 공기가 없거든. 공기가 있어야 무게를 잴 수 있으니까."
딸은 '응 그렇지!' 하며 돌아섰다. 내 대답과는 상관없이 내 얘길 듣고 뭔가 자신만의 방식으로 결론에 다다랐을 때 보이는 반응이었다. 그런 딸을 보며 잠시 내 말을 이해한 건가? 하는 생각이 순간 들었지만 그럭저럭 괜찮은 대답을 해준 날 칭찬하기로 하고는 뒤따라 방을 나왔다.
그러고 보니 궁금했다. 지구의 무게는 정말 알 수 없는 걸까? 왜 지금까지 살면서 지구의 무게가 궁금하지 않았지? 눈에 보이지도 않는 컴퓨팅 성능을 1 마이크로초 높이기 위해 보다 나은 소프트웨어 아키텍처와 알고리즘을 고민하며 사는 개발자가 아니었다면, 내 인생 통틀어 가장 복잡한 정신세계를 갖고 살아낸 20대 후반 30대 초로 되돌아가 다른 삶을 살았다면 지구의 무게에 대해 생각해 봤을까? 아니 그즈음 어디선가 한 번쯤은 생각해 본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이 안나는 건 아닐까?
어쨌든 난 딸의 나이에 지구의 무게가 궁금하진 않았던 거 같다.
딸에게 답한 것처럼 지구에 물리적인 저울을 갖다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니 지구의 무게를 재려면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과 물질의 질량, 그리고 차지하는 부피를 알아야 할 것 같았다.
지구는 중심으로부터 먼 쪽부터 지각, 맨틀, 그리고 핵으로 구분된다고 중학생 때 배웠던 거 같다. 그리고 고등학생 때는 입시를 위해 대기는 질소가 75% 이상, 산소가 23% 정도에 아르곤, 이산화탄소, 네온 같은 물질로 구성되고 지각은 이산화규소가 57%, 산화알루미늄이 16%, 산화철 9%, 산화칼슘 7%, 산화마그네슘 5%, 산화나트륨 3%, 산화칼륨이 1% 정도로 구성되어 있으며 핵은 철이 90%, 니켈과 산소가 10% 정도라고 외웠다. 아마 대충 맞을 것이다. 암기식 입시교육의 끝물이었던 나는 이게 제대로 된 교육은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때때로 그 효과에 놀랄 때가 종종 있다. 공부한 지 30년도 지났는데 어떤 실마리가 하나 떠오르면 줄줄줄 딸려 나오는 게 참 신기하다.
뭐 그렇다 해도 '지구온난화'라든지 '탄소중립'같은 용어들을 일상처럼 사용해가며 지구의 환경 변화에 민감해진 우리가 일본의 쓰나미, 후쿠시마 사태 등 기껏 재난을 떠들어댈 때도 지표로부터 수 킬로 혹은 수십 킬로 이내에서 발생하는 일들일뿐 지구과학 시간에 배웠던 멘틀이라던가 핵까지 갈 일은 전혀 없었다.
그래서 지구의 무게를 재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 정확하진 않더라도 지각, 맨틀, 핵이 대략 저렇게 구성되어 있으니 이를 구성하는 물질의 질량과 부피를 대략적으로 구해서 더하면 그래도 논리적인 수치라고 할만한 결과는 얻을 수 있는 거 아닐까? 누군가 이 값을 구해 어딘가 적어놨을 거 같았다.
아니다. 누군가 지구의 무게에 대해서도 적어놨겠지.
난 구글 검색창에 '지구의 질량' 대신 '지구의 무게'라고 입력했다.
지구의 무게는 0.
