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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도비 Nov 13. 2019

헛된 바람

누군가를 진정으로 좋아했던 기억은 그 자체만으로 힘이 될 때가 있다

<헛된 바람> - 구영주 


어느 

이름 모를 거리에서

예고 없이

그대와

마주치고 싶다 


그대가 처음

내 안에 들어왔을 때의

그 예고 없음처럼 


스물다섯 살에 나는 아이돌 ‘덕질’을 시작했다. 남들은 십 대 시절 다 졸업한다는 아이돌 덕질을 나는 이십 대가 한참 넘어서야 시작한 것이다. 방 안은 그 아이돌 사진으로 도배했고, 그 가수가 나오는 방송은 모조리 챙겨보았다. 음악방송을 보러 밤을 새워 줄을 서고, 구하기 힘들다는 콘서트 티켓도 발품을 팔아 구했다. 스무 살도 훨씬 지난 나이에 나처럼 ‘어린 오빠’들을 좋아하는 친구는 없었다. 때문에 친구들에게는 핀잔을 들었고, 가족들에게는 한심하다는 눈빛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나는 포기할 수 없었다. 그때 나에게는 그 가수만이 인생의 낙이었다.  


당시에 나는 오랫동안 준비하던 시험에 떨어지고, 세상에 홀로 버려진 기분이었다. 남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친구들은 회사나 대학원으로 바빴다. 시험 준비로 몸과 마음이 잔뜩 상한 채로 집에만 처박혀 있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한 친구가 등산이라도 하자며 나를 집 밖으로 끌어냈다. 오랜만의 외출인데다 땀을 흘리며 산에 오르니 상쾌했다. 그때 산 정상에서 친구가 한 아이돌의 노래를 틀어주었다. 그날부터 나는 그 아이돌의 팬이 되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비정상적으로 맹목적이었다. 누군가의 일부만 보고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당시에 우연히 그를 마주치는 상상을 자주 했다. 실제로 만난다면 감격에 겨워 아무 말도 못 할 것 같지만, 내 시나리오 상에서 나는 이런 말을 하고 있었다. “어디에서 무엇을 하든지 응원할게요.” 그 아이돌을 떠올리며 외웠던 이 시의 제목은 ‘헛된’ 바람이다. 하지만 허황되고 터무니없는 마음이라고 해서 품지 말아야 할 이유는 없다. 때로는 그 헛된 바람 덕분에 살아갈 힘을 얻기도 한다. 


그 아이돌 덕분에 나는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음반과 콘서트 살 돈을 구하기 위해 알바를 시작했다. 콘서트와 음악 방송을 다니며 친구도 사귀었다. 여러 사람을 만나고, 생활에 활력이 생기기 시작했다. 인생의 실패인 것처럼 느껴지던 불합격이 별 것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눈을 뜨면 할 일이 있었고, 만나야 할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게 나는 서서히 변해갔다. 결정적으로 집 밖으로 나올 수 있었던 것은 어느 날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가장 애정을 가진 존재에게 하고 싶은 말들은 내가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던 말이었다. “응원하겠다.”는 말은 스물다섯의 나에게 필요한 말이었다. 몇 년간 준비한 시험에 떨어지고, 갈 곳 없이 방황하던 나에게 말이다.  


이제는 5년 전처럼 덕질에 모든 일상을 할애하지는 않는다. 모든 방송을 챙겨보지도, 음악 방송을 보러 방송국 앞에 줄을 서는 일도 없다. 하지만 여전히 그와 관련된 기사는 꼭 한 번 클릭하고, 보던 방송에 그가 나오면 반갑다. 예전과 같은 마음이 아님에도 한 번쯤은 그를 우연히 마주치고 싶다. 지금의 나는 그에게 무슨 말을 할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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