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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클베리 Sep 15. 2023

다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얹었다.

두 번째 사진

파리에 묵은지 4일째 되던 날이었다.


'파리' 하면 에펠탑 아니던가. 하지만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에펠탑에서 도보로 10분 정도 멀지 않은 곳에 숙소를 잡았기에 매일 오가며 보는 에펠탑은 더 이상 그리 대단한 볼거리도 아니었다. 한낮엔 물론이고 아침저녁으로 에펠탑은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볐다. 도떼기시장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그런 곳이었다. 여행하기 좋은 5월에 갔기에 더 그런지도 몰랐다. 마크 리부(Marc Riboud)의 '에펠탑의 페인트공'같은 끝내주는 사진은 결코 찍을 수 없겠지만 하여튼 이번 여행에서 꼭 멋진 에펠탑 사진을 찍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던 내게 에펠탑은 기회조차 주지 않을 듯했다. 


당시는 DSLR의 인기가 절정을 치던 시기였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카운터파트가 될 거란 예상은 다들 하면서도 10년도 안 되어 커다란 회사들이 줄줄이 카메라 사업을 줄이거나 철수할 거라고는 생각 못했던. 그렇기에 항상 유행의 끝물을 타는 나 역시 쓸만한 DSLR을 구해 딱 봐도 무거워 보이는 렌즈 서너 개에 삼각대까지 챙겨 들고는 사진을 찍으러 다니던 그런 때였다. 파리에도 그것들을 짊어지고 갔으니까.. 내가 미쳤지.


아무튼 에펠탑 얘기로 돌아와서 간 밤에 '왜 숙소를 에펠탑 근처로 잡아서..' 하는 생각을 하던 나는 내일 아침 일찍 한 번 가보자는 생각을 했다. 이를 마지막으로 멋진 에펠탑을 찍는 건 그만두겠다는 결심으로. 지금 생각해 보면 오기가 아니었나 싶을 정도다. 아니, 정말 멋진 에펠탑 사진들이 인터넷에 그렇게 많은데 뭐 그리 대단한 사진 찍겠다고 그것도 여행 온 한국인이.




어쨌든 알람을 맞춰두고 새벽에 일어났다. 그리고 아내를 깨웠다.

전날 몽마르트르 언덕을 비롯 이곳저곳 걸어 다니느라 피곤했을 텐데 고맙게도 아내는 눈 비비며 일어나 나와 함께 해줬다. 우린 에펠탑이 보이는 사람들이 늘 북적대던 그곳으로 갔다. 몇 명은 있겠지 했던 예상과는 달리 몇 마리 비둘기 밖에 없는 그곳은 지난 며칠 동안 보아오던 에펠탑과는 달랐다.

조용하고.. 평화롭고.. 하지만.

북적대는 사람들만 없으면 정말 멋지게 담을 수 있을 거 같았던 에펠탑은 아무리 봐도 별로였다. 


에펠탑 사진은 그만두고 아내의 모습을 찍었다. 세수도 안 하고 나왔는데 무슨 사진이냐며 준비가 안 되어 있다는 아내에게 이런저런 포즈를 주문하며 몇 장 찍고 있는데 저쪽에서 하얀 드레스에 검은 신사복을 입은 커플이 카메라맨과 함께 걸어왔다. 그들은 프리웨딩 촬영을 하러 온 것이었다. 카메라를 든 사람은 이 동네 토박이인 듯 한 장면을 촬영하는데 3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렇게 위치를 옮겨가며 찍더니 드디어 내가 있는 쪽으로 왔다. 


망설였다. 말해볼까. 

그렇게 몇 컷을 찍으면 그들은 다음 장소로 이동할 것이었다. 

난 막 세팅을 마치고 촬영을 하려는 그에게 다가갔다.


'죄송한데, 제 카메라로 딱 한 컷만 찍어도 돼요?'


그는 내 눈과 카메라를 한 번씩 번갈아 쳐다보더니 탐탁지 않은 얼굴로 말했다. 저 커플한테 가서 그래도 되나 물어보라고. 다음 장소로 이동해야 해서 서둘러야 한다고. 


감사하게도 커플은 나를 위해 흔쾌히 포즈를 취해주었다. 


이른 새벽이었기에 미명에 흔들리지 않는 사진을 찍으려면 삼각대를 써야 했지만 가져간 삼각대를 세울 여유 따윈 없었다. 감도를 자동으로 두고 다이얼을 휙 돌려 셔터 스피드를 높인 뒤 촬영버튼을 눌렀다. 나중에 RAW파일을 손보면 나쁘지 않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게 난 이 사진을 찍었다.


Eiffel, 2015


근데 왜 하필 흑백이냐고? 


여행에서 돌아와 보정을 위해 저장된 RAW파일을 열어보니 많은 파일들이 깨져 있었다. 하필 이 사진도. 무심코 웃어넘겼던 이야기가 내게도 일어날 줄은.. 깨질 거면 jpg파일이 깨질 것이지. 몇 번이나 이 사진이 생각날 때마다 jpg파일을 만지작거렸는지 모른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보고. 하지만 아직까지 마음에 드는 컬러이미지를 못 만들어냈다. 어쩌면 마음에 드는 한 장은 끝내 못 만들지도 모른다. 


그래서 아쉬운 사진이지만 이 사진은 많은 걸 떠오르게 한다. 어찌 보면 특별할 것 없는 흔하디 흔한 프리웨딩 사진일지도 모른다. 그 카메라맨은 그날 내가 촬영한 각도에서 찍진 않았지만 이와 비슷한 사진이야 찾아보면 얼마든지 있을 법한 그런 사진이니까. 하지만 저 두 사람이 이런 포즈로 찍은 사진은 이 사진이 유일하지 않을까. 


에펠탑이 주인공인 수많은 멋진 사진들을 보면 지금도 이 사진을 떠올린다. 


에펠탑을 배경으로 행복한 미소를 짓던 커플의 얼굴이 생생한데 결혼해서 자알 살고 있겠지.


내가 찍은 최고의 에펠탑 사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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