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사진
한동안 '캘리그래피'가 취미활동으로 인기를 구가했던 적이 있었다. 서점에 가면 캘리그래피 관련 책들이 취미코너 매대의 상당 부분을 차지할 정도였다. 사람마다 생각은 다르겠지만 2010년을 전후로 그 후 10년 가까이 '캘리그래피'가 우리나라에서 큰 유행을 하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아이팟과 아이폰이 세계적인 성공을 거둔 것과 무관하지 않다는 생각이다.
지금은 고인이 되었지만 당시 애플의 CEO였던 스티브잡스의 삶과 태도, 그의 철학이 글로벌하게 조명을 받게 되면서 수많은 책과 잡지, 기사와 영상들이 쏟아져 나왔었다. 그리고 애플의 디자인 철학과 초창기 캘리그래피에 대한 스티브잡스의 집요함이 함께 조명된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캘리그래피 자체가 유행을 탄 것은 결코 무관한 일이 아니다.
'서예(書藝)'를 영어로 '캘리그래피(Calligraphy)'라 하는 것이니 본질이야 같겠지만 내게 있어 서예는 태도이자 의지인 반면 캘리그래피는 기술이다. 애초 사물에 대한 '관심'이란 것이 현대를 사는 내게 있어 상당 부분 기술에서 시작한다는 걸 알지만 결국 파고들어 생각해 보면 그 관심의 본질은 대부분 태도와 의지에 관한 것이었다.
아버지는 오랫동안 줄곧 붓을 놓지 않고 서예를 해 오셨다. 그리고 나도 초등학생 때는 서예를 했다.
어린 시절 난 아버지의 붓글씨 선생님을 뵈러 대전에 있는 '정림장'이란 곳에 아버지를 따라 두어 번 다녀온 적이 있다. '정향(靜香)'이라는 호를 쓰시는 그분은 부여 부소산성에 있는 '영일루'라는 누각 안쪽에 걸린 현판을 쓰신 분이라고 했다. 붓글씨를 연습하고 있는 제자들 앞을 지나 그분이 앉아 계신 곳에서 3미터는 더 떨어진 곳에 꼬박 무릎 꿇고 앉아 아버지와 그분의 대화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두 분의 대화가 끝나고 아버지가 가자 하셨을 땐 다리가 저려 못 일어나고 쩔쩔맸던 기억이 생생하다.
아무튼 아버지가 그 '정향'이란 분께 붓글씨를 배우러 다닌 게 중학생 때였다고 하셨으니 그 후 60년 가까이 서예를 해 오신 것이다. 지금도 부모님 댁 아버지 방에선 먹물 냄새가 난다. 좌식 책상 옆으로는 화선지가 수북이 쌓여 있고 벼루엔 마르지 않은 먹물이 늘 먹향을 풍기는 탓이다.
'어떻게 저렇게 수십 년을 앉아 같은 행위를 하고 있지?'
아버지와 근본적으로 성향이 다른 난 때때로 그런 생각을 하며 새삼 아버지가 끈기와 인내의 화신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가끔 했었다.
그러다 수년 전 구양순체로 '해서'를 다시 연습하고 있다는 아버지께, 맨날 혼자 그렇게 연습만 하시지 말고 서예대전이나 어디 대회라도 내보시는 건 어떠냐 말씀드린 적이 있는데 아버지가 그러셨다. 그런데 낼만큼 잘 쓴 글씨가 아니라고. 이런 글씨로 나가긴 어딜 나가냐고.
그러면서도 자식이 결혼을 하거나 집안에 경사가 있을 때면 늘 마음을 담아 쓴 붓글씨를 선물하신다.
난 사진을 하면서 비로소 아버지가 어떤 마음으로 '서예'를 하고 계신 건지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아버진 구양순체가 쓰면 쓸수록 어렵다 말씀하시지만 정작 어려운 건 구양순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다.
세상에 내놓아도 되지만 그러지 않는 건 태도이자 의지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사진가인 사울 레이터(Saul Leiter, 1923~2013) 역시 그가 찍은 수만 장의 사진들을 굳이 사진집으로 내려하지 않았다. 자신이 죽은 뒤 재단이 설립되면서 자신이 묻어뒀던 사진들이 세상에 나오고 있는 걸 하늘에서 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이 들까.
이렇게 써놓고 보니 내겐 사진이 마치 서예 같다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