'무게'란 어떤 질량에 대해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 즉 중력이란다. 지구가 끌어당기는 힘이란 말 때문에 뭔가 좀 이상하지만 물리학에서 중력은 질량을 가진 한 물체가 다른 물체에 작용하는 인력을 말한다. 지구에 대해서라면 태양이 끌어당기는 만유인력이 지구가 갖고 있는 원심력을 상쇄하고도 남아야 무게라는 게 있을 텐데 지구가 태양을 공전하고 있는 걸로 보아 지구의 무게는 0이라고 하는 것이었다.
완전히 틀린 설명이었다. 공기가 없어서 무게를 잴 수 없다니..
암기식 교육의 실패였다. 그리고 지구를 구성하는 물질들의 질량에 그 부피를 곱해 다 더하면 대략적인 무게가 되지 않을까라고 생각했던 안일함이 또한 문제였다.
딸은 아빠의 대답을 듣는 순간 틀렸다는 걸 알고 있었음에 틀림없다. 아니 그보단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을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게 생각나 아빠에게 자랑하기 위해 던진 질문이었는지 모른다. 아빠가 허접한 오답을 마치 훌륭한 답변처럼 들려주기보단 '음.. 아빤 아무리 생각해봐도 모르겠는걸. 넌 알고 있니?'라고 물어주길 바랬는지도 모른다.
딸은 그렇게 방을 나가서도 자신이 했던 그 질문에 대해 어떤 말도 없었다. 나와 함께 집을 나서 학교에 도착할 때까지도 다른 이야길 조잘거릴 뿐이었다.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내가 딸을 오구오구 해주는 게 아니라 지금껏 딸이 나의 마음을 헤아려주고 있었던 건 아닐까 하는.
어제저녁 8시가 넘어 안방에서 '마이 리틀 포니 5집'을 시청하고 있던 아이들에게 꾸지람을 했다. 이유는 주위에 널려있던 과자봉지들과 요거트 껍데기 때문이었다. 아이들이 동영상을 보기 전 아이스크림을 먹고 싶다 해서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주고는 얼마 지나지 않아 가봤더니 요거트에 과자에 팝콘에 온갖 단 음식들을 많이도 먹었구나 이 녀석들 하는 마음에서였다. '그렇게 단 걸 자꾸 먹어야겠어? 몸에 좋지도 않은 걸 왜 그렇게 계속 입에 넣는 거야. 응! 그러다 돼지꿀꿀이처럼 살찌면 좋겠어?' 일장 연설 같은 내 꾸지람에도 첫째는 그저 아무 말 없이 화면을 쳐다보고 있었다. 잔소리도 반응이 있어야 하는 건데 싶어 난 '어휴'를 끝으로 내 방으로 돌아왔고 잠시 후 외출했던 아내가 돌아왔다. 애들 저녁은 먹었냐 물어보는 아내에게 분리수거봉투에서 과자봉지들을 꺼내 하소연하듯 말했다.
"아니~ 아이스크림에 과자에 요거트에 팝콘에 그런 것들을 잔뜩 먹어서 배 안 고플 거야. 내가 한 눈 판 사이에 단 것만 잔뜩 먹은 거 있지. 이거 봐봐 이 커다란 봉지들에 들어있던걸 다 먹었다니까. 그래서 아빠한테도 혼났지 뭐."
내 말을 들은 아내가 그랬다.
"아 그거 거의 다 먹고 쬐끔 남아있던 거야."
"이 팝콘도 다 먹었어~."
"응 팝콘도 거의 다 먹었던 거야."
생각해보니 그랬다 어제도.
첫째는 아빠가 뭣도 모르고 잔소리하는 걸 알기에 아빠가 민망해질까 봐 그저 잠자코 있었던 거였을 것 같다.
아내와 이야길 마치고 머쓱해져 방으로 돌아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첫째가 와서 이런 말을 했더랬다.
"아빠, 아빠가 아까 화낸 거 난 아빠가 화냈다고 생각하지 않아. 우리 생각해서 해준 말이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이 녀석은.
애초에 지구의 무게가 0이란 것을 알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그리고 아빠의 무게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